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2017 Cinematheque Friends Film Festival
1월 19일(목)부터 2월 22일(수)

▣ 201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의 선정작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감독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 (더글라스 서크, 1955)
<보스턴 교살자> (리처드 플레이셔, 1968)
<케이블 호그의 노래> (샘 페킨파, 1970)
<무슈 클라인>(조셉 로지, 1976)
<우주 전쟁>(스티븐 스필버그, 2005)
•김우형 촬영감독 <죠스> (스티븐 스필버그, 1975)
•김의성 배우&최동훈 영화감독 <케이프 피어>(J. 리 톰슨, 1962)
•김주혁 배우 <21그램>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2003)
•박홍열 촬영감독 <아름다운 5월> (크리스 마르케, 1963)
•서동진 교수 <향기 어린 악몽> (키들랏 타히믹, 1977)
•윤가은 영화감독 <매그놀리아> (폴 토마스 앤더슨, 1999)
•윤여정 배우 <커다란 희망> (마이크 리, 1988)
•이경미 영화감독 <쳐다보지 마라> (니콜라스 뢰그, 1973)
•이용관 영화평론가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아네스 바르다, 2000)
•이영진 배우 <12명의 성난 사람들> (시드니 루멧, 1957)
•임흥순 영화감독 <산쇼다유> (미조구치 겐지, 1954)
•조성희 영화감독 <특전 U보트> (볼프강 페터슨, 1981)

▣ 개막식
일시│1월 19일(목) 오후 7시
개막작│<쇼 피플>(킹 비더) 연주상영
연주자 │강현주 피아니스트
사회│권해효 배우

▣ 시네토크
1월 21일(토) 오후 3시 40분 <플레이타임>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1월 22일(일) 오후 5시 30분 <매그놀리아> 상영 후 윤가은 감독 with 이화정 기자
2월 4일(토) 오후 3시 30분 <케이프 피어> 상영 후 김의성 배우, 최동훈 감독
2월 4일(토) 오후 7시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상영 후 이용관 영화평론가
2월 5일(일) 오후 3시 30분 <쳐다보지 마라> 상영 후 이경미 감독 with 이해영 감독
2월 5일(일) 오후 7시 <향기 어린 악몽> 상영 후 서동진 교수
2월 10일(금) 오후 7시 <커다란 희망> 상영 후 윤여정 배우 with 이재용 감독
2월 11일(토) 오후 2시 <산쇼다유> 상영 후 임흥순 감독
2월 11일(토) 오후 6시 <아름다운 5월> 상영 후 박홍열 촬영감독
2월 12일(일) 오후 3시 10분 <죠스> 상영 후 김우형 촬영감독 with 주성철『씨네21』 편집장
2월 12일(일) 오후 7시 <12명의 성난 사람들> 상영 후 이영진 배우 with 이화정 기자
2월 18일(토) 오후 7시 <피로> 상영 후 김동명 감독 with 관객에디터
2월 19일(일) 오후 5시 <특전 U보트> 상영 후 조성희 감독 with 이용철 영화평론가

▣ 구로사와 기요시 마스터 클래스
일시 │ 2월 20일(월) 오후 6시 40분 <보스턴 교살자> 상영 후
참석 │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봉준호 감독
진행 │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일시 │ 2월 21일(화) 오후 6시 40분 <크리피> 상영 후
참석 │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정지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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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랩스틱 개그의 쿨한 매력 - 버스터 키튼 회고전*

 

 

 

 

68혁명 당시의 파리를 배경으로 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2003)의 한 장면에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돌아다니며 영화에 몰두한 두 명의 청년 매튜(마이클 피트)와 테오(루이 가렐)는 무성영화의 전설적인 코미디 배우에 대해 설전을 벌인다. 테오는 찰리 채플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코미디 감독이라며 <시티 라이트>에서 채플린과 눈먼 소녀가 나중에 다시 만나는 장면을 예로 들고 있다. 매튜는 채플린을 깍아내린다. 그는 위대한 배우였을 뿐이라고. 키튼이야말로 20년대의 고다르이자 위대한 작가였다고 그는 말한다. 매튜는 키튼의 <카메라 맨>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채플린과 키튼, 이들 중 누가 더 위대한 무성 코미디 감독이었는가를 묻는 질문은 아마도 20년대 할리우드에서 익살희극이 등장한 이래 되풀이되어온 논쟁일 것이다. 일견 무의미해보이기도 하지만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 켈리에 대해 벌이는 논쟁만큼이나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는 채플린과 키튼의 차이는 앤드루 새리스에 따르자면 시와 산문, 평민과 귀족, 탈구와 적응, 사물의 의미와 기능, 천사로서의 인간과 기계로서의 인간, 이데아로서의 소녀와 관습으로서의 소녀, 슬랩스틱의 원심성과 구심성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에는 보다 영화적인 문제가 있다.

버스터 키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프리츠 랑, 또는 장 뤽 고다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20세기의 영화, 특히 세기 초의 영화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영화가 모던한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키튼은 영화가 탄생한 1895년에 태어났다. 그는 1920년대에 서커스와 마임에 기원한 무성영화의 근본적인 장르인 익살희극(뷔를레스크)의 창시자로 전성기를 구가했고, 유성영화가 도래하던 20년대 후반에 서서히 영화계에서 사라져, 30년대 이후에는 완전히 망각된 존재가 되었다. 그는 1933년 이후에 대략 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대중들의 기억에 남는 영화는 고작 <선 셋 대로>나 <라임 라이트> 정도였을 뿐이다. 이들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미미한 조연에 불과했다. 하지만 버스터 키튼은 6-70년대에 새롭게 조명을 받았고, 영화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던 1995년(마찬가지로 키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던 해)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할리우드의 이방인이었지만 방랑자 ‘찰리’의 캐릭터를 통해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채플린이 냉전의 시기에 할리우드에서 추방되면서 상징적인 인물로 남은 것과 달리 키튼은 할리우드의 시스템의 화려한 조명 아래 그림자속으로 조금씩 느리게 일식되어버렸다. 이는 키튼의 불가피한 운명이었을 런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모던한 세계를 떠나 자유롭게 방랑할 수 있던 찰리와 달리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을 일찌감치 습득했던 키튼은 자신의 몸을 모던한 세계의 기계화된 리듬에 최대한 적응시키려했고, 그 비인격적인 시스템에서 자신의 안정적인 위치를 발견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벌였다. 키튼의 영화속 캐릭터는 그의 화신과도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
성룡을 능가하는 버스터 키튼의 놀라운 기예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습득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생후 6개월 되던 해에 계단에서 굴렀지만 멀쩡했고(이 황당한 꼬마아이를 본 탈출묘기의 고수였던 후디니는 ‘이런, 무척 튼튼한 아이구만buster!’이라 감탄했고 이 때문에 키튼은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3살 때에는 회오리에 휘말려 거리까지 날아갔지만 상채기 하나 없었다고 한다. 하여 키튼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다섯 살때부터 보드빌 쇼의 일원으로 활약을 하게 되었다. 거친 세계에서 일하면서 키튼은 심각한 표정을 유지할수록 웃음을 촉발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어떤 고난에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육체적 고통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넘어져도 일어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럴 때까지 기다리며 결코 울지 않으며 미소 지으려 하지도 않는 것.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무표정한 얼굴 great stone face'은 이런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는 철저하게 환경에 적응하면서 완전한 육체적 추상을 통한 우아한 몸놀림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하려 했다.

키튼의 무표정과 날렵한 몸놀림을 통한 개그는 기계적인 성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베르그송은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기계적인 배열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행동과 사건의 배치는 모두 희극적’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키튼의 개그에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채플린과 키튼은 1920년대 무성영화를 대표하는 두 명의 희극 배우였지만 웃음을 제조하는 방식에서 서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채플린의 웃음은 늘 얼굴과 함께하며 표정을 통해 감정을 포현해냈다. 얼굴이 신체의 가장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채플린의 마임에 근거한 다양한 얼굴표현은 보다 정신적인 천상의 웃음을 만들어냈다. 반면 키튼은 얼굴의 표정을 지워버리면서 마치 거대한 도박장과도 같은 비인격적인 세계 안에서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부지런한 발을 움직이며 아크로바틱 액션개그를 선보였다. 키튼의 재빠른 발은 채플린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지상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천상의 즐거움과 다른 지상의 수고스러움과 고난을 담아내고 있다. 키튼 영화의 묘미는 이런 발 빠른 액션과 상상을 불허하는 스턴트 묘기에 있다. <스팀보트 빌 주니어>에서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 돌연히 집이 무너지는 순간 키튼이 창으로 무사히 빠져나오는 장면(키튼은 이 장면에서 대역을 쓰지 않았기에 몇 번의 NG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놓일뻔 했다고 한다), <제너럴>에서의 기차위에서 벌어지는 추격 장면, <항해자>에서 문어와 벌이는 수중 액션, <손님 접대법>에서 폭포에서 벌어지는 구조작업 등, 키튼의 액션은 당시의 어떤 영화도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톰 거닝이 지적하듯이 키튼은 자신의 영화에서 늘 비합리적인 원칙에 근거한 합리화된 시스템(이는 20년대 미국의 지배적인 생산구조인 테일러주의 또는 포드주의와 등치되는 것이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을 묘사한다. 채플린이 산업적인 생산시스템에 대해 체계적으로 기계파괴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키튼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인물을 통해 역설적으로 시스템의 부조리성을 폭로한다. 이 차이는 채플린과 키튼이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가령 채플린의 희극에서 사물, 기계와 싸우는 찰리는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가아니라 사물, 기계의 악마성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서투른 투쟁을 벌인다. 최종적으로 사물과 기계는 찰리에게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물화되지 않은 찰리의 ‘휴머니티’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찰리가 기계를 다루고 통제하는데 서투른 것은 그가 기계의 단조로운 리듬과 다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튼의 경우에 사정은 달라진다.

 

기계 개그
채플린이 인간과 기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한 반면 키튼은 기계를 인간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키튼의 캐릭터는 대규모의 산업기계와 직면해 그것에 순응하면서 서로 대화하고, 결국은 그것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지배와 통제를 위해서는 기계와 사물에 순응해야 하며, 또한 기계와 사물을 몸의 연장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럴 때 사물과 기계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 키튼의 몸에 반응한다. 예를 들어 <제너럴>(1926)에서 기관사인 키튼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애인을 납치한 북군병사들을 쫓아 기관차 ‘제너럴’을 몰고 추격전을 벌인다. 키튼은 기관차에 탑재된 대포에 불을 붙여 전방의 기관차를 겨냥하는데 이 순간 대포의 포신이 갑자기 주저앉아 오히려 키튼의 기차를 겨냥한다. 위험에 빠진 키튼. 당황한 키튼은 기차의 운전좌석으로 대피하지만 포탄은 이제 막 발사될 직전이다. 이 순간 기관차는 커브에 접어들고, 수평으로 발사된 포탄은 정확하게 직선으로 날아가 북군병사가 탄 기관차에 명중한다. 대포는 키튼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에서 키튼의 의도를 따라온 것이다. 기계를 통제하려는 키튼의 몸, 자율적인 대포기계, 이탈하는 선로와 포탄의 궤도. 이렇게 웃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키튼의 영화에서 사랑과 결혼 또한 이와 유사한 패턴을 반복한다. 영화 속에서 키튼은 매번 채플린과 마찬가지로 한 여인을 사랑하지만 그녀와의 연애의 성공은 늘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갑작스레 다가오고, 둘의 사랑은 매번 결혼식이란 최종적인 절차를 요구받는다. <스팀보트 빌 주니어>에서 갑작스런 태풍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지만 키튼은 아버지, 연인을 차례로 구한 뒤에 급기야 조난중인 목사를 물에서 구조해 결혼식을 치른다. 이는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라 순종적인 사랑에 다름 아니다. (키튼의 영화에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슬픔의 시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령 <전문학교>와 <셜록 주니어>의 마지막 장면의 결혼식은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방식의 결과로 얻게 된 이런 행운(혹은 불운?)은 키튼의 영화에서 웃음(또는 적지 않은 슬픔을 간직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양가성이야말로 키튼 영화가 지닌 독특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키튼 영화의 희극성은 따라서 배우가 자빠지고 넘어져서 웃음을 유발하는 퍼포먼스에 머물지 않는다. 물리학의 법칙에 의거해 고도로 연출된 장면의 효과로 인한 웃음, 이것이야 말로 키튼 영화의 묘미에 가깝다. 키튼을 위대한 ‘작가’로 채플린을 위대한 ‘배우’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채플린에게 카메라는 사실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단지 배우인 채플린과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을 중계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키튼의 경우 카메라는 사뭇 다르다. 키튼에게 카메라는 액션과 관련되어 있고,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키튼의 영화에서 카메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화의 세부적인 디테일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키튼의 영화에서 마찬가지로 정말로 잊기 힘든 것은 그의 몸과 액션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속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환경들, 사물들, 그것의 운동들이다. <항해자>(1924)와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의 거대한 증기선, <제너럴>과 <손님 접대법>(1923)의 기차, <셜록 주니어>(1924)의 영화관이 이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기계와 키튼이 맺는 관계는 하지만 대단히 양가적인데, 이는 그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물과 기계의 시스템에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하면서 키튼이 자신이 거주할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던한 세계의 기계문명 앞에서 무력한 아이와도 같은 위치에 서 있었고, 동시에 수학과 물리학에 능통한 숙달된 운동선수처럼 세계의 무질서에 맞서 몸의 개그를 보여주었다. 키튼의 기계-개그는 그리하여 살바도르 달리와 루이스 부뉴엘과 같은 2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소비에트의 형식주의자들과 미래파들을 열광시켰으며 영화의 미장센에 주목한 누벨바그리언들을 매료시켰다. 

 

 

 

 

이렇게 되리라곤...
키튼은 화려한 20년대를 마감하면서 1928년 MGM으로 옮겼고, 여기서 <카메라 맨>(1928)이란 각별한 작품을 남겼지만 유성영화의 도래와 더불어 퇴락을 겪게 된다. ‘MGM으로 이적한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술회하듯이 키튼은 할리우드 시스템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1933년에는 급기야 알콜중독자란 표면상의 이유로 MGM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이후 키튼은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는 6-70년대에야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한데, 1940년대의 후반부터 50년대에 걸쳐 할리우드에서 발생한 촬영소 시스템, 호화찬란한 할리우드 시스템의 붕괴를 겪고 나서 키튼이 다시 영화사안에 복권되었기 때문이다. 키튼의 영화와 삶은 그리하여 20세기의 모던한 세계, 그 역사와 맥을 같이한 할리우드 시스템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키튼은 모던한 세계에서 인간이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기 위해 시스템에 순응해야 하며 그것에 맞춰 신체를 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키튼의 이러한 페시미즘은 <라임 라이트>(1953)에서 관객들의 썰렁한 반응을 지켜보는 초라한 배우가 된 그가 ‘우리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라고 비탄에 젖어 이야기할 때 극에 달한다. 그럼에도 그의 ‘쿨’한 액션개그가 지닌 매력은 슬픔을 넘어설 만큼 기쁨을 주고 있다.
김성욱(영화평론가)

 

* 예전 2004년 처음으로 '버스터 키튼 회고전'을 개최할 때, 이제는 사라진 '필름 2.0'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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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이 '로메르 카페'라 부르는 인사동의 작은 카페에서 얼마전에 인터뷰를 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는데, 사실 질문에 나선 이에게 나 또한 어떤 질문들을 던져보고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약간의 오해가 있을 듯도 해서 [편집자 주]의 일부 내용을 수정했다. 시가 시네마테크에의 지원 계획을 철회했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다. 시는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계획이 아직 없었다. 정책 우선순위와 예산 부족이 이유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네마테크“

- 대담: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 김경민(서울아트시네마 관객)  

 

[편집자 주] <ACT!> 기획대담이 일곱 번째를 맞습니다. 이번 주제는 시네마테크입니다. 사실 서울아트시네마는 설립초기부터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과 운영진의 열정만으로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번 서울시의 결정에 대한 소회와 함께 그 동안의 운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네마테크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듣기 위해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를 만났습니다. 함께 대담을 진행한 김경민씨는 서울아트시네마의 열렬한 관객이자 영화를 공부하는 영화학도입니다. 부디 이번 대담을 통해 우리에게 시네마테크는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보고 시네마테크를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작은 단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크게는 정부/서울시에 대한 지원 요구의 역사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기대했던 것처럼) 또 다른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차마 묻지는 못했지만 아주 커다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기도 했다. 예컨대 영화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시네마테크란 과연 무엇일까, 같은 질문들 말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보니, 우리의 안내자들은(김성욱 프로그래머의 표현을 빌려왔다) 저 질문에 대해 충분히 고민했고 나름의 답까지 만들어가고 계신 듯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민은 이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을까?



김경민: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신데,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하다.

김성욱: 1993년도에 문화학교 서울을 처음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갔었다. 그 때 마침 연구팀을 모집하고 있어서 조영각씨와 영화보고 세미나를 하는 연구팀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문화학교서울은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영화의 비디오에 자막을 넣어 상영하는 비디오테크였는데, 지금 미디액트를 하는 이주훈, 서독제의 조영각, 인디스토리의 대표 곽용수 씨, 그리고 지금 평론활동을 하는 김형석 씨 등이 운영위원을 하고 있었다. 당시 20대 중후반의 나이였을 때인데, 이들은 열정을 지닌 선구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비디오테크를 했기에 나도 거기서 영화를 볼 수 있었으니 내게 그들은 안내자였던 것이다. 점차 이런 프로그램을 극장에서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극장에서 필름으로 트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마침 1995년이 지나가면서 국제영화제도 만들어지고 필름으로 부산, 전주 등에서 영화 상영을 하면서, 더불어 자막을 투사하는 방식도 가능해졌다. 필름으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문화학교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필름 상영을 극장에서 시작한 것이 1999년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문화학교 서울에서 연구 소장을 했다. 연구소 이름이 소니마쥬 Son-Image였다. 그때 고다르의 영화를 좋아했었으니. 1999년에는 영화신문 ‘Fantome’을 발행하기도 했다. 우리가 유령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2000년도 들어서는 필름으로 작가들의 회고전을 개최했다. 루이스 부뉴엘, 에릭 로메르, 스즈키 세이준, 파솔리니 회고전 등을 당시 아트선재 지하 극장을 빌려 상영했다. 2002년 즈음 서울에서 필름 영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트선재센터 정도였기에, 이 공간을 거점으로 해서 일 년에 몇 차례 영화제를 했던 것을 1년 내내 상설적으로 하게 된 것이 20025월에 정식으로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했을 때부터이다. 시네마테크를 하게 된 계기는 특별하다기보다는 비디오테크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의 영화일은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의아한 것은 이전 세대는 왜 시네마테크를 할 생각이 없었을까, 이다. 시네필에 대한 말들이 있는데, 영화보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다, 라는 생각들. 그런데 이걸 단계론적으로 말하곤 하는데, 나는 이 말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트뤼포나 고다르의 말도 영화 보는 것과 만드는 것, 글을 쓰는 것이 사실 다 동일하다는 의미라 생각한다. 이걸 단계나, 수준의 문제로 말하는 이들을 나는 의심한다. 물론, 나는 영화 창작자, 예술가들을 어쩌면 관객보다 더 존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존중을 위해서라도 영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시네마테크에 대한 시도를 전 세대가 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물리적으로 시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라(우리도 하지 않았나?), 그걸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 세대에서 유일하게 그걸 하려했던 이는 예전 필름 포럼을 하던 임재철 씨이다. 그 외의 분들은 소망을 내비쳤던 이들은 있었지만 실행은 하지 않았다.

 

김경민: 관객으로 문화학교 서울을 다닐 때는 학생이었나?

