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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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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떠나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는 삶

Hulot 2020. 2. 7. 15:41

주류 영화제작 시스템에서 벗어나 독립제작으로 만든 배창호 감독의 <정>(2000)이 공개된지 20년이 지났다. 2006년 ‘작가를 만나다’로 소개하고, 2008년 배창호 감독 전작전을 하면서 상영했으니, 12년만의 재회다. 그 사이 유튜브에서는 스페인어 자막의 영화가 업로드되어-허락된 일은 아니다- 842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기이한 일이 있기도 했다. 디지털로 전환되지 않아 35mm 필름 프린트로만 극장에서 상영가능한 탓에 소개될 기회가 여전히 많지 않은 작품이다. 한국영화의 많은 작품들이 아직 이런 상황에 있다. 예전 이 영화에 대해 썼던 소개글의 일부.
작가를 만나다 2월 8일(토) 오후 6시 40분 <정> 상영 참석 | 배창호 감독, 김유미 배우 데뷔작인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서 시작해 최근작인 <여행>(2009)까지 배창호의 영화는 떠나는 사람들의 여행을 그린다. 언젠가 배창호 감독에게 “왜 감독님의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매번 길을 떠나는가”라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그는 “누군가가 떠나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모습”이라 말했다. 삶은 언제나 다시 무언가를 찾아 떠나고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기에 자신의 영화가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을 초월하는 센티멘털리티와 방랑성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문제는 유랑의 불가피성에 있다. 왜 인물들은 집을 떠나는가? 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거주할 집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살던 집에서 마음이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일종의 ‘퇴거退去의 영화’라 부를 수 있다. 집이 없거나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하여 그들의 필연적인 유랑과 여정,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나는 이러한 구도가 웨스턴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가령 한 여자가 마을 어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린다. 저 멀리 신작로 길로 버스 한 대가 들어오고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본다. 배창호 감독의 <정>의 초반부 장면이다. 뭔가 특별할 것이 없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 시작부가 배창호 감독의 영화가 지닌 무의식을 슬쩍 보여주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황량한 들판을 쳐다보며 서 있는 한 여인, 그리고 어딘가 멀리서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그 여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말하자면 전형적인 웨스턴의 도입부이다. 아니, 마지막의 풍경이라 말할 수도 있다. 버스가 들어오는 장면에 역마차나 말이 갑자기 나타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배창호의 영화는 웨스턴의 무의식을 작동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여정은 마음의 거처를 찾기 위한 모험이기도 하다. <황진이>의 한 장면에서 스님은 황진이에게 ‘육체의 거처는 정해진 것이 아니니 마음의 거처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황진이의 여정은 육신의 유랑과 더불어 몸이 계속 낮은 상태로 나아가며 최종적으로 몸은 무너지지만 정신은 고양되어가는 중력과 은총의 이야기다. 배창호의 영화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고정불변한 것이거나 원래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영화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거나 방랑을 거듭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영화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집을 떠난 방랑자가 길을 걷는 여정에 의해 생겨나 타인과의 만남으로 생겨난다. 여행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 그것의 불가역성을 거스르는 것은 그의 영화에 흐르는 되돌아가는 시간이다. 직선적인 움직임에 저항하면서 그의 영화는 우리를 끊임없이 과거로 되돌아가게 한다. 과거로 되돌아가야 한다. 좋은 것은 과거에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현실이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배창호 감독은 그것이 원형성에의 추구라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거기에 뭔가 더 좋은 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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