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명보극장, 애타게 민공례에 대한 기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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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중 한사람인 김태용 감독이 <우묵배미의 사랑>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설렘은 2년 전쯤 광화문의 한 극장에서 <세상의 모든 아침 Tous Les Matins Du Monde>(1991)을 다시 스크린으로 보던 날의 떨림과도 유사했다. 다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게 되다니!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이 개봉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주저 없이 명보극장을 찾은 것은 1990년 4월 초 쯤의 일이다. 이미 1년 전 공중파를 통해 인기몰이를 한 드라마 [왕룽일가]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명보극장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깊고 푸른 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위시한 한국영화 개봉 비중이 높았던 곳도,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음향시설을 갖춘 곳도 명보극장이었기에 내게 있어 명보극장 개봉작이란 곧 볼 만한 좋은 영화를 의미했다.

장선우의 세 번째 연출작 <우묵배미의 사랑>(1990)은 서울에서 소일하다 예전에 살던 우묵배미로 다시 돌아간 배일도가 그곳에서 미싱사 민공례를 만나 벌이는 사랑과 불륜의 이야기를 회고담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박영한의 소설『왕룽일가』에 따르면 우묵배미는 “서울시청 건너편 '삼성' 본관 앞에서 999번 입석을 타고 신촌, 수색을 거쳐 50분쯤 달려와 낭곡 종점”근처에 있는 변두리 마을의 이름이다. 김포 부근에 위치한 소읍으로 예전에는 완연한 시골이었겠지만 지금은 연립과 빌라의 신축 분양 광고가 줄지어 나부끼고 있는,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곳이다. 다만 영화에서는 ‘우묵배미’가 구리시 너머 어디쯤 위치한 것으로 보여 지는데 이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서울의 지속적 팽창이 마침내 인근 도시까지 파고들어 난개발을 유도한 결과 생겨난 동네가 '우묵배미'이고, 영화는 그곳에 있던 원주민과 흘러들어온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난 이야기라는 점에서, 유사한 삶의 풍경을 간직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남편의 학대와 힘겨운 노동 속에 사는 민공례와 “아무 남정네 앞에서나 절구통만한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헤프게 웃음 짓는”천박하고 거친 아내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배일도 사이의 불륜을 어떤 구원처럼 묘사하고 있다. 추레한 공간과 남루한 삶을 전경화시키고 있음에도 이들의 불륜이 한 없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배일도의 아내인‘새댁’의 영화 속 위상이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 배일도의 입을 빌려 존재하던 새댁이 어느 순간엔가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데, 이렇듯 돌연한 화자의 교체와 위상변화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배일도와 민공례가 아닌 ‘새댁’을 주목해야 하는 것과 ‘민공례’가 아닌 ‘민공례에 대한 기억’을 찾아서라는 나의 표현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민공례와 벌였던 짜릿한 불륜의 시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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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보자. 그러니까, 민공례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영화는, 민공례가 아닌 다른 여자와 외박을 하고 들어온 어느 날 새벽, 배일도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흥미롭지 않은가? 그녀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굴고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같은 여인 민공례를 만나게 해준 우묵배미를 잊을 수 없다던 그가, 민공례가 떠난 후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들어와서는 그녀를 회상하다니. 그것도 하필 민공례와 낭만적 정사를 나누던 그러나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비닐하우스 옆에서 말이다.

