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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라울 루이즈, 1941-2001 본문

영화일기

라울 루이즈, 1941-2001

Hulot 2011. 8. 20. 16:17

라울 루이즈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외국의 영화잡지에 부고란이 있을 정도로 요즘 들어 우리 시대(지난 세기의 절반 이후의 작가를 그렇게 말하고 싶다)의 거장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와 더불어 영화제에서 그의 영화를 만나는 일이 가장 기쁜 일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 그런 즐거움과 기쁨 하나가 사라졌다. 한 작가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라 말한다. 루이즈의 경우에는 더 많은 세계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가 구축했던 것이 복수성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누신젠 하우스>를 보았을 때 G.V.에 라울 루이즈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던 탓에 잠시 착각을 했던 일이 생각난다. '설마'하면서도 영화가 끝난 후의 G.V.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만 등장했다. 그래도 그녀가 말한 에피소드 하나가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라울 루이즈 감독의 일과 중의 하나가 도서관에서 고문서들을 뒤적거리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중세 시대의 마녀 재판, 사건 일지, 범죄 기록 등을 읽는다고 했다.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그런 사건들을 배우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단다. 가늠할 수 없는 기이한 세계의 융합이 그런 먼 곳의 세계를 조사하는 이상한 독서와 탐구에서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2006년에 '라울 루이즈 회고전'을 기획했었다. 아래의 글은 '회고전'에 맞춰 지금은 없어진 '필름 2.0'에 썼던 글이다. 이 다산의 작가를 소개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몇 편의 주요작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 이후에 나온 루이즈의 신작들 대부분은 영화제를 통해 상영되었고 몇 편은 개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작품들과 재회하기란 쉽지 않다. 2006년 이래로 루이즈의 회고전을 다시 해볼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그가 빨리 세상을 떠났다.
라울 루이즈는 영화에 관한 대표적인 두 권의 책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의 시학'이란 제목으로 두 권을 저술했다. 그의 독특한 바로크 미학을 담아낸 책으로 영화감독이 저술한 영화론으로서는 타르코프스키의 저술에 필적할 만하다. 루이즈의  책의 서문 말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나의 책은 일종의 여행이다. 그런데 여행자들은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안내하는 길이 또한 여행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루이즈의 영화 또한 그러했다. 이제 그가 진정으로 낯선 세계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김성욱. 2011/08/20)   

 



꿈의 원근법, 라울 루이즈의 세계[각주:1]

T.S. 엘리엇은 ‘알지 못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지의 길을 이해해야 한다’라는 말을 했었다. 이는 라울 루이즈의 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게도 어울리는 적절한 교훈이다. 가령 그의 영화는 복잡한 미로와도 같아서 좀처럼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거나 인식의 지도를 그리기가 쉽지 않다. 그의 영화를 몇 편 접한 관객들이나 영화 애호가들에게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에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1941년, 칠레에서 태어난 라울 루이즈 감독이 지금까지 만든 영화 편수는 백여 편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직 신만이 그의 전작을 보았을 것이라는 농담이 나돌기도 한다. 그럴 정도로 루이즈의 영화는 너무 많고, 또 보기가 쉽지 않다. 60년대 칠레에서 그가 만든 영화를 논외로 하더라도, 그리고 1978년작인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을 새로운 출발점의 영화로 상정하더라도 이후 그가 한 해에 6편 정도의 속도로 작품을 만들어온 것을 감안한다면 일단 그의 세계 전체를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조금 용기를 내어 시네마테크에서의 회고전을 빌어 이 미지의 작가가 만들어 놓은 복잡한 미로에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위대한 미로의 창조자가 또한 위대한 영화의 창조자였던 것처럼 라울 루이즈의 미로는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가 칠레에서 70년대에 망명한 영화감독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라울 루이즈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으며 1960년대에 영화작업을 시작했고 70년대 초에는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영화고문으로 활동하다 피노체트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망명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는 유랑의 작가였다. 이 때부터 그는 1년에 여섯 편 정도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작업의 기회를 받아들이면서 마치 B급 영화감독처럼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즈는 "나는 B급 영화를 통해 모든 것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그가 로저 코먼과 영화작업을 함께 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저예산에 다수의 작품으로 제작의 위험을 줄이면서 한 편의 예술작품보다는 작품의 총량으로 영화의 역사에 기여하려 했던 B급 영화감독으로서의 라울 루이즈의 노력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작품의 내용 이상으로 그것이 만들어지는 조건과 다양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다산성은 일치감치 그의 작품의 범주화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게다가 루이즈의 영화는 관객들을 어리둥절케 하는 이야기로 혼란에 빠지게 한다. 그의 영화는 종종 ‘초현실주의’, ‘마술적 리얼리즘’ 혹은 ‘바로크적인 영화’로 불린다. 루이즈 스스로는 ‘초현실주의’보다는 ‘바로크적’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는데, 이는 초현실주의의 스테레오타입과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바로크적인 ‘알레고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루이즈에게 영화란 유령, 좀비, 사자(死者)들이 거주하고 출몰하는 알레고리적인 시스템에 가깝다.