김성욱: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영화는 공부이외에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취미생활이었다. 생각해보면 사회과학에서 인문학으로, 그리고 예술이나 영화로 이끌렸다고 생각한다. 문화학교 서울이 내가 살던 사당동에 있었던 것도 한 몫 했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워서 영화보고 사람들이랑 술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멀었다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90년대 초에 영화에 전보다 더 빠져들었던 것은 그것이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집단이니 조직이니 이런 곳에서 일탈하고 싶었다. 80년대를 거친 이들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랄까. 그런데 도리어 문화학교서울에서 공동성의 경험을 했던 것 같다. 공동체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에서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곳에 모여들었던 것 같다. 새로운 방식의 관계성이 있었다. 집단적인 목표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로 같이 묶여있었다. 처음에는 찾아볼 수 있는 영화 자료들을 다 읽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한국어로 볼 수 있는 영화 자료들, 책은 제한적이었다. 영화 책이나 자료를 보기 위해 남산에 있는 영진위 자료실, 국립중앙도서관에도 갔었고, 한양대 도서관이나 서강대 도서관도 돌아다녔다. 비디오는 몇 년 보다 보면 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외국 방송에서 보거나 위성방송, 특히 일본의 BS2가 그야말로 영화 천국이었다. 틀어주는 영화를 매일 녹화하고, 모든 가능한 방식을 다 동원해 영화를 봤던 거다. 영화를 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뒤의 일이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김경민: 2002년에 시네마테크 협의회가 나오고 같은 해에 소격동에서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 했다. 당시의 영화계 분위기나 상황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성욱: 그 당시에는 고전영화나 예술영화를 보는 것이 교양쯤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90년대부터 그런 기운이 있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끝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독립영화전용관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같은 해에는 미디액트도 개관했다. 90년대 비디오테크 세대들이 꿈꿨던 것들이 대중적으로 구체화되는 시대였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이미 시네마테크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새로운 공간마련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필름의 점차적인 소멸화와 디지털과 뉴미디어의 도래에 따른 극장관람 환경, 시네필 문화의 변화들을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는 세기말에 시작해, 21세기에 들어서야 정식으로 시네마테크를 시작했다. 새로운 물결이었지만 뒤늦게 도착했기에 사실 처음부터 시대의 변화들과 마주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김경민: 그러면 협의회가 출범하고 극장이 개관했을 때 정부의 지원은 없었나?

김성욱: 초기에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해서 극장 임대료를 지원받았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비용이 발생하는데, 예컨대 상영료(저작권료), 자막비용 등이 들어간다. 상영료는 영화의 저작권과 관련되는데, 이것이 21세기에 시네마테크를 시작하면서 부딪힌 꽤 큰 문제이다. 말하자면, 디지털화의 진행에 따라 도리어 저작권 관리 강화에 의해 상영의 난점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영화를 소유의 관념에서 해방하는 곳이다. 영화가 예술이라면 그것은 문학이나 미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보여져야만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영화의 상영을 제한하는 저작권(소유권)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영화의 상품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영화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저작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CJ가 저작권을 갖는 한국영화들도 상영하곤 하는데, 이런 영화들에 대해서도 가격을 지불하고 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메이저 영화사들이나 과거의 영화사들은 자사 영화의 상품적 가치를 지키는 저작권을 강경하게 유지하는 반면 그것의 공유권에는 관심이 덜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쁜 결과들이 초래된다. 비싼 저작권 때문에 상영이 어렵다. 가령, 이만희 감독의 영화를 틀기가 어렵다. 영화의 공공권, 즉 관객들의 영화에의 자유로운 접근을 위해서는 지원이 불가피하다.

 

김경민: 소격동에서 현재의 낙원상가로 극장이 이전할 때 극장 재계약 문제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나?

김성욱: 지하극장의 보수를 위해서 2005년부터는 임대를 할 수 없다는 통보가 있었다. 계약을 할 수 없게 되니까 이전이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개보수를 안 한 것 같다.(웃음) 그 이후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시네마테크의 극장도 영화만큼이나 역사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스크린과 공간을 거쳐간 영화의 흔적이란 게 있다. 시네마테크가 오래된 극장인데, 여기서 하다가 다른 데서 몇 년하고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그 극장에 가보지는 않았다. 여전히 계단이나 출입구 모양이 비슷한 걸 보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지만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파스빈더의 회고전을 했었고, 차이 밍량의 <안녕, 용문객잔>을 소격동 시절의 마지막 상영으로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안녕, 용문객잔>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영화로 남았다. 차이밍량은 영화관의 오래된 의자가 할머니와 자신의 정서적 유대의 끈이라 말했는데, 우리는 그런 유대의 끈을 당시에 잃어버렸다. 큰 손실이었다.


김경민: 재개관 후 2006년에 <친구들 영화제>가 시작됐는데, 당시 다양성 영화 복합 상영관이 추진되다가 무산이 되었다. 2006년의 시네마테크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을 것 같다.

김성욱: 당시 재개약을 못하면서 옮길 상영관을 바로 찾지는 못했다. 그 때 한국 시네마테크협의회의 이름으로 처음 성명을 냈다. 지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당시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하면서 극장을 자주 왔던 감독들이 있었다. 관객처럼 영화를 보러 왔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사태에 관심을 보였고, 2005년 초에 현재 낙원상가로 공간을 옮기면서 이들과 몇 가지 고민들을 공유했다. 첫째, 시네마테크의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둘째가 지원에 대한 거다. 정상적으로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극장에 자주 오던 영화감독들과 시네마테크를 홍보도 하고 전용관 마련에 대한 요구를 하는 영화제를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니 영화제 제목은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라고 명명했다. 20061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렸다. 그 해에 시네바캉스라는 행사도 여름에 시작했다. 서울 시민들과 함께 다양한 고전영화를 보기 위해 시작했다. 2007년에 영화진흥위원회에서도 전용관 논의가 시작되고 복합관을 만들자는 논의가 진행됐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영진위 위원장이 바뀌며 예산이 사라지게 되었다. 논의의 주체로 시네마테크가 있었다면 아마도 진행이 빨랐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때에 우리는 주체가 아니었다. 논의 테이블에 들어간 적도 없다. 그 이후에는 전용관에 대한 논의가 실종되었다. 당시 시가 시민들을 위한 영화공간으로서 시네마테크를 지원하고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는데 나설 수 있는지에 대해 요청이 있었는데, 공식적인 화답은 작년에야 있었다



▲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성욱 프로그래머



김경민: 시네마테크라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 공공성을 가지는 것이고, 왜 정부의 지원을 필요로하는지의 근거를 만들어야할 것 같다. 그런 식으로 근거를 만들어가야 지속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무비콜라주가 다양성영화지원을 받는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시네마테크가 다양성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라고 하면, 그런 곳들과의 차별성이 사라질 것이고 한편으로 영상자료원과는 어떤 차별점이 있을지. 이 사이에서 시네마테크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김성욱: 2012년의 개관의 시점에서 보자면 그 때 영상자료원은 시네마테크의 기능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고, 예술영화관이 몇 곳 있었지만 시네마테크와는 성격이 달랐다. 시네마테크에의 지원은 영화의 역사에서 이미 오래된 근거를 갖고 있다. 그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대한 지원만큼이나 근거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반대로 다양성영화관 지원이라는 명목의 지원근거가 더 불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이라는 표현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백화점이 동네 슈퍼보다 사실 물건이 더 다양하지 않나? 예술영화관에 대한 지원, 그것도 대기업의 지배력 안에서 민간이 운영하는 극장에 대한 지원은 타당하다. 시네마테크는 말하자면 비영리 법인에 의한 공공상영관이다. 국가의 공적 공간과 시장의 개인이나 기업의 영화관들과는 다르다. 나는 현재의 시네마테크가 1970년대 독일 공공영화관의 성격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독일에서는 비영리적 성격의 공공영화관이 시장의 예술영화관과 달리 상영관의 추구목표, 운영방식, 상영작 선정과 상영 방식의 비상업적 성격에서 공익성을 지니고 있기에 공익에 이바지하는 문화예술단체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의 대상이 된다고 결정했다.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의 근거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입증되었다고 생각한다.

  공적 지원의 근거로 말해지는 공공성과 관련해서는 알다시피 세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첫째, 국가와 관련되는 공적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특정의 누군가가 아닌 모든 이들에 관계되는 공통적이라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는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하다는 의미의 공개적이라는 의미가 있다. 공공성은 국가가 관리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시네마테크의 공공성이라는 것은 공통적이면서 공개성에 있는 대안적인 공공성이다. 요즘의 문제는 자칫 공공성을 국가의 문제로 돌리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공공기관에 수익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마련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관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대안적인, 혹은 대항적인 공공권을 말한다.

  정책적 지원과 관련해서는 이중적인 생각은 있다. 정책적인 지원이라는 것이 정책지원자들의 합리적인 판단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기준점이 다를 수는 있다. 그렇다면 정책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나? 판단은 아마도 국가나 정부가 하겠지만, 가령 지금까지 시는 시네마테크를 지원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정당한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운영이 어려워서 지원을 요청한다기 보다는, 이런 영역이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의 대상이 될 만한지 판단의 요구를 계속 해왔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말했지만, 서울의 스크린 수가 460여개가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대기업의 멀티플렉스들이다. 이중 예술영화관의 스크린은 손꼽을 정도이고, 공공상영관이라 말할 수 있는 극장은 서울아트시네마와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 두 곳이다. 비교하자면, 파리는 서울보다 인구수는 네 배나 적고, 영화관객수도 절반 정도인데(서울은 56백만, 파리는 27백만), 민관 영화관이 150, 그중 예술영화관이 90여개이다. 이 차이는 심각하다.

 

김경민: 그렇다면 그 차이들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김성욱: 역사적인 배경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이런 영화관들은 이미 3-40년대에, 그리고 60, 70년대부터 등장했다. 한국에서 6,70년대는 불모지였다. 지금의 예술영화관들은 90년대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영화문화운동들도 그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성의 차이가 이런 환경적인 차이를 만든 것 같다. 90년대는 그런데 영화 소비의 가속화 현상들, 즉 멀티플렉스를 통한 가속화가 한국에서 빨리 진행됐던 시기다. 그러다보니 멀티플렉스를 통한 영화의 소비가 진행되고, 이 속에서 독립영화들이나 고전영화를 상영해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영화관을 영화문화의 중요한 장소로 여기는 인식이 없었던 탓도 있다. 이건 우리들의 문제다. 영화의 상업성에 관심을 보인 이들이나 영화관을 생각했지, 상대적으로 영화예술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이 영화관을 문화공간으로 인식하는 게 드물었다고 생각한다.

 

김경민: 비교적 최근의 일에 대해 질문을 하고 싶다. 2013년 여름에 박원순 시장이 청책 토론회를 열었는데, 그때 선생님도 가신 것으로 안다. 거기서 어떤 말들이 나왔고 진행이 어떻게 됐는지?

김성욱: 발제가 있었고, 토론이라기보다는 자유발언 형식이었다.

김경민: 그때 서울시가 어떤 답변을 하기도 했는지.

김성욱: 그렇지는 않고 듣기만 했다.

김경민: 당시에 나왔던 요구사항은?

김성욱: 그때가 공식적으로 서울시와 이야기할 수 있는 첫 자리였다. 서울시의 영화 정책이 공공성의 지원에 있다는 것이었고, 시네마테크에 대한 안정적인 지원과 공간에 대한 지원의 이야기가 있었다. 변영주 감독, 정윤철 감독 등의 영화감독들의 제안 발언들도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안들도 있었기 때문에. 시네마테크와 관련해서 시의 지원과 새로운 공간 마련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김경민: 전용관을 실제로 추진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같이 이상한 걸 해보자는 이야기도 나왔고.(웃음)

김성욱: 어떤 거 이상한 거?

김경민: 로슈포르 노래를 부르면서 코스튬도 맞추고 그래서 개관식에 5분만 달라고. (웃음) 그러다 최근에 예산이 부결이 됐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리고 14년도에는 시네마테크에 대한 계획 자체가 안 나와있다. 그 얘기를 들으시고 앞으로 어떻게 대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신지?

김성욱: 전용관은 시네마테크를 위한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공간의 의미이자, 새로운 공간을 말한다. 2002년도에 서울에서 시네마테크가 시작했다는 것은 상당히 뒤늦은 거다. 21세기의 상황이라는 것이 멀티플렉스 환경,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 등의 변화가 있었기에 해외에서는 이미 새로운 관객층을 흡수하고, 교육과 전시 등을 위한 새로운 공간에 대한 요구들이 있었다. 파리, 뉴욕, 온타리오, 등등 여러 도시에서 시네마테크를 위한 신축 건물의 요구가 있었고, 또 새롭게 마련됐다. 우리의 경우는 현재의 조건이 시설도 낙후되어있고 영사장비도 부실하고, 매년 임대를 하는 불안정성의 문제가 있기에 제대로 된 상영설비를 갖춘 공간을 요구하는 것이고, 또한 십여년 동안의 활동에서 새롭게 필요한(사실은 설립 당시부터 있어야만 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공간들, 이를테면 자료실이라던가,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들의 수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영화진흥위원회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시네마테크의 공간 마련에 소극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으로는 2010년부터 서울시의 지원과 함께 공간 마련에 대해 요청을 했었다. 2011년도에 조례제정을 했었고, 시의 지원을 촉구했는데, 최근에야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전용관을 마련하겠다는 시의 대답과 의지 표명은 있었지만 아직 예산 반영이 되지는 않았기에 낙관할 수는 없다.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문제를 시가 어떻게 해해나갈 것인지도 불투명하다. 가령, 아직까지도 시와 시네마테크간에 어떤 합의나 논의를 이뤄낸 것은 아니다. 가령, 시의 정책결정자들이 공식적으로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한 적이 없다. 꼭 이 곳에 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논의가 되려면 기존의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다만, 시가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시네마테크를 건립할 것임을 몇 차례 공표했고, 지난 해에는 이와 관련한 용역조사가 있었다. 최근에는 서울영상위에서 여러 영화 단체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복합상영관의 부지와 운영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우리는 시네마테크의 이전이라 생각하지만, 시는 이와 관련해서 모호한 입장이며 전체적인 논의가 시네마테크가 아니라 복합관으로 진행되고 있기에, 여러 영화단체들이나 기관들이 들어가게 될 것 같다. 생각보다 공간의 규모가 커졌고, 그 만큼 건립의 진행, 운영과 관련한 논의, 공간에의 참여방식, 지원의 방식 등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이 유사한 복합관의 논의가 2007년에도 있었는데, 여러 이유로 결국 무산되었다. 배가 바다로 가야지 산으로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김경민: 아트시네마 직원들의 근무 햇수가 길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것도 앞선 문제들과 상관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성욱: 업무적인 불안정성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지만, 그 부분들을 객관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2010년도 이전까지는 그래도 조금 더 지속성이 있었다. 그런데 2010년도를 넘어가면서 많이 바뀌었다. 작년부터는 또 어느 정도의 지속성이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2009년을 넘어가면서는 상당히 많은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다. 예산 지원의 중단이나 공모제나 이런 문제들은 일을 해왔던 이들에게 근본적인 회의감을 느끼게 한다. 시네마테크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외국에서도 시네마테크 실무자들의 기본 덕목을 열정이라 말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열정만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안정성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일을 계속 지속해나갈 수 있는 임금 같은 경제적인 조건이 큰 부분으로 작용하는 것인 사실이다. 고용의 안정성을 어떻게 지켜나갈지는 큰 문제다. 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지속적으로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극장을 찾으면 좋겠다, 동시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지속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분야에서도 전문성의 영역이 큰데 불안정성이 생기면서 사람이 바뀌는 건 문제다. 예를 들어 영사기사, 매표, 수표라는 것도 실제로는 외국의 영화관에 가도 몇 년 만에 가도 똑같은 사람이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변함없음이 주는 심리적인 안정성이 있다. 여전히 그것이 존속한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내 발길이 머물지 않아도 무언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있어야만 하는 곳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설사 그곳에 가지 않더라도, 그것이 존재 해야만 하는 필요성. 그것은 사회적인 필요성이지, 시장의 관점에서는 아니다. 세상이 너무 빨리 폐기처분되어 버리는데, 시네마테크가 빨리 폐기처분 되어져버렸던 영화들을 보존하고 상영하는 곳이라면, 이곳은 영화가 최종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경쟁과 시장 가치 안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면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똑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지속성 여부도 포함되어야 한다

 


▲ 질문 중인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김경민



김경민: 몇 년 전에 인터뷰 하신 것을 찾아봤다. 당시에 여러 예를 들어주셨다. 아트시네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도 (정부, 프랑스 영진위 지원 80%, 관객수입 20%), 뉴욕의 필름포럼과도 (기부금 50%, 포드재단 융자와 티켓 수입 50%) 다른 방식의 한국적 상황을 고려한 모델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그런 모델이란 어떤 것인가?

김성욱: 한국의 상황에서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정부나 시의 지원이 최소한 50%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럽은 국가의 지원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미국은 시장주의가 있는데, 시장주의라 하더라도 펀드라던가 민간기업, 재단의 지원이 구조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은 기업이 그런 지원을 하지 않고, 한다 해도 직접 운영을 하려 한다는게 문제다. 따라서 미국처럼 민간의 지원이나 후원의 퍼센트가 높을 수는 없다.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의 구조로 보면 정부 지원이 30%. 민간 영역이 70% 이상인데, 이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현실적으로 이 공간의 공적 역할이 지속적으로 가능하다. 시네마테크는 관객 수입으로 재정을 충당할 수 없는 구조다.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제도 관객 수로 충당하지는 않지 않는가? 공적지원의 방향은 유럽과 미국의 중간정도는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서울아트시네마 2002년부터 개관했지만, 시는 한 번도 지원을 한 적이 없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서울의 시민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을 해왔던 건데, 시의 공적 지원이 없었다는 것은 지원을 받을 만한 활동을 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시가 충분히 정상적인 판단을 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김경민: 지금 시점에서 영화나 문화 안에서 영화의 공공성이라는 것을 두고 봤을 때 지금 현재 시네마테크는 어떤 위치에 있고, 앞으로는 어떤 자리를 지켜야할까?

김성욱: 예전에도 말했던 적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시네마테크를 전위라 생각하는데, 틀린 말은 아닐테지만 사실 후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모든 상업적 가치를 소진한 영화들을 상영하고 있으니, 영화가 실효성을 다 소진한 뒤에도 영화가 남을 장소이다. 우리는 뒤 쪽에 있다. 영화의 뒤를 지켜두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뒤의 세대들을 위한 장소로서도 더 적극적인 기능을 했으면 한다.

 

김경민: 작년부터 서울 아트시네마 내의 에디터 모임이 사라진 것으로 안다. 녹취 자활이 따로 뽑히고 있어서 내심 놀랐다. 아까도 새로운 세대의 교육에 대해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제 생각에 에디터 모임은 (잘 진행됐을 경우에) 다음의 시네마테크 세대를 배출할 수도 있을테고, 지금과 같은 시네마테크 문제에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모임일 것 같은데 어떤 속사정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성욱: 양면적인 게 있는 것 같다. 참여하는 사람도 적극적이어야 하고, 극장에서도 어느 정도 지원이 있어야 한다. 생각들은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진행하기가 힘든 것 같다. 생각보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바쁜 것 같다. (웃음) 전념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마련되어야 전념을 할 텐데, 그 조건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우니, 악순환이 있다. 나는 반응의 연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A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지면 B에서는 A로 오는 것만은 아니고 B 안에서 A라는 것을 어떻게 이루어갈지를 생각하는 것. 나는 극장에 모든 사람들이 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럴 만큼 영화관도 크지 않다. 사람들이 다 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꼭 가지 않더라도 극장이 여전히 있고,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들에 어떻게 반응해갈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은 언제나 한다. 그렇게 자발적인 참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 참여를 어떻게 지원할지는 고민이다.

  요즈음에는 작은 영화공동체들 이런 부분과 같이 어떻게 연계를 해서 서포팅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영화공동체 끼리의 네트워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은 공동체의 네트워크들 말이다.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집단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그런 소규모 집단과 시네마테크는 어떻게 같이 할 수 있을지. 소규모 공동체를 하는 이들을 만나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여전히 작은 규모의 모임에서 어떤 식으로 영화를 생각하고 있는지.

 

김주현: 최근에 다른 관심?

김성욱: 시네마테크 아카데미는 계속 생각하고 있다. 거창해 보이는데 (웃음) 일종의 대안영화학교이다.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대학을 거치지 않아도 영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학교. 등록금도 비싸니 모두 대학에 갈 수는 없다. 비평스쿨도 있을 수 있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같이 영화제작을 해보는 일종의 시민학교이다. 아이들을 위한 시네마테크도 생각한다. 몇 번 시도를 했는데, 현재 공간에서는 힘들다. 나는 영화를 둘러싼 세상이 너무 제도화되는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그런 제도적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영화를 만나고, 보고, 만들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시네마테크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주현: 시네마테크를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은 한 장면을 꼽자면?  