또 달리 주목할 것은 이 영화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물게 균질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인데, 다시 말해 전통과 현대, 고상함과 비속함, 비극과 희극, 육체와 영혼, 연민과 냉소, 카니발과 일상 등 대극의 세계를 통해 당대사회와 긴장하면서 교접하는 방식을 택해온 장선우 영화의 미학이, <우묵배미의 사랑>에 이르러 정점을 찍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민공례와 새댁의 대극적 이미지를 통해 진일보된 계급투쟁의 방식을 보여주는 감독의 시선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영화의 오프닝 신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이며 수동적인 여성의 몰락과 강하고 능동적이며 억센 투사형 여성이 지배하게 될 가까운 미래에 대한 눈 밝은 예언인 동시에, 샛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 관계에 관한 친절한 안내서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대립적 세계인 세 남녀 사이를 유영하며 그것들을 충돌시키고 화해시키는 동안 만들어내는 리얼리즘, 장선우가 장기로 사용해왔던 영화미학은 관객과의 거리를 제거하며 영화 속으로 빠져들도록 기능하고 있다. 예컨대 영화 종반 새댁에게 붙잡힌 배일도가 옷이 찢겨진 채 끌려나올 때 동네사람들이 그들을 따라가며 택시를 둘러싸던 시퀀스와, 배일도의 고향집에 당도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마당으로 모이는 시퀀스는 카니발처럼 연출되고 있는데, 이 제의(祭儀)는 가정에 안착해 일상으로 되돌아간 배일도와  생선을 발라줄 정도로 조신해진 새댁의 모습으로 이어지면서 관객의 정서적 참여를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적 영화주의자임을 자처했던 장선우는 시대를 앞서가는 비평가보다 한발 앞선 시선으로 영화를 찍었고 신인보다 더 결기 넘치는 방법을 통해 시대를 담아낸 인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묵배미의 사랑>이 이룬 안정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는 여타 그의 영화들과 비교할 때 이질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장선우의 영화가 새로운 시기를 맞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이 영화에는 감독의 (민중을 소재로 하지 않은)다른 영화와는 달리 풍자와 조롱의 시선을 거두고 민중의 삶에 대하여 속살거리고자하는 장선우의 속내가 감지된다. 풍자와 비판이 도덕적이거나 하다못해 상상적 우월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애초부터 우묵배미 민중의 삶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장선우가 고달픈 민중의 삶 속에서 길어 올린 사랑과 불륜의 따뜻한 휴먼드라마이다. 동시에 그는 어느 추레한 술집 구석에 앉아 배일도와 민공례의 이야기를 엿듣거나 새댁의 악다구니를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받아넘기기도 하고, 배일도의 외도행각을 눈감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식인의 형상을 한 검은 뿔테의 주인집 남자, 혹시 그가 장선우의 페르소나는 아니었을까? (백건영: 영화평론가, 네오이마주 편집장)

[관련 포스트]
김태용 감독의 ‘내 인생의 영화’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에 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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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면서 웃음이 나고, 판타스틱하면서 또 리얼하고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은 그렇게 양가적인 감정을 만드는 영화다. 인간이 가지는 타락과 죽음에 대한 필연은 당연한 것이면서도 느낄 때마다 섬뜩 섬뜩 무서워지게 만든다. 영화 <집시의 시간>은 우리가 언제나 느끼고 있는, 하지만 잘 의식하지 못하는 그 운명에 대해 말한다.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은 양가적인 감정을 만드는 영화다. 슬픈 장면이면서도 관객에게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하지만 그 웃음 때문에 다시 마음은 조금 더 공허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집시의 시간>은 아주 판타스틱하면서 리얼리즘적이다. 숟가락은 페란의 눈빛을 따라 움직였고, 칠면조는 페란의 목소리를 따라 날개를 폈다. 하지만 그런 페란도 돈을 벌기 위해 로마로 떠나야 했다. 이런 식으로 영화가 만들어 낸 결말 역시 무척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운 면모가 있다. 반면 다시 생각하면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던져준다. 무엇이 당혹스러웠고 무엇이 당연한 것이었을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장면에 <집시의 시간>이 가지는 커다란 울림이 있다. 


페란은 그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결국 죽어버린다. 화면은 그의 장례식으로 이어진다. 시신 위에는 그가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만든 돈이 놓여 있다. 눈에는 금화, 손 등에는 지폐들이 너저분히 놓여있다. 아들 페란은 아버지 페란 눈 위에 놓인 금화 하나를 훔쳐 달아난다. 아들 페란은 아버지 페란이 자주 했던 행동을 상기시키듯 박스 속에 들어간 채 달아난다. 그리고 망나니 삼촌은 아이를 뒤쫓는다. 달아나는 아들 페란의 뒷모습은 아버지 페란과 완벽하게 닮아 있다.


결말의 충격은 페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충격은 아들 페란이 아버지를 애도하기는커녕 시신 위의 돈을 훔쳐 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들 페란의 사라지는 뒷모습과 뒤쫓는 삼촌의 뒷모습으로 스틸 처리된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모두들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들 페란은 아버지 페란과 같은 집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들 페란 역시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배울 것이며 자신이 거짓말을 시작한 후부터는 남의 말도, 신의 뜻도 믿을 수 없게 될 것을 말이다. 시간은 흐르고 페란은 죽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아들 페란을 쫓던 삼촌 역시도 다시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갈 것이며, 할머니는 아들 페란의 타락함에 다시 눈물을 흘릴 것이다. 집시의 삶은 다시 반복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돌고 도는 것처럼. <집시의 시간>의 엔딩 장면에 가슴이 벅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그 말을 하고 있어서다.