망명과 월경의 경험은 루이즈의 작품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월경의 경험은 물리적인 거리와 시간을 융합하는 특별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의 영화가 이러한 경험을 반영한다. 루이즈의 영화에서는 종종 멀리 떨어진 공간, 혹은 서로 다른 시간, 심지어 서로 다른 삶이 서로 가까워지면서 확대되고, 충돌하고, 융합하고, 상호침투하면서 일종의 도착적인 세계가 만들어진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세계란 거대한 희극이면서 동시에 악몽의 세계이기도 하다. 의혹과 배반, 속임수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가령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이나 <세 개의 삶과 하나의 죽음>, 그리고 <꿈속에서의 사랑싸움>과 같은 작품에서 우리는 사물, 공간, 몸이 더 이상 단일성이 아닌 복수성의 세계에 거주하며 내부와 외부, 상상과 실재, 감각과 환각 사이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넘나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하면 라울 루이즈는 영화에서 새로운 시공간의 원근법을 시도했다. 아니 꿈의 원근법, 혹은 감각의 원근법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라울 루이즈는 현실과 꿈, 기억과 경험 간의 복잡하고 파악하기 힘든 불일치성, 그것의 틈에 주목한다. 그의 영화에서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 한 인물에 다른 인물이 연결되고 중첩되고 분기하면서 두 번째, 세 번째 이미지와 이야기, 새로운 인물이 탄생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부뉴엘의 초현실주의 영화에 펠리니의 상상이 만나면서 여기에 알랭 레네식의 기억의 출현이 도래하는 듯한 형국이다. 그의 영화는 삶의 길 위에서 알수 없는 어두운 숲과 마주하는 듯한 체험을 하게 한다. 우리를 목적지로 안내할 똑바른 길은 사라져버렸다. 이제 삶은 미로처럼 굽은 길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우리 앞의 세계는 마치 눈속임 그림처럼 허위와 속임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실로 영화적인 것이 아닌가. 영화는 일종의 환각기계이며 속임수 장치이고 끊임없이 꿈같은 유령들을 생산해낸다. 루이즈에게 삶은 또한 거대한 꿈이다. (김성욱)






주요 상영작 소개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 L'hypothèse du tableau volé 1979 프랑스 B&W 66min
출연: 장 루즐, 가브리엘 가스콩, 안 드부아, 샹탈 팔래, 알릭스 콩트, 장 르노, 장 나르보니
70년대 루이즈의 영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19세기 파리에서 도난당한 그림에 관한 의미를 둘러싸고 외화면의 음성과 수집가가 논쟁을 벌이는 독특한 영화다. 피에르 클로솝스키의 작품을 원안으로 ‘활인화’를 통해 영화와 회화를 대조시키며 일종의 눈속임그림 같은 영화의 환각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고래 위에서 Het Dak van de Walvis 1982 네덜란드 Color 90min
출연: 빌레케 반 아믈루이, 장 바댕, 페르난도 보르두, 에르베 퀴리엘, 루이스 모라
루이즈의 영화 중 가장 지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논란적인 영화. 파타고니아의 마지막 종족에게서 언어를 배우려 노력하는 인류학자의 곤경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나 드라마 못지않게 유머가 넘치는 대사와 컬러에서 세피아톤으로 변하는 화면이나 시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앙리 아르켕의 독특한 촬영 또한 뛰어나다. 