김성욱: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아무래도 2010년도, 영진위의 공모제와 지원 중단에 따라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후원에 나섰던 일이다. 그때의 판단은 우리는 공모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현실적 판단은 아니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공모제에 참여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공모를 할 권리가 있는지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시네마테크가 지속되는 것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던져진 것이었다. 우리는 극장을 계속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지속되려면 이제 지원이 필요했다. 만약 당시에 관객들의 지원이 없어 이 공간이 사라진다면 그것에 대해 서글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민적 영역에서 충분히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니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네마테크는 중단되지 않았고 남았다. 당시에 영화인들이 후원을 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을 했다. 동시에 관객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때의 일이 시네마테크에 대한 이 사회에서의 시민권 획득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공적 영역에서 화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개인의 후원으로 이곳이 남아야만 할 것인가. 서울의 관객들은 지난 12년 동안 충분히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시가 시민들의 노력에, 그들의 요구에 화답을 보일 때이다.

 

[ACT! 88호 기획대담 2014.03.31]

 

진행 및 정리: 김경민(서울아트시네마 관객), 

김주현(ACT!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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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3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릴때 문화연대의 정책 활동가로 일하는 최혁규씨와 짧은 인터뷰를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도 서울시의 시네마테크 지원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얼마전 인터뷰를 하다가 문득 예전의 글이 생각났다


 


서울아트시네마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 인터뷰


최혁규

 


기존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겐 조금은 낯설 수 있는 영화관이 있다. 물론 서울 도심부에 예술영화 전용극장도 꽤 있고, 멀티플렉스 극장 안에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긴 하지만 이곳은 그런 곳과 또 다른 성격의 영화관이다. 바로 서울아트시네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종로 낙원상가 4층에 위치한 시네마테크 전용관으로서 2002년부터 현대영화, 고전영화 할 것 없이 세계 각국의 영화들을 다양하게 소개해왔던 곳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영화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공간을 통해 많고 다양한 영화들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 교감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를 만나봤다.

 


최혁규 :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데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면서 매년 10-15회 정도의 작가전이나 특별전 등을 기획하고 있다. 그 외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원래 시네클럽의 회원에서 시작해 영화 프로그램의 기획을 하게 되었는데, 영화비평 활동도 함께 했었다.

 

최혁규 : 서울아트시네마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이다. 시네마테크(cinematheque)는 영화(cinema)와 도서관(bibliotheque)의 합성어인데, 시네마테크로서 서울아트시네마란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는 고전/예술 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시네마테크(cinematheque) 전용관이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민간 비영리로 운영되는 전문적인 영화관이다. 2002년에 처음 개관해 지난해 10년을 넘겼다. 영화관 하면 개봉하는 영화들을 만나는 장소쯤으로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다양한 영화관들이 있다. 음악관이나 미술관, 혹은 도서관이 다양하게 존재하듯 말이다. 가령, 책만 하더라도 신간을 갖춘 대형 서점들이 있는가 하면 이미 절판되거나 과거 작가들의 전집을 읽으려면 아무래도 도서관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작은 갤러리가 있고 시립, 국립 미술관들이 있다. 그런 식으로 서울아트시네마는 과거의 영화들과 만날 수 있는 일종의 영화도서관이자, 지난 해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전작 20여편을 회고전에서 상영했던 것처럼 미술관이나 박물관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과거의 작품만 트는 것은 아니고 서울에 개봉하지 못하는, 수입되지 못한 해외 걸작들을 상영하는 특별전도 개최하고 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다. 영화가 숨쉬고 움직이고 쉬는 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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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규 : 시네마테크의 유래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시네마테크의 해외 사례는 어떤가?

 

김성욱 : 해외에서는 주로 시네마테크, 혹은 필름아카이브(film archive) 등의 명칭으로 이미 1930년대부터 시네마테크가 만들어졌다. 영화란 그림이나 미술처럼 동질적이지 않은 대상이다. 영화라는 대상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1930년대 시네마테크가 서구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은 영화를 문화적 유산, 특히나 20세기의 문화적 유산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유산이란 시장의 상품이나 혹은 좋은 의미에서의 예술품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70년대 아날학파 역사가들이 뒤늦게 깨달았듯이 영화는 20세기의 역사와 사회, 인간의 삶이 담긴 중요한 기록물이기도 하니까. 물론 우리 같은 시네마테크는 전후, 특히 60년대 새로운 영화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네필 문화와 맥을 같이한다 생각한다. 비록 서울은 40년정도 늦긴 했지만.

 

최혁규 :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미술이나 문학 같은 다른 예술들과는 다른 일회용적인 유흥거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만 생각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문화적 사회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인식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시네마테크가 영화를 시장의 상품이나 예술품이 아닌 문화적 유산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시네마테크가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김성욱 : 글쎄... 고다르 식으로 말해서 예술이 예외적인 것이고 문화가 규칙의 문제라면, 우리는 영화의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947년에 이미 뉴욕의 에미모스 보겔은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들을 마음대로 보기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상영될 기회가 없었던 ‘전복적인 영화들’을 관객에게 보여줄 결심을 했다. 그들은 ‘성숙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극장에 걸린 상업영화들만이 전부라 생각한 관객들에게 그런 영화만큼이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다른 영화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다른 영화들을 볼 수 있다면 다른 세상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자본과 힘에의 종속은 피하기가 쉽지 않지만 문화의 영역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60년대에 기 드보르가 이미 세상이 영화같은 스펙터클이 되었다고 말했듯이 새로운 영화들 혹은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과거의 영화들과 만나는 것은 이미 사회적인 행위다.

 

최혁규 : 가만 살펴보면 정부 차원에서 과거의 영화들, 현재의 영화들, 그리고 새로운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정책을 제시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문화 정책의 큰 틀 안에서 세부적으로 미약하게 제시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문화정책으로 문화기본법과 문화예술후원활성화법의 제정, 예술인복지법 수정, 문화예술도시 개발 등을 제시했는데, 이 정책들이 서울아트시네마에 어떤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하는가? 또는 차기 정부가 영화 부문에 대한 어떤 정책을 제시했으면 하는가?

 

김성욱 : 글쎄... 구체적인 계획이 아직 나온것이 없어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보다 부산처럼 서울시가 시네마테크에 관심을 보이기를 기대했는데 아직까지 뚜렷한 반응이 없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서울시민들의 영화복지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미 몇년전부터 서울시가 나서서 부산처럼 낙후된 영화공간을 개선해 새로운 전용관을 마련하기를 요구했지만 반응이 없다. 중요한 것은 문화가 규칙의 문제라 이야기했듯이 제대로 규칙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공공성의 위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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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대 인터뷰]11호 (2013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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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시네마테크를 지원할 수 없는가?

 

서울시의 시네마테크 지원을 촉구하는 ‘시민청원’이 지난 3월 13일에 시작됐다. 불과 몇일만에 지지자 천명을 넘겨 청원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단기간에 관객들, 시민들이 참여해 지지서명을 한 것은 사실 놀라운 일로, 그 만큼 이 문제에 관심들이 많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시민청원 이전에, 이미 서울아트시네마는 서울시에 시네마테크의 지원과 관련해 몇 차례 제안을 했었고 최근에는 공식적인 질의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미 2006년부터, 그리고 2010년 1월에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위원장 이명세 감독)를 발족하면서 시의 지원과 시네마테크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마련해줄 것을 촉구했다. 당시 서울시는 충무로국제영화제에 매년 30억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 서울시가 시네마테크에 지원을 못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서울시는 시네마테크의 지원에 관심이 없었다. 지원의 근거가 미약했던 탓일까? 근거를 더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2011년 5월에 시네마테크 지원 정책 포럼을 거쳐 그해 12월, 김미경 서울시의원의 발의로 ‘전용과 지원 조례개정’을 이뤄내기도 했다. 사실 포럼에서 나왔던 의견이지만 조례까지 만들어질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서울시의 의지였다. ‘서울시 문화도시 기본조례’에는 ‘시장은 문화예술인들의 문화예술활동을 육성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문화시설 및 제반여건을 조성하는데 노력한다’고 되어 있다. ‘서울시 영상진흥조례’에도 ‘시민의 문화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영상문화의 다양성, 공공성 증진과 관련한 사업을 지원한다’고 되어 있다. 시민의 문화향유권을 존중했다면 그리고 의지가 있었다면 시네마테크에 대한 즉각적인 지원이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서울시는 관심이 없었기에 이런 조례가 이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의 근거를 마련하는 조례 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시는 충무로국제영화제에 매년 30억을 지원하고 있었다. 서욱국제가족영상축제에도 매년 3억원의 예산을 지원했다. 당시 오세훈 전 시장이 서울시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두 영화제가 서울시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개최됐고, 결국 지원이 중단되면서 영화제도 사라졌다.

 

2011년 10월, 현 시장이 당선되면서 상황은 바뀌는 듯 했다. 근 십여년 만에 서울시의 시네마테크의 지원과 관련한 기대감이 커 갔다. 결과적으로 그 만큼 아쉬움도 남았다. 2013년, 드디어 서울시는 전용관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서울의 한 개관을 지원했는데, 정작 시네마테크는 지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서울시가 2014년에는 지원의 폭을 넓히겠다는 말이 있었기에 당시 다툴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서울시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겠다고 했고, 이는 현재 진행 중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올해 예산에서도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이 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민 청원은 그런 상황에서 진행된 정당한 요구였다. 이런 청원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지난 과정들을 돌이켜봤을 때,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은 이미 고려될 수 있고, 또한 고려되어야만 했다.

 

시네마테크 지원을 요구하는 시민청원에 따라 얼마 후, 서울시가 서울아트시네마 지원을 검토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왔다. 3월 19일자 기사에 따르면 “시 문화산업과 관계자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을 지원할 근거 조항은 있지만 예산이 한정된 만큰 정책의 우선순위를 살펴 결정하게 될 것”이라 한다. 예전 서울시장들이나 시의 무관심과 비교해보면 지금의 서울시는 영화문화와 관련해 진일보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아쉬운 것은 조례개정이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미 3년째 동일한 답변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산 배정이 되지 않았다와 정책 우선순위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질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시네마테크의 지원은 언제까지 서울시의 정책우선순위가 될 없는 것인가? 반대로, 서울시는 지금까지 영화문화와 관련해 어떤 지원을 해왔던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서울시의 문화정책의 목표와 과제, 정책의 방향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가령, 지난해 3월 서울시의 영상문화청책 토론회에서도 이와 관련한 제안이 있었다. ‘서울시 영상문화 정책 제안’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내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된 것은 국내 타 지역 및 해외 주요도시와 비교해 서울의 영상정책 전반이 미흡하며, 인구대비 지원예산 규모도 부족하고, 시민들의 문화의식에 비해 다양한 문화향유권 지원이 부족해, 전반적으로 서울시의 공공영상문화 정책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되돌아오는 예산부족과 정책의 우선순위와 관련한 문제는 지금의 현실에서 정책의 주된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해야만 한다. 이는 영화적 쟁점이기도 하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논의만큼, 우리는 영화가 어떤 상황에 있고 동시에 어떻게 영화를 지원할 것인지를 쟁점화해야만 한다.

 

쟁점의 현실을 이해할 만한 몇 가지 사례들을 들고 싶다. 가령, 서울의 극장환경을 살펴보자. 현재 서울의 스크린 수는 460여개, 이 중 대부분은 대기업의 멀티플렉스 극장들이며, 이 중 예술영화관들은 손꼽을 정도이다. 공공상영관이라 할 만한(공공상영관이라 말한 것은 일반 영화관에서는 상영될 기회가 없는 영화들을 비상업적 방식으로 상영하는 영화관을 의미한다) 극장은 비영리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와 독립영화전용관인 인디스페이스 두 곳이다. 하지만, 지난 해 서울의 관객 수는 그 어느 해보다 많아져 5천 6백만명에 달했다. 좋은 비교는 아닐테지만(좋은 문화적 환경을 갖춘 외국의 도시들과 비교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모습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우리의 상상력이 단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서울시의 상황을 파리와 비교해보고 싶다. 종종, 서울시가 문화도시로서의 도시경쟁력을 말하면서 런던, 파리, 로마 등의 예를 들고 있으니 이 비교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2013년 파리의 경우, 인구수는 대략 250만으로, 영화 관객 수는 2천7백만에 달한다고 한다. 서울의 관객 수의 대략 절반의 수치이다. 스크린 수 또한 374개로 서울보다 적은 편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민간영화관이 150개이며 예술영화관이 89개였다. 예술 영화관의 수는 대략 서울의 9배에 달한다. 파리는 영화의 역사가 오래된 곳으로 우리의 문화수준보다 높다고(관객수준을 말하는게 아니다) 가정하더라도, 이 차이는 심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울 시민들은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시장지배와 획일적인 영화상영에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이는 아직까지 주요한 쟁점이 아니다. 지난해, 서울시장은 대형마트 규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외국에서는 입주나 매장 규모의 제한을 두고 있다며 “중소 상공인들, 재래시장 종사자들이 몰락해버리면 계층간 갈등이나 사회의 어떤 불안요인, 등 사회적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었다. “이런 것들을 방지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큰 화두”라고도 덧붙였다. 이 동일한 논리가 서울이 처한 영화문화의 상황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논리로 서울시는 멀티플렉스를 규제할 수도 있다. 민간 예술영화관들의 몰락이나 독립영화관, 시네마테크가 처한 상황 또한 사회적 불안요인이 될 수 있다. 영화관의 대기업 지배는 대형 마트의 폐해만큼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니, 시민의 정신과 감정, 의식, 공동체성의 감각 등에 심각한 불안 요인을 만들기 때문에 더 큰 문제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러의 표현을 빌자면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마케팅 지배는 영화 관객의 곤충적 군생조직화를 양산한다.

 

서울시가 시네마테크를 지원하는 것에 더한 근거를 마련해야만 할까? 조례가 있으니 근거는 마련됐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민간 독립영화관을 지원하고 있으니 더한 근거를 더 마련해야만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서울에서 열리는 영화제들 또한 서울시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제는 시네마테크가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합당한 근거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됐다. 그럼에도 다른 사례를 들고 싶다. 1970년대부터 독일의 지방자치단체는 서울아트시네마와 같은 비영리적 성격의 영화관(독일의 경우 이를 공공상영관Kommunale Kino)을 지원했는데, 그 근거는 정신적, 예술적 삶을 표현하는 고전예술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공익에 이바지하는 문화예술단체로 간주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지원의 또 다른 근거는 이들 영화관의 활동이 사업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공공상영관의 추구목표와 운영방식, 상영작 선정과 상영방식의 비상업적 성격의 공익성이 있기에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들이 재정을 지원해 주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독일식의 공공영화관은 다른 영화들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다른 영화들이란 일반 극장에서 상영될 기회가 거의 전무한 영화들이다. 이곳에서는 최신영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보고, 새로이 보고, 새삼 발견하는 것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서울의 경우 이러한 공공상영관이란 서울아트시네마와 같은 비영리 시네마테크나, 인디스페이스 같은 독립영화전용관이다.

 

서울시의 시네마테크 지원을 둘러싼 논의는 그러므로 영화문화의 정책과 관련한 영화적 쟁점이자 직업적 관심사 이상의 중요한 쟁점이다. 말하자면 영화를, 공공적 성격의 영화관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다. 가령, 새로운 독일영화가 나오던 1970년대에 독일의 지방자치단체들이 공공영화관을 지원했던 것은 전통적으로 공익성을 가진 문화예술공간으로 간주했던 연극의 공연장, 음악의 연주장, 문화유산의 박물관, 문학의 도서관 외에 영화의 상영관 역시 사회의 문화적 자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뒤늦긴 했지만, 그러므로 더 좋은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다. 2002년 파리 시장에 선출된 베르트랑 들라노에는 파리시의 문화관련 정책 가운데 영화문화의 다양성 보존과 지원정책의 일관성을 목표로 '미션 시네마Mission Cinema'라는 정책을 시작해, 파리의 영화문화를 혁신했다. 이 정책은 영화와 관련해 파리의 문화적 예외를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다섯 가지의 주요한 정책이 있는데, 파리의 독립적인 영화관들에 대한 지원, 영화 교육, 영화제 및 상영회 개최(파리시가 주최하는 '파리 시네마 영화제', 야외 상영회 등), 이미지 포럼 지원(파리시가 운영하는 영화관으로 프로그래밍, 운영지원), 파리에서의 촬영지원 등이다. 서울시 또한 이들 정책들의 일부를 이미 실행하고 있다. 하지만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공공적인 영화관에 대한 지원이다.

 

이제 5월이 오면 서울아트시네마는 개관 12주년을 맞이한다. 횟수로는 13년째이다. 그동안 많은 영화인들의 후원이 있었고, 관객들의 참여가 있었다. 그러나 시네마테크에의 지원과 관련해 정책결정자들로부터 우리가 되돌려 받은 것은 언제나 지불이 불가능한 부도수표였다. 단순한 사실은 지난 12년간 서울시가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을 결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심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는 그리고 현 시장은 전 시장들의 재임시절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답변과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제는 정책결정자들이 애매한 내일을 기약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이 반대로 과거를 되돌아보고 지금, 이제 결정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또 다른 세상이란 바로 여기, 지금이기 때문이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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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crosstheuniverse 2014.03.22 02:26 신고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선생님의 생각에 뜻과 마음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요?^^지루한 기다림이었지만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관심과 애정을 갖고 늘 지켜보겠습니다. 더 힘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프지 마시길.....건강하세요~^^

  2. 지나가는과객 2014.11.10 12:42 신고

    분명 전액지원을 해줘야 맞는데.. 제가 나설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서울의 횃불 서울아트시네마 파이팅

 

 

사무라이의 길

 

<7인의 사무라이>는 16세기 일본 막부시대를 배경으로 산적들에게 매년 식량과 여자를 약탈당한 산간의 농민들이 일곱 명의 사무라이를 고용해 산적과 싸우는 이야기다. 상영시간이 3시간 반에 달하는 이 영화는 당시 2억 엔이 넘는 제작비(당시 일반적인 영화의 7배에 달하는 예산)에 1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친 초대형 대작이었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7인의 사무라이>가 진정한 대작인 것은 이 영화가 이후 등장한 수많은 무협영화, 서부영화, 그리고 액션영화에 많은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협녀>로 유명한 호금전 감독은 액션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영화로 <7인의 사무라이>를 꼽았다. 특히 그가 기억하는 장면은 사무라이 간베이가 머리를 삭발하고 스님으로 둔갑해 주먹밥을 들고 오두막에 들어가 아이를 인질로 잡은 도둑을 베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구로사와 감독은 정작 중요한 사건을 화면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영화 속 군중들처럼 바깥에서 오두막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저 지켜볼 뿐이다. 호금전이 말하듯이 이 장면은 구로사와 감독이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1946)에 감화받아 구성한 장면이다. 보안관 와이어트 워프(헨리 폰다)가 술에 취한 인디언을 끌고 나오는 장면에서 존 포드 감독은 이와 유사한 연출을 이미 보여주었다. 구로사와는 존 포드처럼 액션이 벌어지는 사건을 화면의 바깥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한다.