인간이 가지는 타락과 죽음에 대한 필연은 당연한 것이면서도 느낄 때마다 섬뜩 섬뜩 무서워지게 만든다. 영화 <집시의 시간>은 우리가 언제나 느끼고 있는, 하지만 잘 의식하지 못하는 그 운명에 대해 말한다. 그것도, 다른 민족보다 더욱 직관적이고 영적인 집시들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보다 더 순수하게 그려지는 집시들이 타락하고 죽는 운명을 보아야 하는 관객의 슬픔은 배가 된다. 숟가락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아들이 집의 벽을 뜯어버리는 행동을 해도 의연하게 처연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볼 수 있는 집시들도 다르지 않게 살고 있던 것이다. 저들도,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삶이라고 영화는 나지막하게 그러나 냉정하게 말한다.


허나 그것을 말하는 에밀 쿠스트리차의 시선은 결코 차갑지 만은 않다. 그의 영화 속에는 집시의 대한 한없는 관심과 애정, 그리고 깊이 있는 이해가 담겨 있다. 그들의 삶은 다르지 않게 다시 돌아갈 테고 여전히 집시는 다시 꿈을 꿀 것이다. 그들은 꿈꾸는 법을 잊지 않는다. 페란의 육체가 다시 고향을 찾게 된 것처럼 말이다. 꿈을 꾼만큼, 현실 앞에 타락해야 한만큼 그만큼 아름다운 집시들, 그리고 그 만큼 더 슬픈 집시들을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에서 만난다. (김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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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일정]

[관련 포스트]
임순례 감독이 추천한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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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hara 2010.06.15 00:59 신고

    참 괜찮게 봤던 영화에요.
    한동안 떠나가지 않았던
    장면들이 이 글을 읽으니까 다시 떠오르네요.
    잘 읽고 갑니다^^

오랜 영화 친구 장 피에르 레오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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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최고의 러브 스토리이며 장 피에르 레오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는 영화다. 이번에 재회하게 될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십여 년 전의 기억과 영화는 또 얼마나 다를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스크린을 통한 오랜 영화친구 장 피에르 레오와의 만남이 사뭇 기대된다.


장 피에르 레오. 지난 해 ‘200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도 우리는 그를 만났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출발>이란 영화에서다. 그와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와의 조합은 왠지 어색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기우였던 것 같다. 그는 <출발>이란 영화에서 자동차 경주에 나가고 싶어 안달인 청년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입상은 커녕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지도 못한다. 그렇다. 그는 언제나 흥분된 목소리로 내면의 열정을 내뱉지만, 그 끝에서 항상 실패하는 청년의 얼굴로 기억되곤 한다.


참 신기한 일이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크 리베트,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장 으스타슈, 필립 가렐, 아키 카우리스마키, 올리비에 아쌰야스, 차이밍량 같은 감독들과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를 찍으면서도 그는 변변한 영웅의 연기를 한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좌절하는 법을 가르치진 않았다. 오히려 청년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계속 버티고 끝없이 투쟁하는 존재라는 걸 몸소 보여준다.


사랑에 빠진 남자를 연기할 때도 그는 마찬가지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위태롭고, 그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를 버리고, 그가 연기하는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 일쑤다. 2008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그와 다시 만나게 해줄 작품 또한 그런 사랑이야기이다. 프랑수와 트뤼포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그는 트뤼포의 1971년 작품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으로 우리와 조우한다.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쥴 앤 짐>의 원작자이기도 한 앙리 피에르 로셰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트뤼포는 앙리 피에르 로셰의 소설을 사랑했던 것일까? 로셰가 쓴 단 두 편의 소설을 모두 영화로 만들었던 것에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쥴 앤 짐>과 10년의 간극을 두고 만들어진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세 남녀의 정의하기 힘든 사랑과 헝클어진 관계를 다룬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던 로셰였던 만큼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의 엄청난 대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랑의 고통을 앓아봤던 사람은 영화의 심장부에 성큼 닿아 있을 자신의 뜨거운 손을 느낄 테니….