  
해적들의 도시 La ville des pirates 1984 프랑스/포르투갈 Color 111min
출연: 위그 케스테르, 안 알바로, 멜빌 푸포, 앙드레 앙헬, 두아르테 드 알메이다
외딴 섬에 위치한 성을 무대로 배회하는 유령들이 광란의 섹스와 카니발을 벌인다. 루이스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의 <황금시대>와 프리츠 랑의 <문플릿>, 그리고 <피터 팬>과 <보물섬> 등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로 루이즈의 초현실주의, 환상성의 정점을 보여주는 신비하고 매혹적인 영화다. 

 
세 개의 삶과 하나의 죽음 Trois vies et une seule mort 1996 프랑스/포르투갈 Color 123min
출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안 갈리에나, 멜빌 푸포, 키아라 마스트로얀니, 아리엘 동발
90년대 루이즈의 ‘양질의 영화’로의 변모를 보여주는 전환점의 영화로 마스트로얀니와 같은 유명스타들을 기용해 ‘천일야화’와도 같은 이야기 안의 이야기, 분기하면서 되풀이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20년을 살다 집에 돌아가 죽는 남자, 거지가 되는 부자, 갑자기 유산을 상속받는 젊은 커플 등의 이야기에 한 남자가 부랑자, 교수, 하인의 세 번의 삶을 동시에 살게 되는 현실과 환상의 불일치가 기입되어 있다.


범죄의 계보 Généalogies d'un crime 1997 프랑스/포르투갈 Color 114min
출연: 카트린 드뇌브, 미셸 피콜리, 멜빌 푸포, 베르나데트 라퐁, 마티유 아말렉
20세기 초, 비엔나의 아동심리학자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정체성의 전이의 과정이 스릴러 장르의 형식을 빌어 표현된다. 변호사인 솔랑주는 르네의 범죄를 변호하게 되는데, 르네는 이 과정에서 솔랑주를 자신의 죽은 숙모로 받아들이고 솔랑주 또한 르네를 자신의 죽은 아들로 이해하게 된다. 


되찾은 시간 Le temps retrouvé 1999 프랑스/이탈리아/포르투갈 Color 158min
출연: 카트린 드뇌브, 엠마누엘 베아르, 벵상 페레, 존 말코비치, 파스칼 그레고리, 키아라 마스트로얀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최종장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도저히 영화로 옮길 수 없을 것이라는 프루스트의 복잡한 시간과 기억의 이야기가 루이즈의 손을 빌어 매혹적으로 펼쳐진다. 카트린느 드뇌브, 엠마뉴엘 베아르 등 프랑스의 명배우와 존 말코비치의 연기가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꿈속의 사랑싸움 Combat d'amour en songe 2000 프랑스/포르투갈/칠레 Color 120min
출연: 엘자 질버스타인, 멜빌 푸포, 크리스티앙 바딤, 랑베르 윌슨, 마리 프랑스 피시에
루이즈의 영화 중 가장 착란적이고 복잡한 영화로 어떤 지각의 기준점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끊임없이 넘나들게 하는 체험을 선사한다. 의심에 사로잡힌 신학생의 이야기, 신비로운 마술적 힘에 빠진 화가, 은총과 자유의지 간의 충돌에 대한 신학적 논쟁 등, 아홉 가지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서로 겹치면서 복잡하게 전개된다.


두 어머니의 아들-순수의 연극 Comédie de l‘innocence 2000 프랑스 Color 100min
출연: 이자벨 위페르, 안 발리바르, 샤를 벨링, 닐스 위공, 에디트 스콥, 드니 포달리데스
아홉 살의 생일을 맞은 카미유는 그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그녀의 자식이 아니라며 진짜 어머니를 찾아 나서겠다고 선언한다. 19세기 이탈리아인 마시모 본템펠리가 쓴 소설 <두 어머니의 아들>을 개작한 영화로 두 어머니를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 삶의 복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1. 2006년 4월에 '라울 루이즈 회고전'을 기획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글은 당시'필름 2.0'에 썼던 라울 루이즈의 영화세계를 소개하는 짧은 글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