 

액션에 정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는 연출 또한 흥미롭다. 가령 검의 달인인 규조를 보여주는 방식은 대부분 그렇다. 두목 간베이와 동료들이 사무라이를 모으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닐 때 그들은 규조가 대중들 앞에서 떠벌이 사무라이와 벌이는 겨루기를 본다. 이 장면에서 규조는 검을 뽑지도 않고 단지 적을 한참 노려보더니 “바보 같으니, 이미 승부는 보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상대의 모습과 상태만을 보고도 승부를 읽어낸 것이다. 이 과묵한 사무라이는 이후에도 영웅적인 풍모를 보여준다. 산적들이 마을을 침공할 때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은 산적들이 쏘아대는 총이 어느 정도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는지 몰라 곤란을 겪는다. 이때 규조는 자신이 적진에 가서 총을 한 정 훔쳐오겠다고 말한다. 그는 쏜살같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고, 카메라는 그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윽고 얼마 후, 규조는 보란 듯이 한 손에 총을 들고 임무를 완수한 채 마을로 되돌아온다. 그가 적진에서 어떻게 총을 훔쳤는지는 보여지지 않기에 알 수 없다. 하지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활약을 상상할 여지가 더 많아진다. 반면, 어린애처럼 날뛰며 까불거리는 농부 출신의 사무라이 기쿠치요가 적진에서 총을 노획하는 장면은 너무나도 상세히 보여준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최고의 전투 장면은 무엇보다 영화의 종결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진흙탕을 뒹굴면서 흙투성이가 되어 산적들과 벌이는 집단 전투 장면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 장면에서 세 대의 카메라를 사용해 같은 움직임을 서로 다른 거리와 각도로 촬영, 편집해 최후 격전의 냉혹한 분위기를 동적으로 그려낸다. 구로사와가 이런 기법을 활용한 것은 <7인의 사무라이>가 처음이었다. 그는 폭우 속에서 산적들이 농촌 마을을 습격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종래의 방식대로 개별 장면들을 촬영할 경우 액션이 어떻게 반복되고 촬영될지 확신할 수 없어서 3대의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3대의 카메라로 3개의 앵글로 촬영해 전투 장면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시 할리우드도 놀랄 일이었다. 구로사와는 이 3대의 카메라를 각기 다르게 사용했는데, 가령 첫 번째 카메라는 롱 쇼트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위치에, 두 번째 카메라는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결정적인 장면을, 그리고 세 번째 카메라는 장면 전체를 따라 돌아다니며 순간들을 기록한다. 그러니 촬영 과정에서는 장면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영화 스태프들 또한 장면이 어떻게 편집될지 궁금해 편집 장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편집에 우선권을 두는 이런 경향은 구로사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감지된다. “나는 무언가를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무엇보다 내가 촬영하는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결정되고 나면, 그 장면이 어떤 앵글로 촬영되어야 최선인지 생각한다. 소망하는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세부적으로 내가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 촬영감독뿐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에게 그것을 말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함께 일한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얻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책임이다.” 구로사와는 또한 제작 디자이너를 두지 않았으며, 쇼트의 장면은 물론 영화에서의 동선을 손수 디자인하기도 했다(그는 원래 화가였다).

 

 

 

 

<7인의 사무라이>는 농민과 무사가 계급 간의 대립을 넘어 공통의 적에 맞서는 이야기이자 그런 공생의 한계를 또한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이러한 점이 사극의 한계를 넘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한다. 가령 이 영화가 공개되던 1954년은 일본이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해상자위대를 창설하던 때이다. 우익들이 군비증강의 필요성을 제기하던 때이고,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에 따라 공직에서 추방당한 우익 지도자들을 포함한 우익세력들이 일본사회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 영화는 보수파의 군비증강 프로파간다로 환영받기도 했다. 영화에 담긴 패배의식(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사무라이들은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도 패배했다고 말한다)과 상喪의 의식은 패전 후의 상실감, 직업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귀환병들의 부랑자적 상태, 냉전 시기의 불안감과 보수적 심리 등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7인의 사무라이들이 상대하는 적들이 단지 악한들로 묘사될 뿐 분명한 설명이나 표상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도 적과 아군의 단순한 논리를 부추기는 면이 있다(구로사와 아키라는 존 포드의 서부극에 등장하는 인디언의 비가시적 표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 말하지만). 물론 이러한 구도는 반대로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대중에의 계몽적 시도의 패배나 이상적인 공동체에 관한 꿈의 붕괴로 비춰지기도 했다. <7인의 사무라이>는 그런 점에서 기묘한 보편성을 얻어 여전히 회자되는 영화다.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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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4일. 에이모스 보겔이 세상을 떠났다. 영화를 전복예술로 사고했던 영화사가이자 미국의 전설적인 영화 큐레이터였던 이가 작별을 고한 것이다. 폴 크로닌의 <전복예술로서의 영화: 에이모스 보겔과 시네마16>(2003)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무슨 생각으로 뉴욕의 가장 중요한 영화클럽이었던 ‘시네마 16’을 시작했는지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뉴욕의 상황이 이랬다. "1940년대, 심지어 뉴욕에서도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들을 마음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보러가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흥미로운 영화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적은 규모에 개인적인 기획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험적인 작품이나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곳은 없었다."

1947년, 에이모스 보겔은 상영될 기회가 없었던 ‘전복적인 영화들’을 관객에게 보여줄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시네마 16’이란 전설적인 영화클럽이 개관했다. ‘성숙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멤버쉽으로 운영하는 클럽이었다. 그는 대안적인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처음에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16미리 영화들을 선보였지만, 나중에는 폴란스키, 카사베츠, 클루게, 오시마 나기사, 오즈, 리베트, 레네 등의 영화들을 보여주었다. 모험적인 시도였지만 영화를 보여주는 행위가 새로운 관객을 만든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네마 16’은 이미 이런 영화들을 알고 있는 배타적인 소규모 집단의 매니아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극장에 걸린 상업영화들이 영화의 전부라 여긴 관객들에게 그런 시시한 영화들보다 흥미있고 재미있는 중요한 다른 영화들이 이미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다른 영화들을 볼 수 있다면 다른 세상도 꿈꿀 수 있다. 존 카사베츠의 첫 번째 영화가 나오기 10년 전에(카사베츠의 <그림자들>도 ‘시네마 16’에서 소개되었다) 에이모스 보겔은 이미 다른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모스 보겔의 사망소식을 들으면서 문득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던 2005년 4월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해 서울아트시네마는 2002년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안국동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낙원상가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The Last Picture Show’란 고별 프로그램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예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했었다.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2003),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1924), 에드가르도 코자린스키의 <시티즌 랑글루아>(1994),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도 이때 함께 상영했었다. 영화의 새로운 땅에 이주하긴 했지만 알고보니 우리에겐 입국비자도 영주권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3년만에 불법이민자처럼 추방을 당했다.

2012년, 5월 10일. 서울아트시네마는 개관 10주년을 맞는다. 낙원으로 이주한지도 이미 7년이다. 시네마테크는 그동안 다른 영화들을 꿈꾸었고 다른 세상을 원했다. 그 결과 무엇이 변했고, 우리들에게 어떤 것들이 남았는가를 생각한다. 에이모스 보겔은 극장에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밝아지면 영화의 전복이 시작되기를 원했다. 전복의결과, 우리는 다른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곳은 입국비자가 필요없는 곳이다. 새로운 세계는 그런데 그 곳에 거주할 새로운 시민을 원한다. 영화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을 보고 자유롭고 진지하게 논의하는 성숙한 영화의 시민이 필요하다. 되돌아보면 지난 10년의 시네마테크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국비자를 발급해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화의 시민권을 획득하려 했다. 그 결과 질문이 남았다. 우리는 영화시민이 되기위한  충분한 권리를 이미 획득했는가? 혹은, 우리는 영화시민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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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0주년을 맞아 서울아트시네마가 선보이는 ‘100편의 시네마 오디세이’는 영화라는 세계로 관객들과 여행을 떠나는 기획입니다. 첫 번째 여행이 유토피아를 향한 모험이었다면, 3월 27일부터 시작하는 두 번째 여행은 ‘친밀한 삶’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영화는 우리가 모르는 가족, 커플, 개인들의 내적인 삶에 근접하게 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 심지어 몸에 친밀감을 갖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영화관 또한 여전히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친밀한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은 그런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입니다. 영화는 무엇보다 인물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합니다. 모파상의 소설을 영화화한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의 <여인의 일생>이나 전후 일본사회에서 단독적인 개인을 그리려 했던 마스무라 야스조의 <아내는 고백한다>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빛과 그림자가 실은 우리 삶의 눈부신 빛과 어둠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조셉 로지의 <하인>과 <사랑의 상처>는 인간의 어두움, 불안정함, 우발적인 사건, 계급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찰스 버넷의 <양 도살자>는 고된 노동과 흑인사회의 현실을, 모리스 피알라의 <대학부터 붙어라>는 학교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 성인과 청소년의 애매한 중간지대에 놓인 젊은이들의 삶을 담아냅니다.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과 안제이 바이다의 <철의 사나이>에서는 이런 현실에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는 몸짓과 만날 수 있습니다.

스크린에 그려지는 낯선 세계와 타자들의 친밀함은 경우에 따라서는 검열을 동반할 만큼 누군가에게는 위험스럽게 비쳐지기도 합니다. 아르메니아인의 독자적인 문화를 아름다운 색채와 독특한 공기로 담아낸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세 편의 영화는 그의 독특한 개성과 생활양식만큼이나 이단적인 영화미학을 선사합니다. 파라자노프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작가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작가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영화를 자신의 삶에 밀착시키는데, 가령 자크 리베트의 <미치광이 같은 사랑>에서의 광기, 필립 가렐의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의 사랑, 테렌스 데이비스의 <먼 목소리, 조용한 삶>에서의 사적인 삶의 기억들은 영화의 힘으로 삶이 새롭게 작동되도록 합니다. 이들에게 영화는 삶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주요한 수단입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소개한 영화 외에도 자크 베케르, 로베르 브레송, 알랭 로브그리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의 영화등, 총 19편의 작품이 상영됩니다. 또한 영화평론가, 교수들이 참여해 10여 편의 영화에 대한 충실한 해설을 준비하고 있어 생소한 작품들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 시네토크 CineTalk
3월 30일(금) 19:00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 상영 후 시네토크①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4월 1일(일) 13:00 <철의 사나이> 상영 후 시네토크② - 신동일(영화감독)
4월 5일(목) 19:30 <양 도살자> 상영 후 시네토크③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4월 7일(토) 13:30 <자유의 이차선> 상영 후 시네토크④ - 이용철(영화평론가)
4월 8일(일) 13:30 <거짓말하는 남자> 상영 후 시네토크⑤ - 정의진(상명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4월 13일(금) 19:00 <하인> 상영 후 시네토크⑥ –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학교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4월 14일(토) 16:30 <미치광이 같은 사랑> 상영 후 시네토크⑦ -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4월 15일(일) 16:00 <석류의 빛깔> 상영 후 시네토크⑧ - 홍상우(경상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
4월 19일(목) 19:30 <먼 목소리, 조용한 삶> 상영 후 시네토크⑨ –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4월 21일(토) 14:00 <게르트루드> 상영 후 시네토크⑩ – 한창호(영화평론가)

상영작

1.  황금 투구  자크 베케르  1952 | 프랑스 | 98min | B&W   
2.  여자의 일생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1958 | 프랑스/이탈리아 | 86min | Color   
3.  아내는 고백한다  마스무라 야스조  1961 | 일본 | 91min | B&W   
4.  하인  조셉 로지  1963 | 영국 | 112min | B&W   
5.  게르트루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1964 | 덴마크 | 117min | B&W  
6.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1965 | 소련 | 97min | Color   
7.  당나귀 발타자르  로베르 브레송  1966 | 프랑스, 스웨덴 | 95min | B&W  
8.  사랑의 상처  조셉 로지  1967 | 영국 | 105min | Color   
9.  석류의 빛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1968 | 소련 | 73min | Color 
10.  거짓말하는 남자  알랭 로브-그리예  1968 |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 100min | B&W 
11.  미치광이 같은 사랑  자크 리베트  1969 | 프랑스 | 252min | B&W/Color 
12.  자유의 이차선  몬테 헬만  1971 | 미국 | 102min | Color 
13.  대학부터 붙어라  모리스 피알라  1978 | 프랑스, 캐나다 | 86min | Color 
14.  양 도살자  찰스 버넷  1979 | 미국 | 83min | B&W 
15.  철의 사나이  안제이 바이다  1981 | 폴란드 | 153min | B&W/Color 
16.  수람 요새의 전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1986 | 소련 | 88min | Color 
17.  먼 목소리, 조용한 삶  테렌스 데이비스  1988 | 영국 | 85min | Color 
18.  클로즈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990 | 이란 | 90min | Color 
19.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  필립 가렐  1991 | 프랑스 | 98min | 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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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는 생전에 자신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 촬영감독 아츠다 유하루에게 “내 영화를 외국인들은 알지 못할 거야. 그건 무리가 아니지. 하지만 언젠가 그들은 일본 사람들이 앉아 있다는 사실, 우리에겐 낮은 카메라 위치가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하긴 내 영화에 그들이 큰 신경을 쓰진 않겠지만”이라 말했었다. 오즈가 이런 말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말은 현실화됐다. 1950년대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한 세 명의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중에서 그는 가장 뒤늦게 서구에 소개된 감독이었다.
서구인들은 구로자와의 <라쇼몽>이나 미조구치의 <우게츠 이야기>에 담긴 이국적인 정서에 매료되었다.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오즈의 영화는 너무나 일본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국적인 정서에의 과한 평가로 유럽과 미국은 70년대까지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단 서구의 일 만은 아니었다.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이마무라 쇼헤이를 포함한 60년대 일본 뉴웨이브 감독들은 오즈의 영화에 박한 평가를 보였다. 오즈의 영화가 봉건제와 보수적인 사회의 분위기를 지나치게 묵인하는 수동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오즈이즘’의 바로 그런 특징이 오즈의 영화가 지닌 위대성을 웅변하고 있다. 오즈의 영화는 우리의 시선을 달리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즈의 죽음은 기묘한 사건처럼 보인다. 그는 1903년 12월 12일에 태어나 1963년 그의 60번째 생일에 간암으로 사망했다. 탄생과 죽음의 기묘한 순환은 그의 무덤에 적힌 ‘무無’라는 글귀만큼이나 오즈 영화에서의 반복과 순환, 삶과 죽음의 닮은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계절과 날씨만큼 이런 반복과 닮음을 명증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일상적으로 날씨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그렇다고 계절과 날씨가 극적인 사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부초>를 제외한다면 그의 영화 대부분에서 하늘은 마치 자크 타티의 세계에서처럼 늘 화창하고 맑게 개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씨에 대한 언급은 끊이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성의 가장 평범한 표현들이다. 또한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의 태도처럼 오즈의 인물들이 자신을 둘러싼 대기의 흐름에 민감해 하기 때문이다.
오즈의 영화에는 ‘어떻게 대학을 졸업할 것인가, 어떻게 취직을 할 것인가, 어떻게 결혼을 할 것인가, 어떻게 노년을 준비할 것인가, 어떻게 장례식을 치를 것인가’등의 일상적인 질문들로 가득하다. 오즈의 작품은 마치 ‘일상의 범례’를 영화화한 것처럼 보인다. 오즈는 결코 이런 일상적인 질문들에 대한 명증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지만 일상의 문제에 직면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삶에는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이 있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무상하다. 인간의 선택은 제한되어 있다. 오즈의 인물들은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의 삶처럼 계절의 흐름에 맞춰 삶을 영위한다. 그런 점에서 오즈가 정해진 규칙에 순응하는 금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야만 아버지의 심정을 자주 다룬 오즈의 후기작에서 흐름에 역행하는 태도가 물론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안화>에서 아버지는 딸을 시집보내려 하지만 정작 딸이 애인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를 낸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딸의 결혼식에 참가한다. <만춘>이나 <꽁치의 맛>에서 딸을 시집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괴롭지만 그 때문에 그들이 답답해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더운 날씨로 여름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는 것처럼 인물들은 주위의 친구들을 보고 딸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여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짧은 옷을 꺼내놓고 선풍기를 닦는 것처럼, 아버지는 딸에게 맞는 신랑감을 찾고 딸을 시집보낼 마음의 준비를 한다.  .

오즈의 영화가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인물들의 이런 태도 때문이다. <피안화>에서 아버지는 몰래 결혼해서 살고 있는 딸에게 애증을 느끼는 친구와 닮아 있고, <꽁치의 맛>에서 히라야마는 딸의 혼기를 놓친 은사 사쿠마와 닮아 있다. 이런 인물들의 공감은 서로 닮은 태도와 자세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다. 오즈의 영화에서 공감은 둘이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란히 앉아 하나의 대상을 눈에 담는 몸짓을 통해 만들어진다. <동경 이야기>에서 노부부는 제방 위에 유카타 차림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은 비스듬히 옆에서 찍힌 두 사람의 등을 보여준다. 서로 나란히 앉아 마치 서로의 행동을 반복하듯 같은 동작을 연기하는 것만으로 공감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정서는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오즈의 마지막 작품 <꽁치의 맛>에서 히라야마가 딸의 결혼식이 끝난 뒤 찾아간 술집에서 노래를 들으며 홀로 앉아 있는 뒷모습이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히라야마의 뒷모습은 한없이 쓸쓸해 보인다. 이러한 인물의 몸짓은 도자기, 화병, 주전자, 심지어 공장의 굴뚝과 같은 삶의 느린 지속을 간직한 정물과도 같은 자세이다. 비록 오즈의 조감독을 했던 이마무라 쇼헤이가 배우를 인형처럼 고정시켜 놓고 세세한 몸짓까지 오즈가 지시하는 것에 분통을 터트렸지만 그 또한 부자연스러움과 제한된 선택을 통해 오즈가 감동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즈 영화의 서명과도 같은 또 다른 특징은 잘 알려진 낮은 위치의 카메라(로우 앵글)이다. 오즈는 늘 지면에 근접한 상태에서 대상을 촬영했다. 오즈는 아츠다에게 “당신도 알다시피 일본의 방에서 특히 구석에서 좋은 구도를 만들기란 정말 힘들어. 이걸 처리하는 최선의 방법은 낮은 카메라 위치를 이용하는 거지. 이렇게 하면 모든 일이 쉬워질거야”라고 말했다. 이런 낮은 위치의 카메라는 제한이나 엄격함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인물의 내부적인 시선과 삶의 지속을 반영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동경 이야기>에서 낮은 위치의 카메라는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중심인물이 나이든 부부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리고 서 있기보다는 대부분 앉아 있다. 많은 서구의 비평가들은 이런 오즈의 로우 앵글 쇼트를 금욕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예컨대 도널드 리치는 오즈가 영화적인 표현 수단의 방법들을 포기하고 가혹하리만큼 영화적 논평에 대한 수단들을 제한해 버렸다고 말한다. 즉 오즈가 고의적으로 그가 카메라의 제한된 스타일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오즈를 묘사하는 대부분의 서구 비평가의 표현은 ‘반복, 제한, 극단적인 구성의 경제성, 세심한 계산’ 같은 것이다. 그들은 오즈 영화의 특징이 일본의 미니멀리스트 미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일본의 하이쿠나 동양의 선사상을 통해 오즈에 접근한다. 그렇게 오즈의 신성화가 만들어진다.