솔직히 말하자면 십여 년 전에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을 본 뒤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심장이 또 그렇게 뛸까봐 겁나기도 했고, 이 아름다운(트뤼포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한 편이다) 영화를 다시 본다면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기억이 맞는다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기나긴 편지를 읽는 여자의 내레이션이 나왔던 것 같다. 몇 년 뒤 그 배우가 나온 또 다른 삼각관계의 이야기인 <엄마와 창녀>에서 한 여자의 긴 내레이션을 들으며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을 떠올렸고, 잠시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트뤼포의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 장 비고의 <라탈랑트>, 그리고 F.W. 무르나우의 <일출>을 최고의 러브스토리로 꼽고는 한다. 필자에게 있어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그런 영화이고, 장 피에르 레오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는 영화다. 이번에 재회하게 될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십여 년 전의 기억과 영화는 또 얼마나 다를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특히 스크린을 통한 오랜 영화친구 장 피에르 레오와의 만남이 사뭇 기대된다. (이용철 :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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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라, 그를 가볍게 봐선 큰 코 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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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턱 막히게 하는 영화. 아벨 페라라의 <킹 뉴욕>이 그렇다. 영화가 끝나고, 먹먹해진 느낌으로 극장을 배회한다. 아트시네마도 고요하다. 담배 연기만 자욱하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입으로 탄성을 내지르거나, 영화 내용을 구구절절 나열할 때 온 몸을 휘감았던 희열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지인이 아벨 페라라의 영화를 보기 위해 동네 비디오 가게를 뒤지던 90년대를 회상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그 말인즉슨 “당시 우리들에게 아벨 페라라의 영화를 보기 위해 발품을 파는 건 일종의 성지 순례와 같은 것”이었다. 도대체 아벨 페라라는 어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기에 이런 말이 나왔던 걸까? 20살 넘어서 뒤늦게(?) 영화를 보기 시작한 필자에게 아벨 페라라는 이름은 ‘B급 무비를 만드는 감독’ 정도로만 기억되어 있었다. 90년대 비디오 가게를 뒤져가면서 영화를 보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벨 페라라에 열광하는 내 또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벨 페라라를 숭배하고 찬양한다던 선배들의 말에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면서 그의 영화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2008 친구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페라라의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아벨 페라라는 ‘쌈마이 감독.’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서 그의 영화를 몰아 보기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차이나 걸>(1987)을 보고 나서다.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를 차용하여 이태리인들과 차이나타운에 살고 있는 중국인의 폭력적인 관계를 묘사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태리 청년과 중국 처녀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 페라라는 셰익스피어라는 클래식한 세계를 뒷골목 필름 느와르의 세계로 바꿔버렸다. 뭔가 펄프픽션을 보는 느낌이랄까. 두 번째로 보았던 작품은 <피어 시티>(1984). 한 미치광이 소설가가 스트립 댄서만 골라서 연쇄 살인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그는 낮에는 소설을 쓰고, 쌍절권을 돌리면서 무술을 연마한다. 밤이 되면 뒷골목을 전전하며 먹이를 찾는 승냥이 마냥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닌다. 그리고 여자들을 살해한다. 한 밤중에 달빛을 받아 한 줄기 은빛을 내뿜는 면도칼로 여자들의 목을 사정없이 베어버린다. 이 장면들이 굉장히 무서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코믹스럽다. “너무 진지하면 농담 같아 보여”라고 관념적인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여자들을 사냥하는 살인범은 조금 우스워보였다. 쌍절권을 돌리며 자아도취에 빠진 살인범의 모습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생뚱맞아 보였다. <차이나 걸>과 <피어 시티>. 적어도 이 두 작품을 접했을 때 필자는 아벨 페라라를 ‘뒷골목 쌈마이 느와르의 대가’라고 자가 진단했다.


그 이후에 다시 페라라를 접한 것은 <보디 에일리언>(1993)이었는데 이 작품은 약간 의아했다. 돈 시겔의 <신체 강탈자들의 침입>(1956)을 리메이크했다지만 원작에는 못 미치는 미숙한 연출에 약간 실망했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 접한 이탈리아계 이민 2세대인 템피오가 형제들의 파멸을 그린 <퓨너럴>은 아벨 페라라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2005)나 <이스턴 프라미시스>(2007)같은 영화보다 훨씬 앞서서 미국 역사에 흠집을 냈다고 생각했다. 마약하는 장면과 노출이 심한 장면을 과감하게 삭제한 국내 출시용 비디오로 보았던 <블랙아웃>은 앞서 본 아벨 페라라의 영화와는 달랐다. 좀 더 원숙해진 느낌이랄까? 놀라웠던 건, 장면들이 히치콕의 <현기증>과 닮아 있었다는 것. 처음으로 아벨 페라라가 나의 심금을 흔들어 버렸고,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블랙아웃>은 흔들거리는 카메라에서 비디오와 영화라는 매체를 연결해 보려는 감독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는 작품이었다. 이때부터 내게 의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어쩌면 이 감독,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 아닐까?!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된 아벨 페라라의 총 여섯 작품을 보면서, 왜 선배들이 이 영화에 열광했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은 초기작인 <복수의 립스틱>, 90년대 만들어진 <킹 뉴욕>, <악질 경찰>, <퓨너럴>, <블랙아웃>과 2001년 작품인 <‘R-X마스>이다.
아벨 페라라의 영화는 펄프 픽션을 보는 느낌을 준다. 페라라의 영화 속에는 레이몬드 첸들러의 소설 속 남성들처럼 자기주장이 확실하다. 페라라는 뒷골목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사실적인 모습을 부여한다. 페라라의 영화 속 남성들은 부러질망정 휘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예컨대 <악질 경찰>의 하비 케이틀은 메츠와 다저스의 경기에 매번 큰돈을 거는 내기를 하는데 매번 지면서도 다저스에 배팅한다. 그것도 14살 이후부터 총알이 자기를 비켜나갔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영화에서 하비 케이틀은 운명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킹 뉴욕>의 크리스토퍼 워큰은 또 어떤가. 마약과 총 부림으로 아수라장인 뒷골목 세계의 질서를 다 잡으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잡으려는 경찰들에게 맞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다. 절대로 뒷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차갑고, 강직한 그의 모습에서 남성의 로망을 가져봄직하다.