언젠가 빔 벤더스는 ‘영화에서 신성한 보배와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오즈의 작품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성한 보배와도 같은 오즈의 작품은 어떻게 1950년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오즈는 1923년 쇼치쿠의 가마타 스튜디오 촬영 부서에 입사했다. 그는 3년 뒤인 1926년 감독 부서로 옮겼다. 군대 복무를 포함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가 촬영 부서에서 일한 경험은 이후 오즈 영화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오즈가 입사할 무렵 쇼치쿠 영화사는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당시 쇼치쿠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통적인 대중 연극, 특히 가부키를 제작하던 쇼치쿠는 1920년에 영화 제작을 시작했고, 미국에서 태어나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젊은 촬영 감독 헨리 코타니를 영입했다. 촬영 감독이었던 미도리카와 미치오는 헨리 코타니의 할리우드적인 촬영 테크닉을 받아들였다. 오즈가 쇼치쿠에 촬영 부서로 입사했을 때 미도리카와는 오즈에게 할리우드적인 영화 촬영 테크닉을 전수했다. 미국 영화를 즐겨 보았던 오즈에게 할리우드의 혁신적인 촬영 기법은 오즈 영화 형식의 적절한 뼈대를 제공했다.
오즈가 쇼치쿠에 견습생으로 입사했을 당시 아츠다 유하루 또한 촬영 부서로 들어왔다. 당시 쇼치쿠에서는 두 개의 대립적인 스타일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나는 할리우드적인 스타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니카추에서 만들어진 일본의 전통적인 스타일이었다. 아츠다는 미도리카와의 보조로 일하면서 할리우드적인 촬영 테크닉을 배웠다. 오즈와 아츠다의 협력 관계가 이미 심정적으로 1920년대 중반에 마련되고 있었던 셈이다. 나중에 아츠다가 오즈의 촬영 감독이 됐을 때 그는 오즈의 스타일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아츠다는 오즈가 즐겨 사용하는 독특한 로우 앵글 쇼트를 위한 특별한 삼각대를 고안했을 뿐만 아니라 촬영지를 물색하거나 세트 촬영에서의 제반 준비를 오즈가 원하는 방식으로 준비했다. 심지어 아츠다는 자신이 오즈처럼 생각하고, 오즈처럼 보고, 오즈처럼 행동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아츠다는 오즈의 단순한 촬영 감독이 아니라 오즈 영화의 뼈대를 형성한 든든한 동료이자 후원자였다. 오즈는 1950년대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견고하게 뒷받침 해주는 완벽한 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예술감독, 편집자, 배우 등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할리우드의 표준화된 제작 시스템처럼 재빨리 움직였다. 그런 점에서 1950년대 오즈의 걸작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기적도 신성한 사건도 아니다. 오즈의 영화는 그가 즐겨 사용한 낮은 위치의 카메라처럼 견고하게 지면에 뿌리박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의 영화 평론가인 사토 다다오는 서구인들이 오즈 영화에서 보여지는 정적인 감각을 가장 일본적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일본에는 한 명의 오즈 야스지로가 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오즈를 모방하거나 오즈를 따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즈는 일본에서 스스로 ‘고립된 천재’였던 것이다. 사토 다다오는 오즈가 분명 일본적인 감독이었지만 오즈의 영화를 민족성에 근거해 이해하려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차라리 오즈의 영화를 이해하는 좋은 태도는 ‘세계 영화의 조류’에서 어떻게 오즈의 영화가 구별되는가를 분류하는 것이다. 오즈를 영화에서의 정신적인 본질을 추구한 드레이어, 브레송과 연결시킨 폴 슈레더의 논의는 비록 오즈 영화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있지만 오즈를 일본적인 구도에서만 이해하려는 편견에서 벗어난 흥미로운 사례 중의 하나이다. 들뢰즈 또한 오즈를 미조구치나 구로사와와 달리 네오리얼리즘, 누벨바그 등과 함께 현대 영화의 새로운 시작점의 작가로 위치시킨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시도는 일본의 평론가인 하스미 시게히코의 평가일 것이다. 하스미는 <감독 오스 야스지로>에서 ‘오즈다운 것’과 ‘오즈 야스지로’를 비교하며 오즈다운 것에서 벗어나 오즈의 영화를 제대로 볼 것을 제안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즈답다’라고 말할 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부정과 결핍의 언어이다. 예컨대 이동 촬영을 배제하고, 플롯을 배제하고, 배우의 연기를 억제할 때 오즈다운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결핍과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충만해 있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하스미는 오즈의 엄격함이 제한과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지닌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즈는 영화가 지극히 부자연스런 매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하는 눈동자를 보여줄 수는 있지만 시선을 보여줄 수는 없다.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은 상대방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서로 시선이 교차되는 법은 드물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오즈의 영화에서 보이는 기묘한 시선에 대해 “한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면 사실 거기에는 상대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여 버린다”고 표현했을 때 이 시선의 어지러움은 영화 매체가 지닌 한계에 대한 자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오즈의 낮은 카메라 위치 또한 영화를 보는 관객의 위치(관객은 앉은 자리에서 영화를 본다)에 대한 자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말할 수도 있다. 선입견에서 벗어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러므로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김성욱)

* 이 글은 2001년 1월에 열린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에 맞춰 ‘필름2.0’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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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osmosmachina 2017.06.01 02:46 신고

    잘 읽었습니다

라울 루이즈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외국의 영화잡지에 부고란이 있을 정도로 요즘 들어 우리 시대(지난 세기의 절반 이후의 작가를 그렇게 말하고 싶다)의 거장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와 더불어 영화제에서 그의 영화를 만나는 일이 가장 기쁜 일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 그런 즐거움과 기쁨 하나가 사라졌다. 한 작가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라 말한다. 루이즈의 경우에는 더 많은 세계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가 구축했던 것이 복수성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누신젠 하우스>를 보았을 때 G.V.에 라울 루이즈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던 탓에 잠시 착각을 했던 일이 생각난다. '설마'하면서도 영화가 끝난 후의 G.V.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만 등장했다. 그래도 그녀가 말한 에피소드 하나가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라울 루이즈 감독의 일과 중의 하나가 도서관에서 고문서들을 뒤적거리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중세 시대의 마녀 재판, 사건 일지, 범죄 기록 등을 읽는다고 했다.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그런 사건들을 배우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단다. 가늠할 수 없는 기이한 세계의 융합이 그런 먼 곳의 세계를 조사하는 이상한 독서와 탐구에서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2006년에 '라울 루이즈 회고전'을 기획했었다. 아래의 글은 '회고전'에 맞춰 지금은 없어진 '필름 2.0'에 썼던 글이다. 이 다산의 작가를 소개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몇 편의 주요작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 이후에 나온 루이즈의 신작들 대부분은 영화제를 통해 상영되었고 몇 편은 개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작품들과 재회하기란 쉽지 않다. 2006년 이래로 루이즈의 회고전을 다시 해볼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그가 빨리 세상을 떠났다.
라울 루이즈는 영화에 관한 대표적인 두 권의 책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의 시학'이란 제목으로 두 권을 저술했다. 그의 독특한 바로크 미학을 담아낸 책으로 영화감독이 저술한 영화론으로서는 타르코프스키의 저술에 필적할 만하다. 루이즈의  책의 서문 말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나의 책은 일종의 여행이다. 그런데 여행자들은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안내하는 길이 또한 여행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루이즈의 영화 또한 그러했다. 이제 그가 진정으로 낯선 세계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김성욱. 2011/08/20)   

 



꿈의 원근법, 라울 루이즈의 세계[각주:1]

T.S. 엘리엇은 ‘알지 못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지의 길을 이해해야 한다’라는 말을 했었다. 이는 라울 루이즈의 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게도 어울리는 적절한 교훈이다. 가령 그의 영화는 복잡한 미로와도 같아서 좀처럼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거나 인식의 지도를 그리기가 쉽지 않다. 그의 영화를 몇 편 접한 관객들이나 영화 애호가들에게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에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1941년, 칠레에서 태어난 라울 루이즈 감독이 지금까지 만든 영화 편수는 백여 편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직 신만이 그의 전작을 보았을 것이라는 농담이 나돌기도 한다. 그럴 정도로 루이즈의 영화는 너무 많고, 또 보기가 쉽지 않다. 60년대 칠레에서 그가 만든 영화를 논외로 하더라도, 그리고 1978년작인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을 새로운 출발점의 영화로 상정하더라도 이후 그가 한 해에 6편 정도의 속도로 작품을 만들어온 것을 감안한다면 일단 그의 세계 전체를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조금 용기를 내어 시네마테크에서의 회고전을 빌어 이 미지의 작가가 만들어 놓은 복잡한 미로에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위대한 미로의 창조자가 또한 위대한 영화의 창조자였던 것처럼 라울 루이즈의 미로는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가 칠레에서 70년대에 망명한 영화감독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라울 루이즈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으며 1960년대에 영화작업을 시작했고 70년대 초에는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영화고문으로 활동하다 피노체트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망명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는 유랑의 작가였다. 이 때부터 그는 1년에 여섯 편 정도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작업의 기회를 받아들이면서 마치 B급 영화감독처럼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즈는 "나는 B급 영화를 통해 모든 것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그가 로저 코먼과 영화작업을 함께 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저예산에 다수의 작품으로 제작의 위험을 줄이면서 한 편의 예술작품보다는 작품의 총량으로 영화의 역사에 기여하려 했던 B급 영화감독으로서의 라울 루이즈의 노력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작품의 내용 이상으로 그것이 만들어지는 조건과 다양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다산성은 일치감치 그의 작품의 범주화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게다가 루이즈의 영화는 관객들을 어리둥절케 하는 이야기로 혼란에 빠지게 한다. 그의 영화는 종종 ‘초현실주의’, ‘마술적 리얼리즘’ 혹은 ‘바로크적인 영화’로 불린다. 루이즈 스스로는 ‘초현실주의’보다는 ‘바로크적’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는데, 이는 초현실주의의 스테레오타입과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바로크적인 ‘알레고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루이즈에게 영화란 유령, 좀비, 사자(死者)들이 거주하고 출몰하는 알레고리적인 시스템에 가깝다.




망명과 월경의 경험은 루이즈의 작품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월경의 경험은 물리적인 거리와 시간을 융합하는 특별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의 영화가 이러한 경험을 반영한다. 루이즈의 영화에서는 종종 멀리 떨어진 공간, 혹은 서로 다른 시간, 심지어 서로 다른 삶이 서로 가까워지면서 확대되고, 충돌하고, 융합하고, 상호침투하면서 일종의 도착적인 세계가 만들어진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세계란 거대한 희극이면서 동시에 악몽의 세계이기도 하다. 의혹과 배반, 속임수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가령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이나 <세 개의 삶과 하나의 죽음>, 그리고 <꿈속에서의 사랑싸움>과 같은 작품에서 우리는 사물, 공간, 몸이 더 이상 단일성이 아닌 복수성의 세계에 거주하며 내부와 외부, 상상과 실재, 감각과 환각 사이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넘나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하면 라울 루이즈는 영화에서 새로운 시공간의 원근법을 시도했다. 아니 꿈의 원근법, 혹은 감각의 원근법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라울 루이즈는 현실과 꿈, 기억과 경험 간의 복잡하고 파악하기 힘든 불일치성, 그것의 틈에 주목한다. 그의 영화에서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 한 인물에 다른 인물이 연결되고 중첩되고 분기하면서 두 번째, 세 번째 이미지와 이야기, 새로운 인물이 탄생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부뉴엘의 초현실주의 영화에 펠리니의 상상이 만나면서 여기에 알랭 레네식의 기억의 출현이 도래하는 듯한 형국이다. 그의 영화는 삶의 길 위에서 알수 없는 어두운 숲과 마주하는 듯한 체험을 하게 한다. 우리를 목적지로 안내할 똑바른 길은 사라져버렸다. 이제 삶은 미로처럼 굽은 길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우리 앞의 세계는 마치 눈속임 그림처럼 허위와 속임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실로 영화적인 것이 아닌가. 영화는 일종의 환각기계이며 속임수 장치이고 끊임없이 꿈같은 유령들을 생산해낸다. 루이즈에게 삶은 또한 거대한 꿈이다. (김성욱)






주요 상영작 소개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 L'hypothèse du tableau volé 1979 프랑스 B&W 66min
출연: 장 루즐, 가브리엘 가스콩, 안 드부아, 샹탈 팔래, 알릭스 콩트, 장 르노, 장 나르보니
70년대 루이즈의 영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19세기 파리에서 도난당한 그림에 관한 의미를 둘러싸고 외화면의 음성과 수집가가 논쟁을 벌이는 독특한 영화다. 피에르 클로솝스키의 작품을 원안으로 ‘활인화’를 통해 영화와 회화를 대조시키며 일종의 눈속임그림 같은 영화의 환각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고래 위에서 Het Dak van de Walvis 1982 네덜란드 Color 90min
출연: 빌레케 반 아믈루이, 장 바댕, 페르난도 보르두, 에르베 퀴리엘, 루이스 모라
루이즈의 영화 중 가장 지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논란적인 영화. 파타고니아의 마지막 종족에게서 언어를 배우려 노력하는 인류학자의 곤경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나 드라마 못지않게 유머가 넘치는 대사와 컬러에서 세피아톤으로 변하는 화면이나 시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앙리 아르켕의 독특한 촬영 또한 뛰어나다. 

  
해적들의 도시 La ville des pirates 1984 프랑스/포르투갈 Color 111min
출연: 위그 케스테르, 안 알바로, 멜빌 푸포, 앙드레 앙헬, 두아르테 드 알메이다
외딴 섬에 위치한 성을 무대로 배회하는 유령들이 광란의 섹스와 카니발을 벌인다. 루이스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의 <황금시대>와 프리츠 랑의 <문플릿>, 그리고 <피터 팬>과 <보물섬> 등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로 루이즈의 초현실주의, 환상성의 정점을 보여주는 신비하고 매혹적인 영화다. 

 
세 개의 삶과 하나의 죽음 Trois vies et une seule mort 1996 프랑스/포르투갈 Color 123min
출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안 갈리에나, 멜빌 푸포, 키아라 마스트로얀니, 아리엘 동발
90년대 루이즈의 ‘양질의 영화’로의 변모를 보여주는 전환점의 영화로 마스트로얀니와 같은 유명스타들을 기용해 ‘천일야화’와도 같은 이야기 안의 이야기, 분기하면서 되풀이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20년을 살다 집에 돌아가 죽는 남자, 거지가 되는 부자, 갑자기 유산을 상속받는 젊은 커플 등의 이야기에 한 남자가 부랑자, 교수, 하인의 세 번의 삶을 동시에 살게 되는 현실과 환상의 불일치가 기입되어 있다.


범죄의 계보 Généalogies d'un crime 1997 프랑스/포르투갈 Color 114min
출연: 카트린 드뇌브, 미셸 피콜리, 멜빌 푸포, 베르나데트 라퐁, 마티유 아말렉
20세기 초, 비엔나의 아동심리학자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정체성의 전이의 과정이 스릴러 장르의 형식을 빌어 표현된다. 변호사인 솔랑주는 르네의 범죄를 변호하게 되는데, 르네는 이 과정에서 솔랑주를 자신의 죽은 숙모로 받아들이고 솔랑주 또한 르네를 자신의 죽은 아들로 이해하게 된다. 


되찾은 시간 Le temps retrouvé 1999 프랑스/이탈리아/포르투갈 Color 158min
출연: 카트린 드뇌브, 엠마누엘 베아르, 벵상 페레, 존 말코비치, 파스칼 그레고리, 키아라 마스트로얀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최종장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도저히 영화로 옮길 수 없을 것이라는 프루스트의 복잡한 시간과 기억의 이야기가 루이즈의 손을 빌어 매혹적으로 펼쳐진다. 카트린느 드뇌브, 엠마뉴엘 베아르 등 프랑스의 명배우와 존 말코비치의 연기가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꿈속의 사랑싸움 Combat d'amour en songe 2000 프랑스/포르투갈/칠레 Color 120min
출연: 엘자 질버스타인, 멜빌 푸포, 크리스티앙 바딤, 랑베르 윌슨, 마리 프랑스 피시에
루이즈의 영화 중 가장 착란적이고 복잡한 영화로 어떤 지각의 기준점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끊임없이 넘나들게 하는 체험을 선사한다. 의심에 사로잡힌 신학생의 이야기, 신비로운 마술적 힘에 빠진 화가, 은총과 자유의지 간의 충돌에 대한 신학적 논쟁 등, 아홉 가지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서로 겹치면서 복잡하게 전개된다.


두 어머니의 아들-순수의 연극 Comédie de l‘innocence 2000 프랑스 Color 100min
출연: 이자벨 위페르, 안 발리바르, 샤를 벨링, 닐스 위공, 에디트 스콥, 드니 포달리데스
아홉 살의 생일을 맞은 카미유는 그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그녀의 자식이 아니라며 진짜 어머니를 찾아 나서겠다고 선언한다. 19세기 이탈리아인 마시모 본템펠리가 쓴 소설 <두 어머니의 아들>을 개작한 영화로 두 어머니를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 삶의 복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1. 2006년 4월에 '라울 루이즈 회고전'을 기획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글은 당시'필름 2.0'에 썼던 라울 루이즈의 영화세계를 소개하는 짧은 글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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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I.P 2011.08.20 20:46 신고

    명복을 빕니다.
    당시 회고전에서 <세 개의 삶과 하나의 죽음> 을 너무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생생한데요...

지난해부터 시네마테크에서는 21세기 우리 시대의 영화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2009년에는 최근 프랑스 영화들과 스페인 신예감독들의 영화를 소개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올 5월 '개관기념 영화제'때에도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21세기에 나온 걸작선을 상영했습니다. 10 9일부터 17일까지 기간에는  8일간 2000년 이후에 발표된 동시대의 수작들을 소개하는 ‘21세기 우리 시대의 영화 특별전’이 또한 열립니다. 이 기획은 11월에도 이어져, 21세기 아시아 영화들을 조망하는 큰 특별전이 열릴 계획입니다.(H)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그간 교육적, 문화적 목적으로 시대의 고전을 상영하는데 애써왔다. 하지만, 21세기 이후 여러 가지 조건으로 우리 시대의 영화들은 어쩌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식 하에 지난 5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개관 8주년을 맞아, 21세기에 새롭게 나온 영화 중 상업성이 적다는 이유로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작품들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상영한 바 있다. 이 특별전에서는 21세기에 문을 연 서울아트시네마와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영화들을 소개하면서, 왜 동시대의 영화들이 극장을 통해 안정적으로 상영되지 못하는지 생각해보는 장이었다이번에 여는 ‘21세기 우리 시대의 영화 특별전은 이 연장선에 있는 기획전으로 2000년 이후 10여 년간 제작된 근작 중에서 안타깝게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되지 못했거나, 극장에서 빠르게 사라져 버린 작품 중 영화사적으로 깊은 가치가 있고, 관객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되새겨볼 만한 작품 총 12편을 선정하여 상영한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허우 샤오시엔이 스스로 ‘현대 3부작’이라 부르는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인 <밀레니엄 맘보>를 비롯해 세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된 그의 최고의 걸작 <쓰리 타임즈>, 그리고 황량한 사막으로 하이킹을 떠난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구스 반 산트의 <제리> 등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제리><엘리펀트>(2003), <라스트 데이즈>(2005)로 이어지는 이른바 ‘죽음의 3부작’의 시작점에 놓인 작품이다.



 

이외에도 사회적 약자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문제를 관찰적 시선으로 꾸준히 보여주고 있는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 멕시코 영화계의 차세대 주자인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작품으로 인간의 절제된 감정을 아름다운 영상 속에 담은 수작 <침묵의 빛>, 백지상태의 주인공이 감옥이라는 비정한 공간 속에서 나름의 배움을 통해 성장하는 드라마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자크 오디아르의 2009년 작 <예언자>를 상영한다. 또한, 주로 철학적이고 사색적으로 삶과 죽음 등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다뤘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단 하나의 쇼트로만 이루어진 놀라운 영화 <러시아 방주>가 소개되며, 이 영화 상영 후에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이후 러시아 영화를 계승한 감독으로 평가 받는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영화세계를 이야기하는 시네토크도 열린다.

 

한편 이번 특별전 상영작 중에는 후원사인 영화진흥위원회 라이브러리 작품으로 허우 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 짐 자무시의 <브로큰 플라워>,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작품들은 선착순 무료 상영된다. 이번 특별전은 옛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시네마테크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동시대 영화를 함께 보고 현시대의 영화적 문제를 재조명해볼 수 있는 뜻 깊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대의 걸작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21세기 우리 시대의 영화 특별전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 및 상영시간표는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www.cinematheque.seoul.kr)에서 확인 가능하고, 지정 인터넷 예매소에서 인터넷 예매도 가능하다. 문의 02-741-9782.