페라라의 남성들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강하고 선이 굵은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속 남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시궁창 같은 뒷골목 세계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한다. 이들은 스스로 회개하고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기어 나오려고 발버둥친다. <악질 경찰>에서 예수를 본 하비 케이틀의 모습은 측은지심을 유발한다. <블랙아웃>에서 지난날의 악몽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이나, <퓨너럴>에서 세 형제가 모두 죽어버리는 비극적 결말, <’R-X 마스>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마약을 판매해야하는 한 가장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악한 자도 회개할 수 있으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페라라의 영화를 보면서는 다른 감독들의 영화와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복수의 립스틱>에서 두 번 강간당한 후 세상을 향해서 복수하는 한 여자의 모습은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에 등장했던 트레비스와 닮아 있다. 페라라의 영화를 보면서 마틴 스콜세지가 그렸던 뉴욕의 모습과 비열한 남성상을 비교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뉴욕 뒷골목의 음산한 분위기와 마약과 살인으로 얼룩진 거리. <악질 경찰>의 하비 케이틀을 통해서는 복수와 증오에 찌든 한 인간의 모습을 처절하게 그린다. 페라라의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처럼 천당과 지옥 사이를 경험하게 해준다. 페라라의 영화 속에서 히치콕의 흔적을 찾는 건 어떨까? <복수의 립스틱>을 보면 <싸이코>에서 사용되었던 하수구에 물이 빠지는 장면이 있다. <블랙 아웃>에서 필자처럼 히치콕의 <현기증>이 떠올랐던 사람이라면 아벨 페라라를 통해서 히치콕의 아우라를 느껴볼 수도 있을 듯하다.


<악질 경찰>에서 하비 케이틀이 3만 달러를 들고 쫓기듯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하비 케이틀은 누군가에 쫓기듯이 계단 구석에 숨어서 벌벌 떤다. 이 장면에서 특이한 점은 그를 쫓는 특정한 시선이 없다는 것이다. 계단 구석에 오롯이 서 있는 하비 케이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손 웰즈의 <심판>에서 아이들의 눈을 피해서 미로 같은 계단을 내려가던 앤터니 퍼킨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 <실물보다 큰>의 계단 장면도 연상된다. 광기로 인해 아들을 죽이려 하는 제임스 메이슨의 모습은 절대적 악의 화신을 상징한다. 계단 아래서 로우 앵글로 촬영된 제임스 메이슨의 모습은 사뭇 인간이 아닌 신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반면 <악질 경찰>의 계단 씬은 부감으로 촬영되었고, 카메라가 절대적인 시선- 즉 신의 시선-이 되고 하비 케이틀은 초라하고 옹색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영화사에 길이 남는 몇몇 계단 장면과 <악질 경찰>의 계단 씬을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 아벨 페라라의 연출력을 확인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벨 페라라, 그를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킹 뉴욕>이 상영되던 날, 극장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필자도 마찬가지. 15초 간격을 두고 뜬금없는 탄성이 삐죽거리며 새어 나왔다. 당시 나는 <킹 뉴욕>을 지배하는 비장한 기운과 크리스토퍼 워큰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압도당해버렸다. 내 호흡은 늑골의 끝에 까지 밀려 내려가 있어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즐거움과 놀라움의 탄성은 늘 한 박자 뒤에 터졌다. 영화가 끝나고, 먹먹해진 느낌으로 극장을 배회한다. <킹 뉴욕>의 상영이 끝난 서울아트시네마는 고요했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입으로 탄성을 내지르거나, 영화 내용을 구구절절 나열할 때 온 몸을 휘감았던 희열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벨 페라라의 영화는 말을 아끼는 대신, 보고 즐기는 것만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아벨 페라라는 90년대 시네필들에 의해서 발견된 영화였다. 그리고 2008년 지금, 서울아트시네마는 재발견과 확인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에 감사한 마음을 시네마테크에 전하며, 아직 페라라의 영화를 체험하지 못한 친구들에게는 ‘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통해서 아벨 페라라의 세계를 탐닉해보길 적극 권한다. (이도훈: 데일리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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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특별전 여는 이두용 감독

부산국제영화제는 해마다 잊힌 한국의 옛 영화인들을 발굴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을 벌여왔다. 김기영, 이만희, 정창화, 김수용 감독, 그리고 배우 김승호 등이 이 회고전을 통해 현재의 관객과 멋진 대화를 나눠왔다. 이두용 감독은 진심으로 여기 추가하고 싶은 이름이다. 1981년 <피막>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화두의 원조쯤 되며(같은 해 임권택 감독이 <만다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 1983년 <물레야 물레야>는 현재 한국 영화인들에게 어떤 상징과 같은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첫 번째 한국영화였다. 1970년대 데뷔 초의 그는 <어느 부부>(1971) 등을 통해 당대의 주류라 할 수 있었던 낡은 멜로드라마의 관습과 싸웠고, <용호대련>(1974)으로 시작된 이른바 태권 액션영화의 놀라운 활력은 홍콩과 일본의 액션영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독창성을 보여줬다. 이후 1980년대에도 한국 영화계에서 ‘임권택-송길한’이라는 감독과 작가의 파트너십에 겨룰 만한 ‘이두용-윤삼육’ 체제를 구축해 장르영화의 작가주의, 어느 한쪽으로 수렴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세계를 보여줬다. 당대 여느 감독들과 비교해도 남다른 편집 리듬의 속도감과 사실성은, 1년에 네댓 편의 영화를 양산하면서도 자신의 일관성과 장인정신을 잃지 않았던 그의 고집을 보여준다. 가장 최근에 만든 영화는 <아리랑>(2002)으로 그는 여전히 차기작을 고심하는 중이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하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오승욱 감독이 추천한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이 상영된다. 개봉 당시 검열로 40여분이 잘려나간 채 동시대인들에게, 그리고 후배 영화인들에게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던 이 영화는 1970년대를 마무리하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성과이자 이른바 ‘한국적 하드보일드’의 걸작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2년 전 영상자료원이 발굴, 복원한 <최후의 증인>을 154분 원본 그대로 상영하는 것은 물론, 특별전 형식으로 그의 다른 작품들인 <피막>(1980), <물레야 물레야>(1983), <뽕>(1985), <내시>(1986)를 소개한다.

-<최후의 증인>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도 예산문제도 그렇고 남다른 야심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내게는 굉장히 특별한 영화다. 1978년에 촬영을 시작해서 무려 1년 동안 찍은 영화다. 6·25 영화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다가 김성종 작가의 <최후의 증인>이 눈에 들어왔고 영화를 완성했다. 이제 정말 내 모든 걸 담아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컸다. 그렇게 거대 권력 속에서 이름없이 사라져간 민초들을 그리고 싶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한 사람을 형무소에 넣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법집행관이 아무렇지도 않게 비리를 저지르고 그런 치부를 다 드러내서 시대를 폭로하고 싶었다. 그렇게 6·25 역시 중요한 배경으로 쓰이긴 하지만 단순한 전투영화가 아니라 심층적인 드라마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무지하지만 착한 사람들이 권력에 마모되고 상처받는 그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몹시 착해서 남 뺨 한번 때리지 못하고 살아온 황바우(최불암)와 지혜(정윤희) 같은 사람을 통해 척박한 시대의 풍경 속에서 진짜 아름다운 건 무엇인지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후의 증인>은 검열에 걸려 무자비하게 삭제당하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당시 1979년도 대종상 작품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였는데, 경쟁자 중 누군가가 청와대에 감독의 사상이 이상하다고 투고를 했다. 나를 빨갱이로 몰고 인민군을 미화한 거 아니냐고 공격한 거지. 그래서 검찰청에 불려갔다. 그 소문이 나서 제작자가 서둘러 다 자르고 나는 검찰청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최후의 증인>에서 황바우 구명운동을 하는 아내 지혜를 검사가 속여 겁탈 비슷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그보다 몇년 전 내 영화인 <경찰관>(1978)에서는 파출소장의 아들이 검사의 딸과 연인 사이인데, 검사 집에서 반대해서 파혼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 장면들을 두고 “검사한테 무슨 원한 있냐?”라는 말까지 들었다. 거의 24시간 넘게 꼬박 잠도 못 자고 조사당하고 풀려나는데 기분이 정말 안 좋고 답답했다. 원작과 큰 차이는 없어서 그나마 괜찮았다. 나더러 사상이 이상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거 원작에 다 있는 거”라고 따졌던 거지. 그렇게 사람들이 무지몽매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극장개봉을 해서 가보니, 1차 편집으로 2시간53분 정도로 만든 영화를 1시간20분짜리로 만든 것 아닌가. 정말 내가 영화를 왜 하나, 하는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젊을 때라 더 울분이 컸고 그냥 영화계를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밀고 탓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니까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다음엔 이데올로기에 대한 간섭이 좀 덜한, 편한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에 <최후의 증인>을 함께한 윤삼육 작가와 상의해서 <피막>을 한달 만에 만들었다.