★시네토크

10 15() 19:00 <러시아 방주> 상영 후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세계 - 정미숙(러시아 국립영화대학 예술학 박사)

*앞서 상영하는 작품을 보신 관객들에게 참여 우선권을 드리며, 자리가 남을 경우 선착순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 상영작 목록 ( 12)




밀레니엄 맘보
千禧蔓波 / Millennium Mambo

2001 105min 대만/프랑스 Color 35mm 18세 이상 관람가

연출: 허우 샤오시엔 Hsiao-hsien Hou

 


제리 Gerry

2002 103min 미국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연출: 구스 반 산트 Gus Van Sant

 

 

 

러시아 방주 Russkiy kovcheg / Russian Ark

2002 88min 러시아/독일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연출: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Aleksandr Sokurov

 

 

 

쓰리 타임즈 最好的時光 / Three Times

2005 129min 프랑스/대만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연출: 허우 샤오시엔 Hsiao-hsien Hou

 

 

 

 

브로큰 플라워 Broken Flowers

2005 105min 미국/프랑스 Color 35mm 18세 이상 관람가

연출: 짐 자무시 Jim Jarmusch

 

 

 

히든Caché / Hidden

2005 117min 프랑스/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미국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연출: 미카엘 하네케 Michael Haneke

 

 

 

 

더 차일드 L'Enfant / The Child

2005 100min 벨기에/프랑스 Color 35mm 12세 이상 관람가

연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Jean-Pierre Dardenne, Luc Dardenne

 

 

 

 

마음 Coeurs / Private Fears in Public Places

2006 120min 프랑스/이탈리아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연출: 알랭 레네 Alain Resnais

 

 

 

 

 

침묵의 빛 Stellet licht / Silent Light

2007 136min 멕시코/프랑스/네덜란드/독일 Color 35mm 18세 이상 관람가

연출: 카를로스 레이가데스 Carlos Reygadas

 

 

 

 

도쿄 소나타 Tokyo Sonata

2008 120min 일본/네덜란드/홍콩Color 35mm 12세 이상 관람가

연출: 구로사와 기요시 Kiyoshi Kurosawa



 

 

시리어스 맨 A Serious Man

2009 106min 미국/영국/프랑스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연출: 에단 코엔, 조엘 코엔 Ethan Coen, Joel Coen

 

 

 

 

예언자 Un prophète / A Prophet

2009 154min 프랑스/이탈리아 Color 35mm 18세 이상 관람가

연출: 자크 오디아르 Jacques Audiard

 

 

* 시간표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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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작가를 만나다’에서는 오랜만에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를 함께 보고 정재은 감독과의 대화를 갖는 시간을 가졌다. 섬세한 터치로 휘청거리는 청춘 군상을 영화 속에 담아내왔고, 이제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정재은 감독과 함께한 9월 ‘작가를 만나다’의 현장을 담아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고양이를 부탁해>는 감독님께도 관객들에게도 각별하게 기억되는 영화일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21세기의 한국 영화의 베스트로 꼽는 영화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2001년에 영화가 나오고 9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떻게 이 영화를 데뷔작으로 만들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정재은(영화감독): 그때는 제가 영화 현장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현장에 대해선 잘 몰랐습니다. 당시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이구동성으로 프로듀서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하곤 했어요. 특히 해외에서 그런 얘길 많이 들었죠. 어떻게 보면 영화적이지 않고 기본적인 이야기 자체가 뚜렷하지 않은데, 이런 영화의 제작을 결정한 제작자나 프로듀서가 훌륭하단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전체적인 한국영화의 분위기가 새로운 영화, 새로운 시도를 반기는 분위기였고, 문화적 분위기 자체가 그런 것을 전반적으로 지지해주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이 돼요. 제가 영화를 전공하고 나서 제작 경험을 하고 싶은 생각에 <여고괴담2>의 스크립터로 참여했었어요. 그 영화를 하면서 학교라는 공간에서만 있다 보니 내가 영화를 찍는다면 이렇게 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다음의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졸업 작품을 찍으면서 인천을 갔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인천이라는 공간 자체가 이국적이고 멋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 때 저와 단편 영화를 찍던 배우가 제게 고양이를 맡긴 일있었었죠. 그러한 일들이 엮여져서, 인천을 배경으로 고등학교 졸업을 한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컨셉으로 만들어지면서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데뷔작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김성욱: 일본의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영화에 대해 글도 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는 두 종류의 영화감독이 있다면서 뭔가 있을 것 같은 것을 만드는 감독이 있고 전혀 존재할 것 같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는데, 후자가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같은 영화라면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도 그와 같은 영화라 말합니다. 그만큼의 호평을 받을 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에서 인천이라는 공간 자체와 인천에서 서울로 버스를 타고 오면서 풍경이 바뀌는 장면, 태희와 지영이 돌아다니는 공간 등 여러 공간들이 등장하는데 각각의 공간들은 어떻게 발견을 하시고 영화에 담아내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정재은: 사람들은 제가 인천을 잘 알고 있어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는 인천에 대한 첫 인상이 좋았기 때문에 일단 그 공간에서 무얼 찍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영화에 담은 인천은 구도심 중심의 지역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인천은 훨씬 더 넓고 광범위한 공간인데, 이상하게도 인물들의 동선이랄지 인물들이 방문하는 곳, 움직이는 경로를 영화에 담겨진 구도심 지역에서 머무르며 그 안에서 모두 해결하게 되었어요. 당시 저에겐 그런 풍경들이 낯설기도 하고 멋있고 찍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사는 공간과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주 어릴 적 살던 공간과 비슷한 면도 있었죠.


김성욱: 영화에서 몇 가지 사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다른 효과를 주곤 합니다. 칼이나 휴대폰의 경우도 있고, 넓게 이야기하자면 영화의 제목에 나오는 고양이도 그렇고, 각각의 특정 사물들이 반복 변주되는 부분들이 눈에 띕니다.
정재은: 실제로 영화의 인물들을 생각하면서 각각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사물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똑같은 사진이더라도, 지영의 집에 걸려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았던 공간이기도 한 오래된 인천의 풍경 사진, 혜주의 자기 자신의 사진, 태희의 가족사진처럼, 세 인물에게 각기 다른 사진을 설정해 배치했죠.

관객1: 중학교 때 처음 이 영화를 봤어요. 그 땐 잘 몰랐는데, 이제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서 다시 영화를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영화의 음악은 어떻게 선택하신 건가요?
정재은: 당시 제가 모비 같은 일렉트로닉 음악을 좋아했고, 영화에도 그런 류의 음악이 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존의 음악감독 보다는 나의 정서와 맞는 사람을 찾고 싶어서 친구에게서 별을 소개받았어요. 별의 음악을 듣고 장면과 매치시킬 곡들을 고르게 되었어요. 특히 ‘진정한 후렌치 후라이 시대는 갔는가’라는 곡이 마음에 들었고, 영화의 감성과 감각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곡을 메인 음악으로 선택하게 되었어요. 별의 음악 외에도 M&F의 조성우 선생님과 협업을 한 곡들을 사용하게 되었죠.

관객2:
20대 초반에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땐 혜주 캐릭터가 밉게 보였는데, 다시 보니 좀 느낌이 다른 것 같습니다. 영화의 캐릭터들에 대해 좀 더 얘기듣고 싶습니다.정재은: 캐릭터라는 것이 절대적인 면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관계들 안에서, 복합적인 위치 안에서 상대적인 느낌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영화에서는 내 안에 존재하는 현실과 이상, 관계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캐릭터로 분리했다고 할 수 있어요. 캐릭터를 만들 때 극단적으로 한 가지 부분만 보이는 캐릭터보다는, 다섯 명의 관계 안에서 상대적이면서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예민한 특징들을 가지고 인물들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관객3:
영화에서 고양이를 주고받는 행위가 일어나는데, 인물들 사이에서 고양
이가 갖는 역할이 궁금합니다.
정재은: 이 영화가 그나마 장편영화의 형태를 갖출 수 있었던 건 고양이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 사실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지기 어려운 굉장히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화 안에서 고양이를 부탁하는 행위가 반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이야기들을 엮어가고 하나로 이어주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관객4: 캐스팅 비화가 궁금합니다. 이요원씨나 배두나씨 외의 다른 배우들은 지금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정재은: 처음에 이요원씨가 혜주 캐릭터를 싫어했어요.(웃음) 혜주를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미워할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조금만 현실적인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혜주에게 공감할 수 있고 그녀에게 느껴지는 연민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부분들을 이요원씨에게 설득을 했어요. 옥지영씨는 굉장히 쾌활한 성격이라 사실 이 영화의 캐릭터와는 전혀 상반되는 친구에요. 그래서 지영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많이 힘들어했던 면이 있었죠. 배두나씨는 처음부터 태희의 캐릭터를 맡았으면 좋겠다고 같이 생각했고 잘 어울렸죠. 비류와 온주의 캐릭터를 위해선 쌍둥이들 중에서 연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아야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이은주, 이은실이라는 친구들이 그 중에서 가장 구분이 어려운 쌍둥이였어요. 중국어 공부를 위해서 중국 유학을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웃음)

관객5:
혜주의 부모가 부부싸움을 하고 있고 혜주가 집에서 걸어 나올 때 등장하는 유리가 깨진 자동차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이 가족 내에서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설정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정재은: 혜주라는 캐릭터를 만들 때 자동차를 위주로 많이 생각했어요. 법원 장면에서도 원래 그렇게 자동차가 많은 곳이 아닌데 일부러 많이 배치했었죠. 그래서 아파트 앞 장면은 제가 사실 잘 찍고 싶었던 장면 중에 하나에요. 아파트 앞에 이유를 알 수 없게 검게 불탄 자동차가 있다는 설정이었는데, 그 장면을 찍으면서 애를 먹었어요.(웃음) 화면 상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불탄 자동차의 이미지에 대한 강한 느낌을 생각했어요. 가족에 대한 부분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양하게 설정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인물이 가족이라는 일차적인 집단 안에서 의식을 갖추게 되는데, 그 이후에 사회나 친구들 같은 이차적이고 사회적인 관계 안에서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고, 그런 틀 안에서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편이에요.

관객6: 캐릭터 설정을 하고나 촬영을 하실 때 어려운 점이 있으셨다면 어떤 건가요?정재은: 이야기 자체 보다 주변 환경이나 디테일한 묘사에서 사람들이 더 많은 생각을 해주길 바랬던 것 같아요. 다른 요소들을 가지고 이야기 이상의 것들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이를테면, 지영이와 연락이 안돼서 태희가 지영의 집을 찾아간다고 할 때 그걸 찍을 수 있는 방법은 수만 가지의 방법이 있을 거 에요.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저는 태희가 지영을 찾아가면서 그 동네에서 느끼는 낯섦, 가난한 풍경에 대한 느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특정한 이미지나 풍경의 묘사로 전달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이야기를 다른 차원에서 전달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관객7: 화면 구성이 특별한데, 그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셨나요?
정재은: 제작 초기에 인물들에 대해서 기계적으로 배분한 면이 있어요. 혜주는 연립아파트, 자동차, 가죽이나 모피 느낌의 질감이나 이미지를 생각했고, 지영은 예전 달동네 같은 느낌, 단순하고 반복적인 이미지를 갖고 어디로 탈출해야할지 모르겠는 그런 느낌을 생각했고, 태희 는 자연, 나룻배, 빈티지의상 하는 식으로 인물들의 히스토리를 기계적으로 분류하고, 일종의 컨셉츄얼한 작업을 했어요. 이미지, 컨셉에 좀 더 많이 힘을 쏟았던 것 같아요.

관객8: 영화를 볼 때마다 지영이 태희를 기다리고 함께 떠나는 엔딩을 참 좋아합니다. 엔딩을 만드는 과정이 어떠셨는지 궁금하고, 감독님이 가장 애착이 갖는 캐릭터가 궁금합니다.
정재은: 가장 마음을 주고 힘을 쏟았던 캐릭터는 혜주였어요. 다른 캐릭터보다 더 직접적이고 설명적으로 찍었던 것 같아요. 만들면서 관객들에게 가장 잘 이해받았으면 하는 캐릭터였어요.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끝내려고 그러냐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엔딩 장면에서 많이들 좋아해주신 것 같아요.(웃음) 고등학교 때는 혜주와 지영이 원래 더 친했지만, 왠지 모르게 사이가 멀어지면서 지영과 태희가 더 친해지게 되어서 둘이 함께 떠난다는 게 이 영화의 스토리인 셈이에요. 갈 곳이 없는 아이와 어디든 떠나고 싶은 아이가 만나 어딘가 떠난다는 것이 제가 생각했던 이야기였어요.

관객9: 혹시 속편의 계획이 없으신지, 그리고 감독님께서 영향을 받은 영화나 감독이 궁금합니다.
정재은: 속편 계획은 있어요.(웃음) 배우들도 흔쾌히 수락했는데, 당장은 아니고 제가 50세 정도 되었을 때 배우들도 중년이 되었을 때 <고양이를 부탁해2>를 찍어볼 생각이에요. (웃음) 이 영화를 찍었을 때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같은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집요하고 냉정한 부분에 감탄하고 굉장히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성욱: 마지막 비행기 장면 이륙 장면이 실제로는 착륙장면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요. (웃음)
정재은: 그 장면에 사연이 있어요. 사실 착륙하는 장면이 맞아요.(웃음) 편집을 마치고 봉준호 감독님께 영화를 봐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감독님께서 마지막에 비행기가 뜨는 장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원래는 들어있지 않던 장면이었죠. 그래서 지영이 공항에서 일하는 설정이 있다보니 지영을 배경으로 비행기가 착륙하는 장면을 찍어둔 게 있었고, 그 장면을 쓰게 되었죠.


김성욱: 최근에 어떤 작업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정재은: <태풍태양>이 끝나고 나서는 3,4년 동안 계속 시나리오만 썼었어요. 사실 그 전까지는 제가 찍고 싶은 장면들을 찍고 그걸 모아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어요. 시나리오를 잘 못 쓴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좋은 시나리오란 무엇인가라는 질문하면서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서 결국 느낀 건 영화는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세 번째 영화부터는 호러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래전부터 호러 영화를 찍고 싶었고, 제겐 중요한 목표였어요. 호러영화 시나리오들을 여러 편 썼지만, 상황이 맞지 않아 제작을 못한 상태였어요. 일단 지금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어요. 건축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한국의 건축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어요. 좀 더 긴 시간을 가지고 작업을 해서 1,2년 정도 좀 더 작업을 한 뒤 선보이려고 합니다. (정리: 장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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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7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데니스 호퍼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이지 라이더> 특별상영을 했었다. 상영 후에 했던 강연의 일부를 올립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올해 데니스 호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데니스 호퍼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무래도 <이지 라이더>가 아닌가 해서 이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라스트 부분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 장면의 파괴적 이미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동시대적으로는 1967년에 만들어졌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마지막 장면 또한 그렇다. <이지 라이더>와 같은 해에 나왔던 <와일드 번치>의 라스트 역시 상기된다. 이 두 영화의 라스트는 굉장히 느린 속도로 주인공들의 죽음을 그리며, 움직임이 정지된 순간의 느낌을 잡아낸다. 반면 <이지 라이더>의 엔딩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의 라스트와 더 비슷한 느낌도 있다. 이 영화의 라스트는 폭발과 거대한 파열, 파국으로 끝나게 되며 거기에 잇따라 갑작스러운 수직상승이 발생하게 된다. 카메라의 갑작스러운 충격적 이미지가 영화의 라스트를 장식하게 되면서 일종의 파국적 죽음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보면 파국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 직전에 피터 폰다가 매음굴의 내부를 걸어 다니다 ‘사망은 인간의 평판을 종결하고 그의 선악을 결정한다’는 글귀를 읽는 순간 오토바이가 파괴되는 엔딩의 장면이 플리커처럼 깜빡거리며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는 여러 번 그런 식의 플리커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런 순간엔 언제나 바로 뒤에, 혹은 조금 뒤에 벌어질 순간의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것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편집에서의 일관된 구조적 형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스스로를 할리우드의 박해받는 예수라 칭하며 다녔던 데니스 호퍼는 술과 마약에 찌들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태에서 편집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적처럼 편집본이 완성되어서 공개되긴 했지만 사실은 완성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점에서 비추어 볼 때 이 편집 상태가 섬세한 구조적 형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잠깐잠깐 보여주는 장면들은 시간의 혼잡성을 발생시키며 일종의 기시감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영화 전체를 흐르는 시간도 일관되게 나열되어 있지는 않다. 이를테면 영화의 라스트 부분에 나오는 묘지장면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화를 먼저 구상했던 사람은 피터 폰다였는데, 처음 이 영화를 떠올린 날 새벽녘에 데니스 호퍼에게 연락해서, “네가 연출하고, 나도 함께 출연해서 같이 영화를 만들자. 40~50만불 정도의 제작비를 끌어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그렇게 영화가 출발하게 되고, 첫 계약 후 착수금으로 4만불 정도의 돈을 받아서 가장 먼저 찍었던 것이 영화 바로 그 묘지에서 LSD에 취해있는 장면이었다. 그건 영화가 실질적으로 출발하기 전 단계에서 일시적으로 먼저 찍었던 장면이고 최종본에 들어갈지 말지도 나중에 판단하였다고 한다. 결국 영화가 전체적으로 공간의 이동에 따라 촬영된데 반해 묘지장면은 미리 촬영되었기 때문에 시간의 느낌도 조금 다르게 편성되어 있다. 또, 그런 면에서 파국을 예정해두고 여정을 완성해가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고로 죽음의 예견이란 단순한 편집효과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정된 수순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의 라스트에 대해서는 개봉 당시에도 굉장히 설왕설래가 많았다고 한다. 다시 이 장면을 떠올리면서 좀 다른 두 가지 점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먼저, 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는 낮과 밤, 또 한편으로는 운동과 정지라는 두 가지 지점이 결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낮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계속 돌아다니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한다. 특히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각성과 명찰의 순간이고 그전까지의 낮 시간에 움직여 왔던 여정이나 운동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이런 순간들은 영화 전체의 여정에 종교적인 순례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이들은 단 한 번도 집이라는 공간에 들어가지 못하고 순례자처럼 돌아다니게 되고, 아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탄생 직전에 집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서두에 말했듯이 당시에 데니스 호퍼가 자신을 박해받는 예수라고 여겼던 것을 고려해보면 이 영화 전체를 그런 식의 종교적인 순례기처럼 만들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빛이 반짝거리는 순간에 이들이 조금씩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털어내는 순간이, 어떤 움직임도 없지만 아주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특히 잭 니콜슨과 이 세 명이 이야기하는 순간이 가장 인상적이다. “자유를 그렇게 주창하지만, 사실 그들은 정말로 자유로운 놈들은 꼴도 보기 싫어한다”는 니콜슨의 대사는 이 영화의 핵심을 건드리는 발언이라고 느껴진다. 영화에는 이와 같이 낮이라는 시간과, 저녁의 어둠 안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불빛 안에서 각성과 명찰을 통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두 가지 지점이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이 파국적 지점에서 불꽃으로서, 모든 것이 폭파되는 행위로써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를 로드무비라는 여정의 영화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움직여 간다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운동의 선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몇 가지 선들의 교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여러 선들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오토바이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직선의 느낌이다.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직선의 선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헝가리 출신의 뛰어난 촬영감독인 라즐로 코박스에 의해 마치 우주공간을 활주하듯이, 그러나 대지를 떠나지 못하고 대지에 정박해있는 바퀴의 움직임으로 그려졌다. 그것이 낮 시간동안의 움직임의 여정이다. 그런 직선은 최종적 목적지인 플로리다, 혹은 뉴올리언스와 같은 정착지에 도달하면 끝나게 된다. 더 이상 움직여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직선과 동시에 그 직선들을 구부려나가는 둥그런 선의 순간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순간은, 히피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의 롱테이크 장면이다. 한 사람의 얼굴에서 카메라가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여가며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결국 최종적으로는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사람들은 수평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에 어떤 것을 두고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 기도의 순간에 있었던 사람들의 원형적인 배치를 카메라가 측면 트래킹을 이용해서 하나의 원형적인 움직임으로 보여준다. 그 움직임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여주고, 그것은 공동체적인 꼬뮌의 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영화의 라스트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직선과 원형으로 동시에 표현된다. 피터 폰다는 갔던 길을 원형적 선을 그리며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순환적인 선이 아니라 대결의 선이다. 그 대결의 충돌과 더불어 발생하는 것은 급작스러운 수직상승의 선이다. 그래서 직선과, 원형과, 수직의 선이 만들어지게 된다. 직선이 수평을 이루는 대지의 선이라면, 수직의 선은 상승과 하강의 선이라고 볼 수 있다. 몸과 오토바이는 충격에 의해 하강하여 바닥에 떨어지게 되지만. 영혼과 정신은 그 순간 상승적 국면을 맞게 된다. 그것은 로셀리니와 같은 감독들이 영혼의 물리학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을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와일드 번치>와는 조금 다르다. 앞의 두 편은 운동의 순간을 정지의 순간으로 바꿔버리면서, 시간을 지연시키고 포즈나 제스쳐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순간에 속도를 더욱 빨리 한다. 그래서 몸이 떨어지는 순간조차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상승효과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하강과 상승의 운동이 ‘중력과 은총’이라는 충돌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영혼과 정신성을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바로 직전에 피터 폰다가 읽었던 글귀에서도 그런 느낌은 존재한다. ‘사망은 인간의 평판을 종결하고 그의 선악을 결정한다.’ 그런 식으로 물리적 움직임의 몰락과 정신적인 영적인 것, 혹은 정치 사회적 내용이라는 것과 예술적 연결, 그 모든 것이 상승과 하강이라는 라스트의 더블운동의 순간에 발생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라스트 바로 직전의 모닥불 장면에서 등장하는 피터 폰다의 우리는 실패했다, 는 발언자체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서두에서 이미 파국을 선언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피터 보그다노비치나 데니스 호퍼 등 이 세대의 인물들이 최종적으로는 연출적 실패를 해나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성공의 선두에 있었던 사람들이 실패해나갈 것을 이미 직관적으로 예견하고 있었던 예언자적 영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예언자적 성격뿐만 아니라 일종의 도피를 끝낸다는 느낌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여기에 등장하는 히피나 두 명의 주인공, 잭 니콜슨 모두 각기 도피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니콜슨을 포함한 이들의 무리가 시골의 바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뜨는 장면은 그들이 현실 안에서 그들이 직접적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의도했든 아니든, ‘실패했다’는 발언에는 예언적 성격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도피주의의 시대를 끝맺는 의미를 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LSD나 환각으로 도망갈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해야만 하는 시대이다. 개인적으로, 자기가 태어났던 시대의 기운을 갖고 싶은 것일 수도 있는데,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영화들에 관심이 굉장히 많다. 그때는 어떤 새로운 희망이 등장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하여 60년대의 폭발이 단지 폭발로만 끝나버리고 그 이후로 이어지지 못했나하는 부분에 대한 관심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20대들로부터 무언가 새로운 것들이 생겨날 수 있지도 않을까 한다. 바꿔 말하면 세대적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60년대 영화들을 많이 소개하고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관된 맥락은 아니지만 그 무렵의 영화적 기운들을 지금 다시 끌어들여서 세대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를 두고 이야기 할 때는 계급적, 산업적 관점만이 아니라 세대적 관점이 대단히 중요하게 등장하게 된다. <이지 라이더>는 별 볼일 없는, 그러나 동시에 욕망과 열정이 들끓었던 그 세대가 만들어낸 집단적 합작품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개인의 작가에서 집단의 작가로 넘어가는 작업을 본의 아니게 만들어냈던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이 경우엔 일찌감치 와해되어 버렸지만 그런 작업이 하나의 운동체처럼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존 카사베츠처럼 아예 수공업적으로 영화를 만들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시스템 안에서 자기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일종의 ‘커머셜 오뙤르’가 될 것인가. <이지 라이더>는 그런 고민의 분기점에 있었던 작품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여전히 이야기 될 만한 가치가 있다. (정리: 박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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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특별 좌담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일본영화연구자인 히라사와 고를 초청,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오시마의 세계를 깊이 탐구해 볼 수 있는 특별 강연과 좌담을 마련했다. 지난 18일 오후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와 동아시아’란 주제로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진행 하에 히라사와 고, 변성찬, 후지이 다케시, 몬마 다카시 4명의 패널이 참석한 가운데 이어진 좌담은 오시마의 현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현장의 일부를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지금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도 진행되고 있는데 구로사와의 영화에 비하자면 오시마 감독을 이해하는 것에는 난제가 있다. 당대의 현실과 긴밀한 접속을 이뤄낸 작가였기에 지금의 관객들에게 수용의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런 난제가 역설적으로 동시대성, 현재성의 문제를 재고하게 한다. 히라사와 고는 오시마를 개인-작가보다는 ‘운동체’로 보았는데, 오늘은 그런 접속들, 즉 ‘오시마 커넥션’이라 부를법한 오시마와 동아시아라는 커넥션을 살펴보려 한다.