-편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피막> 역시 여느 사극과 다른 독특한 미스테리 구조를 보여준다.
=이후에도 사극은 많이 만들었지만 옛날 얘기를 그냥 재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윤삼육 작가하고도 뭔가 미스테리컬한 문법을 시도해보자고 했고, 어렵지 않게 소재 택해서 시작한 작품이 <피막>이다. 내가 지금껏 60편 넘게 영화를 만들었는데 정말 말 그대로 검열 걱정 없이 가장 편하게 만든 작품이다. 안동 하회마을에 오픈세트를 지어놓고 자연광은 물론 새벽안개도 담았고, 저녁에는 칠 줄 모르는 고스톱도 치면서(웃음) 여유를 즐겼다. 총 28일 촬영했는데 이전과 달리 다른 스탭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경직되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만든 영화가 해외영화제에 초청되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윤삼육 작가와는 <피막> 외에도 <뽕> <내시> <업> 등 중요한 사극들을 함께했는데 <물레야 물레야>는 임충 작가의 시나리오다. 어떤 차이일까?
=<물레야 물레야>는 다른 작품과 달리 한림영화사에서 가지고 있던 각본으로 먼저 연출 의뢰가 온 작품이다. 그래서 계속 의견을 주고받으며 파트너를 이뤘던 작가는 윤삼육 작가가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날렵하고 샤프한 맛은 없어도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고 글에서 흙 냄새가 났다. 메주덩이처럼 끈덕지고 느려서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가 촌스럽게 짝이 없는데 그게 이상한 힘이 있었다. 필력을 자랑하려고 날씬하게 쓰는 게 아니라 그런 진득한 냄새를 풍겨서 좋아했다. <물레야 물레야>는 각본은 좋았는데 3가지 에피소드의 옴니버스영화였고 어딘지 <전설 따라 3천리> 같은 느낌이 풍겼다. 그래서 당시 김갑의 기획실장에게 굳이 3개의 이야기로 나눠 카메라로 옮기는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얘기하고 거절했다. 어떡하면 좋겠냐고 묻기에 한 이틀만 시간을 달라고 했고, 3개의 이야기를 묶어 봉건시대 속의 한 여자의 기구한 팔자 이야기로 풀고자 했다. 아무래도 <피막> 이후의 작품이다 보니 좀더 신경을 썼던 것 같고, 한국적 ‘한’과 문화의 정서를 짙게 드러내고 싶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한 우회로로 택한 사극 장르에 이후에는 본인이 더 빠져든 것 같아 보인다.
=사실은 <피막> 전에 <초분>(1977)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멜로드라마를 하다가 액션영화로 넘어갔는데 그것 역시도 검열문제로 고생했고, 심지어 ‘으악새 영화’라는 천대를 받다보니 액션에서 손 떼고 어쩌면 <최후의 증인>보다 앞서서 정말 제대로 된 영화를 해보자고 마음먹은 작품이다.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식이기도 했지만 본래 사극이라기보다 우리 근대사에 관심이 많았다. <초분>에서 보여준 샤머니즘과 미스테리의 조합, 우리 민속과 토속에 대한 관심이 <피막>에 반영됐다고 보면 된다. <초분>은 마을 박수무당이 혹세무민해서 땅을 팔게 하는데 그게 아파트 단지를 만들기 위한 뒷거래와 연결된다. 그렇게 그냥 과거 얘기로만 한정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피막>이 처음 나왔을 때도 어떤 비평가가 “무슨 사극이 저러냐”고 비판한 적도 있다. (웃음) <피막> 전에 만든 <물도리동>(1979) 역시도 그런 스타일의 연장이었다.