후지이 다케시(역사학자):
전후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살지만 아무 권리도 행사하지 못했다. 60년대 이후 재일조선인의 생활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는데,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 <교사형>의 모델이 된 이진우 사건이다. 1958년 8월에 여고생 실종된다. 전화가 와서 옥상에 가보니 여고생이 있었다. 여고생의 유품인 빗이 장례식에 배달되어 왔다. 이진우라는 재일조선인 소년이 체포당하게 되는데, 추리소설의 애독자일 것이라는 추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애독자였던 소년이었다. 공상했던 것을 실제로 옮긴 것이라고 하면서 사건이 성립되었다. 물증은 없었고 자백만으로 재판이 진행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한국에서도 60년 11월부터 있었는데, 4.19혁명 이후라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62년 7월에 다시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해 11월에 사형집행이 있었다. 이진우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을 자극했다. 한국에서도 영화화할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산됐다. 아마 유현목 감독의 작품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오에 겐자부로가 이와 관련한 단편소설을 썼었다. 그는 이진우라는 캐릭터에 관심을 보였는데, 일본의 장 주네로 본 것이다. 이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 사건을 조명한 게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이라 할 수 있다. 나로서는 <칼리가리박사의 밀실>과 유사한 것을 느꼈다. 교육부장은 칼리가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웃음) 세트장에서 표현주의적 배경으로 연극이 이루어진다. 이진우라는 소년을 구성하는 요소를 분해해서 다시 구성하는 영화로, 역사학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소재라고 본다.

히라사와 고(일본영화연구자):
오시마와 동아시아를 생각할 때 <잊혀진 황군>은 필수불가결한 작품이다. 오시마가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은 그가 쇼치쿠 영화사를 그만두어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기에 그랬지만, 다른 한편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막 등장했기에 표현의 폭이 더 자유로웠다. <잊혀진 황군>은 전후 일본이 부흥하는 가운데에 전쟁책임을 잊고 살았던 일본인에 대한 통력한 비판을 다뤘다. 1965년에는 <청춘의 비>로 한국 고아원을, 한국에서 촬영한 스틸사진으로 <윤복이의 일기>를, 1968년에는 대동아전쟁 당시의 일본, 미국의 뉴스 영상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1969년에는 모택동의 생애와 문화대혁명을 만들었다. 오시마는 일본이라는 범위에서 영화나 세계를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항상 한국을, 중국을 생각해 대문자의 일본과 민족을 비판해, 동아시아의 영화인, 지식인으로서의 영화를, 세계를 사고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몬마 다카시(일본영화연구자): 오시마를 우회로 해서 일본영화가 한국인을 어떻게 다뤘는지 말씀드리겠다. 오시마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다. 20세기 초의 일본 기록영화에서 먼저 조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을 소개하기 위한 것으로 왕실이나 아름다운 풍경들이 담겼다. 그러다가 조선인도 극영화에 등장하는데,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상호이해나 융화가 소박한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 크게 보면 국책영화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시기엔 비교적 호의적인 관점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두 가지 스테레오 타입이 생겼는데,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코미디 영화에서 실수하는 익살적인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 시기에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좋아하는 외국인 1위가 조선인이었다. 일제 침략기의 후반이 되면 황국신민으로 책임을 다하는 게 조선인에게 요구됨에 따라 국책영화에 나오는 조선인은 일본을 신뢰하고 협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인측의 바람이나 환상이었을 것이다. 이때까지 일본영화에서 조선인은 적대시되거나 노골적으로 차별받는 대상은 아니었다. 패전을 맞이해 그러나 영화계도 변화했다. 전쟁책임과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이 점이 영화에 반영됐다. 이 시기부터 70년대, 80년대까지 한국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두 가지 생겼다. 남한이나 북한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재일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들자면, 재일 한국인을 올바른 성실한 사람으로 그리는 것과 반사회적인 무법자로 그리는 것이 있다. 어딘가 극단적인 모습이다.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을 그린 것은 아마도 최양일의 <달은 어디에 떠 있나>가 처음일 것이다. 그 전까지 재일조선인은 특수한 존재였다. 오시마는 어땠는가 하면, 이러한 두 가지 입장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국이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매개였다. 조선이라는 것을 매개로 일본을 다시 보려고 했던 것이다. <교사형>을 통해 양쪽에 대한 비판을 봤을 것이다. 조선이나 한국은 60년대 일본인들이 잊고 싶었던 존재들이었다. 오시마는 일부러 제시를 하는 것으로 영하를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시마는 뛰어난 선동가였다. 그런 태도는 일관된 것이다. <잊혀진 황군>은 1963년 8월 16일, 즉 패전기념일 바로 다음날에 방영됐다.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에게 충격을 주기에 딱 좋은날이었다. <윤복이의 일기>가 개봉된 것은 65년 12월로, 그 직전 한일조약이 발효됐다. 이런 점에서 오시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김성욱: 1992년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오시마의 발언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그는 ‘일본인 제일의 결함은 우리가 과거에 다른 나라와 어떤 식으로 교류했는가를 완전히 잊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재일 한국인은 일본인의 거울이다’라고 말했다. <교사형>에서 나타나는 재일한국인의 얼굴은 그런 일본인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변성찬(영화평론가):
발표를 들으면서 한국영화에서 표상된 일본인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생각했다. 90년대 이전까지 한국인은 착하거나 나쁜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타입 중에 굳이 깡패가 아니어도 일본인이 등장하면 뭔가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부였다. 우리도 그런 문제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0년대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사실은 굉장히 낯설고 어렵다. 감정이입도 안되고 곤혹스러운 경험이 생각난다. <교사형>은 7년 전에 처음 봤는데, 가장 떠오르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에서 빛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중간까지는 대극점에 일본이 있는데, 마지막에 가면 일본이라는 호명이 국가로 바뀌면서 국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주인공 R이 장엄한, 영웅적인 패배를 맞는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런 것으로 보였다. 인간의 개인적인 욕망이 범죄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국가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서 처벌하거나 이럴 수 있는 것인가라는 전복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에 대한 질문으로 일종의 비약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오시마가 60년대 갖고 있었던 정치성의 강렬함 같은 게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후지이 다케시: 저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마지막에 일본이 국가로 바뀌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한국이나 조선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못 벗어난 채로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의 아이로 죽어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양쪽에서 완전히 버림받고 죽어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김성욱: <교사형>에는 다양한 영화적 표현방식이 눈길을 끈다. R은 일종의 산송장, 미이라에 가깝다. ‘데드 맨 워킹’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스틸사진들이 또한 활용되고 있다. 오시마는 <닌자 무예장>이나 <윤복이의 일기>에서는 완전히 정지된 이미지로 영화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했다. 연극적 재현을 스틸사진으로 병치하는 장면도 있는데, 이러한 충돌성의 느낌은 파솔리니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연극적 재연인데, 이것의 의도는 전혀 기억을 갖지 못한 R에게 기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이런 퍼포먼스를 거쳐 일본인 교도관들 모두가 재일 한국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영화말미에 ‘관객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관객들도 이러한 퍼포먼스에 참여하듯이 유도한다. <돌아온 술주정뱅이>들의 후반부에서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고 물어볼 때, 모든 이들이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교사형>의 마지막 장면이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R이 멈추는 그 지점에서부터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히라사와 고: <교사형>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교사형>의 예고편을 보면, 이 예고편은 아다치 마사오가 촬영했는데(그는 이 영화에서 경비과장으로 출연한다), 교사형 집행을 할 때 오미사 목에 줄을 걸고 연설하는 장면이 있다. ‘국가가 있는 한 우리는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국가가 있는 한 우리는 절대적으로 무죄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국가가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예고편에서 던지고 있다. 당시에 영화비평가로 모든 범죄가 혁명적이라는 테제를 제시한 사람도 있다. 이게 옳은지를 떠나서 계속 영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형>의 마지막에서 그가 밖으로 나가봤자 국가가 있는 한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상징적 장면이라 생각한다. <교사형>의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년>에서 떠돌이 일가는 계속 경범죄를 저지른다. 어딜가나 일장기가 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떠돌이 가족에게는 사실 국가가 상관없다. 그런데도 어딜 가나 국가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런 것을 더 발전시킨 것이 <도쿄전쟁전후비화>에 나오는 풍경들이다. 국가 권력이라는 것이 경찰이나 국회 같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풍경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시마가 <도쿄전쟁전후비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평범한 풍경들이다. <교사형>에서 시사했던 국가를 더 발전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교사형>에서 R이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과연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멈추고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김성욱: 오시마 영화의 커넥션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1960년대라는 시점에서 보자면 동시대적으로 베트남 전쟁, 중국의 문화혁명, 그리고 한국의 4.19 등의 정치, 사회적 격변이 있었다. 또한 천황제의 문제, 과거 식민지와 관련한 문제, 운동집단의 몰락 등의 다양한 사건들이 오시마 영화에 복잡하고 모순적인 접합을 이뤄내고 있다. 이러한 접속의 방식은 무엇일까? 동시대 유럽의 파스빈더는 과거 나치의 기억과 유대인 표상의 문제, 외국인 노동자 등의 문제를 영화에 담아냈다. 오시마는 이와 유사한 작업을 했지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히라사와 고: ‘접합’이라는 표현처럼, 오시마의 영화는 개인의 작가의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다. 항상 오시마는 작업을 할 때 집단을 형성해서 작업했다. 텔레비전이든 영화든 간에. 집단 속의 다양성이 있다. 다양한 사상들이 응축되어서 작품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때그때 일하는 비평가나 각본가의 사상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그때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순적인 접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를 찍은 것은 물론 오시마라는 감독이지만, 거기에는 그 때 당시의 운동 상황, 정치적인 상황이 논의를 통해서 어떤 방향이 생긴다. 그렇기에 충돌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오시마는 충돌을 포함해서 하나의 영화운동을 제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시마 같은 경우는 영화적으로 보자면 쇼치쿠 시기를 작가주의 시기, 이후를 지가 베르토프 집단과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몬마 타카시:
오시마가 60년대에 찍은 영화를 논의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 원인은 영화 속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히라사와씨가 지적했듯이 집단작업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여러 가지 요소로 조립된 작품으로, 깔끔한 논문처럼 정리되기 어렵다. 이 시기에 오시마가 만든 영화는 모순을 안은 채로 그 덩어리를 그대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질문을 던지고 선동하는 측면이 있다. 김성욱씩가 지적한 것처럼 퍼포먼스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돌아온 술주정뱅이>에 나오는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은 보고 있는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이다. <교사형>의 맨 마지막에 ‘관객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은 이미 관객이 영호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교사형>의 논의는 사형제도, 재일조선인 문제 등으로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일본인들이 잊고 지내고, 보기 싫은 부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그런 점에선 파스빈더와 비슷하다 생각한다.

변성찬: 60년대의 오시마는 영화운동을 한다는 의식이 제작방식이나 영화에서 분명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의식> 이후 <감각의 제국>부터 보면 일정한 변화가 보인다. 히라사와 고씨는 미시정치로의 전환이라고 말했는데, 거기서 연속성을 강조하느냐 단절을 강조하느냐 라는 점은 오시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절과 연속성,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히라사와 고 :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 같다. 물론 68적인 문제의식에서 본다면 <감각의 제국> 이후에 미시정치의 측면에서 오시마가 변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에도 그런 비판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감각의 제국> 이후에도 일본에서의 대문자 정치에 저항을 하려고 했던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8년 당시에 오시마는 자기 영화에 대해서는 ‘예감의 영화’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정치나 사회가 먼저 있고, 그것을 영화가 표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오시마는 자기가 만든 영화는 영화가 먼저 앞서서 정치를 예감한다고 생각했었다. 70년대 <도쿄전쟁전후비화>는 전쟁이 끝난 지점에서 이제 영화에 대한 의미를 바꿔가려 한 점이 보인다. <그 여름의 누이>를 마지막으로 동시대를 그리는 것은 그만 두었다. 역사를 거슬러 가고 있다. 예감의 영화라는 입장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다른 각도에서 동아시아를 재검토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68전후 시기의 영화라는 것이 큰 자극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데, <감각의 제국> 등이 역사적인 재해석이라는 관점을 주고, 그런 데서 자극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고하토>는 68시기에 찍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의 영화다. <고하토> 이후라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리: 김수현)

* 2003년에 이어 오시마 나기사의 두번째 회고전을 열었다. 이번에는 22편을 상영했다. 위에 올린 내용은 좌담의 극히 일부의 내용이다. 오시마의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를 다음에는 상영할 계획이다. 아마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오시마의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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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6일 저녁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지난 5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故곽지균 감독의 49제를 맞아 그의 명복을 비는 추모의 밤 행사를 가졌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와 서울예술대학 영화과 동문회가 함께 마련한 이 자리에는 그와 친분이 있던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뤄졌다. '가야할 먼 길'이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다시금 생전의 그를 추억했던 그 잔잔한 애도의 현장을 전한다. 

故곽지균 감독의 추모의 밤 자리에는 곽지균 감독과 친분을 맺었던 많은 영화인들과 서울예대 동문들이 다수 참석해 안타까움을 전했. 배창호, 이명세, 허진호, 김국형 감독을 비롯해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안성기, 강석우, 배종옥, 정보석, 지현우, 김혜선 등의 배우들이 함께 모여 곽지균 감독을 추모했다.


깊은
애도의 뜻을 담은 추모 행사는 3부로 진행되었다. 1부에는 간단하게 곽지균 감독에 대한 동료 영화인들의 애정과 그리움을 듣고 그를 기리는 순서가 마련되었다. 1부는 곽지균 감독의 후배들인 서울예대 영화과 출신 연기지망생(강홍렬, 김아림)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곽지균 감독의 49제는 오는 9 곽지균 감독의 추모 영화제가 끝난 직후 이행될 것이라고 전했다. 더불어 이번 추모의 행사는 49 전에 관객들과 영화인이 함께하는 깊은 자리가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본격적인 추모행사의 번째 순서로 곽지균 감독의 생전모습과 그가 만들어냈던 10편의 작품을 간단히 소개하는 비디오 클립이 상영되었다. 영상은 짧지만 곽지균 감독이 걸어온 길과 그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정리하고 회고할 있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뒤이어서는 곽지균 감독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영화인들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첫번째 추도사로 나선 이는 서울예대 부총장을 맡고 있는 정중헌 부총장. 그는 조선일보 기자 시절 곽지균 감독의 데뷔서부터 지켜본 기자 사람으로, 부음을 듣고 감독을 찾고 싶어도 거리가 멀어서 뵙지 못했는데 이렇게나마 영상으로 만나 뵈니 세월의 추억이 다시 새삼 떠오른다 짧은 감회를 전했다. ‘곽지균 감독은 나에게 아스라함, 아련함 같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정중헌 부총장은, 영화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감독의 영화 10편이 우리 영화사에 많은 자양분을 주었고 눈물과 회한을 간직하게 해주는 좋은 기록자의 면모를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번째 추도사는 겨울나그네로 연을 맺은 배우 강석우 씨가 바톤을 이었다. “ 극장에서 <사랑의 수잔나> 보았는데, 그때 진추하와 아비가 만나는 장면을 보며 이후 곽지균 감독님과 제가 극장에서 특별전으로 다시 만나는 상상을 했는데 이런 식으로 뵙게 줄은 몰랐다 상기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어 지금 생각하니 감독님이 어떤 분이었다는 영화로 증명이 되는 같다 곽지균 감독의 따듯한 정서가 있었기에 <겨울 나그네> 찍으며 힘들어 하던 당시 나의 소년적 감성이 위로 받고 이해 받을 있었다 말했다. 또한 그는 곽지균 감독을 ‘유리알 같은 분’이라 표현했다.

이어
감독의 <젊은 날의 초상> 출연했던 배우 배종옥씨가 마이크를 건네 받아 곽지균 감독에 대한 애정을 짤막하게 토로했다. 그녀는 곽지균 감독과 함께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주고 받던 순간들이 너무나 절실하게 기억난다 눈시울을 붉혔고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영화가 아름다운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주신 분이 감독님이었다는 배우 배종옥 씨는, 우리나라는 젊은 감독들에게만 많은 이야기가 주어지는지 안타까웠고 나이가 들어 좋은 작품을 만드는 감독들과 제작현장이 충분히 마련되지 못한 데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했다. 배종옥 씨에 이어서는 곽지균 감독의 스크립터, 코디네이터 등을 맡았던 프로듀서 박미정 씨가 추도사를 이어 갔다. 그녀는 '초여름에 길을 떠난 겨울 나그네'라는 문구가 너무 아름답고 처연하게 다가온다며, 대전 장례식장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많이 했고 정말 많이 울었다며 현장의 기억을 묘사했다. 또한 감독이 은퇴하면 제주도에서 우편배달부가 되고 싶어 했다는 말을 종종 했다며 분명 그는 하늘나라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국의 우편배달부가 되어 행복하고 편히 계실 것이라는 말로 추도사를 마쳤다.