-<뽕>도 어두운 원작과 달리 이두용식 변형과 윤삼육의 해학이 돋보이는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에로영화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사실 원작을 보면 영화 할 맛이 안 난다. (웃음) 어둡고 칙칙하고 척박한 땅에서 사는 모습이 돼지우리 같기도 하고. 아마 시대적 영향이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아무래도 그런 점들이 나하고 잘 맞지 않았다. 일제 압제하의 모습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싫었다. <뽕> 역시도 윤삼육 작가가 구름에 달 흘러가듯이 잘 썼다. 무엇보다 해학적이고 풍류도 담으면서 요절복통하게 그려내자고 했다. 그런데 당시 그런 비슷한 제목의 에로영화들이 많다보니. (웃음)

-무엇보다 <뽕>은 당시 여느 사극과 비교해도 남다른 로케이션 촬영을 보여줬다.
=맞다. 한참 헌팅을 다니다 보쌈마을이라는 그 마을을 찾는 순간 ‘이 영화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용인 민속촌 말고는 딱히 선택할 여지가 없었는데, 거기는 전봇대도 있고 가옥 구조도 축소형이라 전체적인 배경으로 쓰기에는 좋아도 그 안에서 직접 촬영하기에는 좋지 않았다. 나는 한정된 공간에 스탭과 배우들을 몰아넣고 찍는 걸 즐겨서 그런 방식이 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경남 합천 어딘가에 20, 30호 정도가 거주하는 그런 좋은 마을이 있다고 해서 찾으러 갔다. 그런데 비가 억수같이 오고 차가 개울에 빠져서 차 건지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면서 나는 슬슬 산쪽으로 올라가봤는데 언덕에 딱 올라서니까 정말 무슨 솔로몬의 보물을 찾은 것 같은 마을이 있었다. 차 끄집어내던 스탭들도 일을 멈추고 보더니 다 입을 쩍 벌릴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원래 세트 촬영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집수리하고 전봇대 뽑고 해서 촬영을 시작했다. 이후 영화가 개봉하고 그곳이 유명해지면서 언론사나 방송사에서 취재를 많이 갔다.

-<내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인데 아무래도 궁을 배경으로 하니까 변형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신상옥 감독의 이전 작품 <내시>(1968)도 신경이 쓰였을 것 같고.
=사실 신상옥의 감독의 작품은 못 봤다. 선입견을 가질 것 같아 일부러 안 봤는데 그 극단적인 소재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내시>는 내 영화사인 두성영화의 창립작이기도 해서 더욱 본격적인 내 이야기를 펼쳐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남자가 살기 위해서 거세한다는 게 굉장히 강한 인상을 줬다. 궁에서의 출세가 문제가 아니고, 몹시 가난하니까 어려서 살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의 얘기가 너무 처절했다. 또 그들의 일이란 게 왕의 여자의 정조를 지키는 일인데, 아랫도리가 없는 사람들이 아랫도리를 지키는 일을 한다는 게 정말 아이러니하고 기막히는 일이다. 그만한 희비극적 소재가 없었다. 당시 홍보비까지 포함해서 5억원 정도를 썼는데 당시로서는 거의 최대 규모였다. 안성기가 가진 순박함이 영화에 잘 담겼고, 많은 사람들은 건장하고 당당한 미남자인 남궁원을 내시로 쓴 것을 많이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준비하면서 실제 조선시대 내시를 만나기도 했는데 거세하면 오히려 키가 커지고 체격이 커진다고 했다. 드라마를 보면 내시가 왜소하고 앵앵거리는 사람들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거다.

-지난 2005년에는 오히려 국내가 아닌 프랑스 브졸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열기도 했는데, 후배들의 추천으로 국내에서도 이런 재평가 작업이 시작돼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최후의 증인>은 2년 전 영상자료원의 발굴로 보게 된 건데, 말하자면 이제야 내 영화를 원본 그대로 스크린에서 보게 된 거다. 그런 현실이 슬프긴 하지만 <최후의 증인>을 중심으로 후배 감독들이 인정해준다는 사실이 기쁘다. 요즘 한국 영화계 상황이 좋지 않다고들 하는데도 이런 의미있는 일을 해준다는 생각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게다가 영화감독들이 영화 만드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이런 행사까지 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숙연해지기도 하면서 앞으로도 좋은 작품들을 계속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글 : 주성철   사진 : 오계옥 | 200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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