그 다음
추도사는  <그해 겨울은 따듯했네>에서 조감독이었던 곽지균 감독과 함께 작업했고 그의 동료였던 배창호 감독이었다. 배창호 감독은 준비해온 원고를 수줍게 펼치면서 시를 읊듯 곽지균 감독에 대한 애도와 추억들을 조근 조근 읽어 내려갔다. ‘주머니가 텅텅 비었던 충무로 조감독 시절에 우리는 만났지만 모두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던 시절’이라며 과거를 추억했던 배창호 감독은 감독의 활약으로 인해 무사히 영화를 마칠 있었다는 감독의 무용담을 지금도 후배들에게 들려주곤 한다고 밝혔다. 한편 배창호 감독에 이어 1 행사의 마지막 피날레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극장을 찾은 배우 정보석 씨가 맡았다. 그는 항상 수줍게 웃고 맑은 눈동자로 따뜻하고 편하게 해주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옳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영화를 하면서부터 , 생각을 가지면서부터 갖고 싶었던 마지막 모습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며 감독의 명복을 빌었다.

감독과
배우, 영화인들의 간단한 조례가 이어진 후에는 곧바로 2 순서인 <겨울 나그네> 상영되었다. 곽지균 감독을 기리며 행사에 참석했던 배우와 감독들은, 1 행사가 끝나자마자 스크린과 가까이 자리를 잡고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를 보는 도중, 스크린을 마주하며 간간히 객석에서는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으며, 영화 상영 직후 배우들과 감독들은 잠시 동안 객석에 남아 <겨울 나그네>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나누기도 했다. 2 상영 이어진 3 리셉션 현장에는 부리나케 극장에 달려온 배우 안성기 씨의 모습을 보였으며, 배우 강수연, 박상민 곽지균 감독의 많은 ‘친구’들은 행사에 참여할 없는 대신 애도와 착잡한 심정을 전달했다. 아름답고 처연한 청춘 영화 <겨울 나그네> 상영 이후, 서울아트시네마의 로비에 모인 영화인들과 관객들은, 진정 ‘겨울 나그네’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다 작고한 곽지균 감독을 다시 추도하는 마음으로 극장을 가득 채웠다.


한편 이날 추모의 밤 행사를 시작으로 곽지균 감독의 추모영화제는 8일까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계속된다. (강민영)



* 뒤늦게 '추모의 밤' 행사 내용을 올립니다. '한 여름에 먼 길을 떠난 겨울나그네'라는 표현은 김국형 감독님이 제안한 것입니다. 배창호 감독님의 추도사를 듣다가 "곽감독...당신의 이런 선택에 대해서는 정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애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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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7월 9일부터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22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이 열립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군국주의 일본의 국가와 사회, 광기와 검열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한 지적인 감독으로 5-60년대 새로운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을 무렵, 가장 전위에서 서서 세계영화의 한 흐름을 주도한 감독입니다. 이번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에서는 쇼치쿠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걸작 <사랑과 희망의 거리>, <청춘 잔혹 이야기>, 60년대 일본열도를 뒤흔든 혁명운동에 대한 성찰이 담긴 <일본의 밤과 안개>, <신주쿠 도둑일기>, <도쿄전쟁전후비화>, 그리고 혁명적인 걸작인 <교사형>과 <의식>, 재일 한국인의 문제를 다룬 <윤복이의 일기>, <소년>, 성과 범죄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작품 <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 그리고 오시마 나기사의 팬들이라면 꼭 필름으로 보고 싶어하는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 , 그리고 그동안 소개될 기회가 없었던 <열락>, <일본춘가고>,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 <닌자 무예장>, <여름의 누이>, <막스 내 사랑> 등 22편의 영화가 상영됩니다.  

오시마 나기사는 전후 일본의 영화 지도를 완전히 뒤바꿔 버린 영화 감독입니다. 그는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전후 일본의 새로운 시대적 기운을 영화에 담아냈고, 유럽 예술과 문화, 그리고 5-60년대의 지적인 기운을 섭취 대담한 영화를 만들어낸 창조자였으며 평생 성과 폭력, 죽음 그리고 일본에서 터부시되는 이야기들과 당시의 검열을 테스트하기 위한 일련의 작품을 만들어내며 가차없이 일본의 국가와 사회를 비판한 혁명가입니다. 1959년 쇼치쿠 영화사의 중견 조감독이었던 오시마 나기사는 약관 27살의 나이에 연공서열을 무시하고 <사랑과 희망의 거리>의 감독으로 발탁되어 아버지의 세대에 반발하는 새로운 영화의 물결(쇼치쿠 누벨바그)을 만들어냅니다. 가난한 소년의 희망의 좌절을 그린 <사랑과 희망의 거리>, 현대적 청년들의 기성도덕에 대한 반발을 격렬하게 그려낸 <청춘 잔혹 이야기>, 오사카 빈민가 똘마니들의 삶을 그린 <태양의 묘지>, 60년대 미일 안보투쟁을 다룬 <일본의 밤과 안개> 등으로 오시마는 2차대전의 패배, 책임을 방기하는 아버지 세대에의 반발, 급진적인 좌파 세력의 옹호 등으로 일본 영화사상 이전에 없었던 놀라운 영화들을 만들어냅니다. 이 과격한 주장에 움찔한 쇼치쿠 영화사는 <일본의 밤과 안개>의 상영을 중지시켰고, 오시마 나기사는 그런 회사에 반발해 쇼치쿠를 그만두고 독립 프로덕션인 ‘창조사’를 세워 독립영화 제작과 배급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오시마 나기사는 이후 2차 대전 당시 추락한 미군 병사에 대한 시골 주민들의 증오를 통해 일본의 ‘범죄 행위’에 날카로운 비판을 담아낸 <사육>, 전쟁으로 인해 빈곤한 삶에 처했던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윤복이의 일기>,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분별할 수 없는 시대의 고통과 그런 세계를 뚫고 나가려는 젊은이들의 위풍당당한 행진곡 <일본춘가고>, 그리고 두 명의 일본인 소녀를 강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63년 사형 당한 재일 한국인 고등학생의 실화를 소재로 만든 <교사형>(1968)을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국가와 사회, 가족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감행한 오시마 나기사는 70년대에 들어 보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 성과 범죄에 대한 성찰과 인간이 긍정적 에너지를 표출하기 위해 성과 혁명을 결합한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1976년,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상영된 <감각의 제국>은 오시마 나기사의 명성과 그의 대중적 영향력을 세계에 알린 충격적인 작품입니다. 그는 일본에 군국주의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1936년을 배경으로 기성의 도덕과 멀리 떨어진 채 단지 섹스와 사랑만을 추구한, 일본 연애사에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던 ‘아베 사다 사건’을 소재로 남녀의 사랑을 격렬하게, 하지만 매우 슬프게 그려냅니다. 이 영화로 오시마 나기사는 재판에 회부되는 등의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2년 뒤에 만든 <열정의 제국>에서 다시 한번 섹스와 범죄에 대한 원숙한 예술적 표현을 성취,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1983년에는 데이비드 보위, 기타노 다케시, 사카모토 류이치 등 호화 배우들을 캐스팅해 일본인의 서양인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애증과 동성애를 다룬 아름다운 작품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발표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만들어냅니다. 성과 정치, 범죄 등 그간 일본 사회에서 터부시되어 왔던 주제를 영화로 만들었던 오시마 나기사는 <막스, 내 사랑> 이후 근 13년간의 긴 공백을 깨고 사무라이 영화 <고하토>를 만들어 또 다른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김성욱) 

상영작(22편) 

사랑과 희망의 거리(1959) 
청춘 잔혹 이야기(1960)

태양의 묘지(1960)

일본의 밤과 안개(1960)

사육(1961)

열락(1965)

윤복이의 일기(1965)

백주의 살인마(1966)

닌자 무예장(1967)

일본춘가고(1967)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1967)

교사형(1968)

신주쿠 도둑 일기(1969)

소년(1969)

도교전쟁전후비화(1970)

의식(1971)

여름의 누이(1972)

감각의 제국(1976)

열정의 제국(1978)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1983)

막스 내 사랑(1987)

고하토(1999) 

* 상영시간표는 곧 공지될 예정입니다.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 
카페서울아트시네마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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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리 2010.07.03 22:57 신고

    펠리니의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찼는데,
    오시마 나기사 영화가 또 기다리고 있네요^^
    펠리니의 <로마>를 보고 나오는 순간, 먹먹한 느낌이 한동안 내 뒤를 따르더군요.
    초기작들에선 낭만주의적인 펠리니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8과1/2만 알고 있던 제겐 의외였죠.
    그런데 후기작으로 갈 수록, 그의 기괴한 몽상가적 기질이 드러나더군요.
    개인적으론 후기작품들이 취향이긴 합니다만,
    <로마>란 작품에선 전위적인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아트시네마 덕분에 미처 몰랐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서 기분좋은 하루였습니다.
    오시마 나기사 작품들도 기대가 됩니다. <감각의 제국> 외엔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요.
    펠리니를 검색하다 우연히 들러 좋은 글 많이 읽고 갑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개관일은 5월 10일입니다. 2002년에 처음에는 소격동의 아트선재 센터 지하에서 시작했지요. 필름으로 온전하게 고전영화들을 상영하겠다는 취지하에 이러한 영화들이 관객들과 충분히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영화가 제대로 보여지고 소개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울아트시네마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의 낙원상가 옥상으로 올라온 것은 2005년의 일입니다. 그렇게 영화의 20세기가 끝난 21세기의 초두에 문을 연 서울아트시네마가 21세기의 10년이 지난 2010년에 여덟살이 됐습니다. 이번 8년을 맞는 서울아트시네마 '개관기념영화제'에서는 지난 10년 간에 소개된, 하지만 결코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했던 영화들을 소개합니다. 이 영화들 중의 일부는 국제영화제를 통해 간헐적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아직까지도 수입배급을 통해 극장에서 정식으로 상영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고전영화를 주로 상영하지만 그 영화들을 상영하는 이유가 의미있는 작품이라서만이 아니라 그 영화들이 제대로 다시 상영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21세기의 수작들 또한 정상적으로 관객들과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시대에도 영화는 실종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기간에는 서울아트시네마를 후원하기 위한 영화인들의 후원활동을 기념하는 특별한 행사가 마련됩니다. 서울이 세계 4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될거라고 하지만, 정작 서울의 영화적 환경은 파리, 런던, 뉴욕 등의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영화인들은 서울아트시네마를 후원하는 활동을 꾸준히 벌여왔고, 올해 1월에는 ‘서울에 시네마테크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위원장 이명세 감독)’를 발족시켰습니다. 또한,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을 위한 후원 활동의 일환으로는 지난 3월에는 서울아트시네마를 후원하기 위한 영화인들의 후원광고 촬영이, 4월에는 잡지 ⌜하퍼스 바자⌟에서 진행한 영화인들의 후원사진 촬영이 있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이들의 후원활동을 기념하는 ‘후원 사진전’이 영화제 기간 내내 열립니다. 5월 20일에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의 염원을 담아 영화인들의 후원활동을 기념하고, 함께 서울아트시네마 개관 8주년을 축하하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가 열립니다.

자세한 상영작의 소개는 서울아트시네마의 홈 페이지를 통해 소개될 예정이지만, 미리 말하자면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의 <금발소녀의 기벽>, 브라이언 드 팔머의 <리댁티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테트로>, 마르코 벨로키오의 <승리>, 잉마르 베르히만의 <사라방드>, 클레르 드니의 <침입자>,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안나와의 나흘 밤>, 라울 루이즈의 <누신젠 하우스>가 상영됩니다.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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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이비 2010.05.12 15:07 신고

    여덟살 생일, 축하와 함께
    감사에 감사에 감사를 해도 부족하군요. ^^

  2. 구라구라 2010.05.13 13:42 신고

    8주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개관 기념 영화제도 감사드리구요^^

    • Hulot 2010.05.14 23:32 신고

      예. 감사합니다. 10주년이 되는 2012년까지는 제대로된 전용관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합니다~

  3. 2010.05.18 08:19

    비밀댓글입니다

    • Hulot 2010.05.19 01:43 신고

      드나랑 올리베이라신작 승리 ..말하다보면 다하겠네

  4. 2010.05.19 04:01

    비밀댓글입니다

    • Hulot 2010.06.06 20:15 신고

      '꽁기꽁기'란 말이 무슨 의미인가 찾아봤네요. ㅎ 그런 표현이 있군요. 참 일찍 쓰는 댓글입니다..

  5. opticnerve 2010.05.22 21:27 신고

    [금발 소녀의 기벽]만 놓치고 다 봤는데, 뭔가 각각의 영화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들어오더라고요. 그냥 흘려 보내기엔 너무나 무거운 현실에서의 수많은 상황들이, 영화를 보고 난 감상 안으로 마구 침입하는 느낌이랄까요. ㅎ 서울아트시네마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경험이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을 찾아와 막 매진돼서 못 보게 되기도 하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랄께요. 새로운 친구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젊은 활기로 끓어오르는 공간이 되기를~!!!

  6. 2010.05.27 00:10

    비밀댓글입니다

    • Hulot 2010.06.06 20:20 신고

      꽤 어설퍼보였나 보네요. '분미 아저씨'는 아마도 다른 영화제들에서 너도나도 상영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마 올해에 볼 기회가 있을 듯 하네요. 지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해봅니다. 몰염치한 사람들과 상대하다보면, 적대감을 갖지 않으려 하다보면 지치긴 하더군요.벌써 올해도 절반이 지나고 있습니다. 올해 초의 상황이 아득히 멀어보이는데. 여전합니다, 그들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2월 23일 공모제 문제로 서울아트시네마가 처한 상황에 우려를 표하면서 서울아트시네마와 최대한 연대할 것을 밝히는 서한을 우리들에게 보내왔습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고, 몇 차례 이 문제와 관련해 저희들과 메일을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대표인 코스타 가브라스와 관장인 세르주 투비아나의 서명이 담긴 서한에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수년간 모범적인 방식으로 영화예술에 가치를 부여하고 진흥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며 ‘이는 영화예술을 보다 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영진이 주도한 것으로 특별히 서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지금의 시네필들에게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울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충분한 지원을 받아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지속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완전한 독립 없이는, 전용관을 갖지 않고서는, 장기적인 공적 지원 없이는 한국의 시네마테크는 영화 예술을 보존하고 복원하고, 진흥할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 아울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서울아트시네마와 최대한 연대할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영화적 교류를 꾸준히 해왔고, 올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복원한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상영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시네필의 국제적 연대를 선언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노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아울러 서울아트시네마는 영화예술의 가치를 존중하고 시네마테크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장기적인 공적 지원의 확보와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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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맞아서 '시네필의 선택' 섹션에 참여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시네마테크에 보냈던 편지입니다. 카탈로그에 실려있지만 여기에도 소개합니다.

   

시네마테크2010_친구영화제_20091230

보내는 사람_정성일

받는 사람_김성욱

 

 

첫 번째 (상황). 2008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내건 슬로건은 ‘영년(zero year)’이었다. 그건 마치 내게 하는 말 같았다. 제로라는 무효의 선언.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 로셀리니가 영화 제목에 쓴 말. 그런 다음 고다르가 받아서 21세기에 반복했던 제목. 하지만 내게 그 의미는 다른 것이었다. 말 그대로 진공상태. 단지 길을 잃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나는 텅 빈 상태였었고, 거의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것처럼 영화를 보았다. 너무 많이 보아서 어제 본 영화와 오늘 본 영화가 잘 구별되지 않았다. 종종 중간부터 보기도 하였고, 때로는 보다가 지쳐서 자기도 하였다. 나는 2008년 친구영화제에 슬픈 마음을 안고 마츠모토 토시오의 <수라(修羅)>를 백지수표에 썼다. 그때 내 상황은 비유 없이 아수라장이었다. 그 해 내내 준비했던 영화는 잘되지 않았다. 나는 할복자살하는 심정으로 이 영화를 그 자리에 온 영화의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아니, 그건 그냥 할복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마츠모토 토시오라는 칼. 단숨에 창자까지 꺼내 들 수 있게 잘 만들어진 섬뜩한 날. 먹물처럼 배어 나올 피. 유혈 낭자한 소개. 나는 친구들이 모인 파티를 피바다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는 않았다. 모두는 아니지만, 그 중 몇몇은 재미있게 보았다. 심지어 악수를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맙소사!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 청하는 감사의 악수보다 더 아이러니한 상황이 있을까.


두 번째 (행동). 그 이듬해 다행히도 나는 친구 영화제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를 찍었다. 그건 내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단지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나를 오해한 것이다. 나를 붙잡은 질문. 대답을 구하려는 간절한 노력. 내게서 영화를 찍는다는 건 질문에 대답하는 활동이다. 말하자면 사랑의 다른 길. 훨씬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길. 생각이 미리 자리 잡기 전에 작업하면서 고정적이고 기계적인 개념을 부수는 방법. 내가 책에서 읽은 의심스러운 구절들. 우리는 책에서 읽은 상투적인 구절들과 싸워야 한다. 아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개념이 담긴 영화 책이라는 유리병을 세상 속으로 집어던져서 깨버려야 한다. 어떻게? 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내가 배움을 향해서 간절하게 집어던지는 액션이다. 로셀리니는 세상 속에서만 영화는 배움을 청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고 싶었다. 차라리 내 존경을 실천하고 싶었다. <카페 느와르>는 나의 영화 액션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시간이 올 것이다. 미래의 관객이라는 기대의 지평.


세 번째 (선택).
나는 올해 열 편의 영화 제목을 썼다. 그중에서 세 편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 편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혹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삼각형이 될 것이다. 대신 열 편을 고르면서 세운 원칙과 세 편에 대한 짧은 추억을 말하는 것으로 소개를 대신하겠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소개하다니! 그런 건 그냥 교과서에 맡겨놓으면 된다. 여기는 교실이 아니다. 우리가 구출해야 할 영화. 영화를 착취하는 기계들. 교실. 멀티플렉스. 아마도 그런 곳에서는 소개가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별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건 바보짓이다. 나의 호소. 우리는 영화를 소개하면 안 된다. 그저 그걸 보아야 한다. 보고 또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각자의 영화사를 창조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앙리 랑글루아의 목록에서 배웠다.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의 시간표를 매일매일 짜면서 그걸 작가별, 혹은 주제별, 또는 장르별, 배우별, 시대별로 구분되지 않게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는 슈퍼마켓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발명품 영화. 20세기의 타임머신.
 

변주곡, 혹은 엘레지. 김성욱 씨로부터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2010년 친구의 영화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이유는 여러분이 잘 아는 그대로이다.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정을 나눌 장소는 위기에 빠졌고, 아직 대안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는 예술과 정치의 수상쩍은 구별을 항상 의심한다. 물론 시네마테크 친구들의 희생적인 노력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아무 걱정 없이 영화를 보았다. 여기서 방점은 불행히도 ‘그 동안’이다. 하지만 이제 그 희생의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게 되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의 투쟁전선은 고작 해야 방안의 홈 씨어터인가? 보고 싶은 영화를 위한 당신의 저항은 불법다운로드인가? 우리가 믿는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행동을 결정해야 할 시간. 우리는 예술과 짝을 이루는 정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폭격. 점령구역들.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움직이기 시작하는 수수방관. 당신은 영화를 본다는 것 말고는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장소를 방어하기 위해서 (어떤 형식이건) 희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은 다시 입장의 문제이다. 그리고 입장의 효과(와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 유명한 1902년의 정식. “막대가 나쁜 방향으로 구부러졌을 때,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즉 곧게 펴기 위해서는, 우선 막대를 반대방향으로 구부려야만 하며 따라서 그것을 쥐고 튼튼하게 반대방향으로 잡아당겨야 한다.” 누가 결정을 내리는가? 결정의 내용을 아무리 따져보아야 거기에는 대답이 없다. 핵심은 결정을 바꾸는 것이다. 혹은 결정을 내리는 자리를 바꾸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곧게 펴기. 하지만 어떻게? 우리는 이제 흐릿해진 생각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세 편의 영화. 먼저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물론 이 영화는 ‘흡혈귀’와 아무 상관이 없다. 연쇄극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어떤 버전이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될지에 대해서 나는 아직 아무 정보도 없다. 나는 이 영화를 이번 영화제에서 진심으로 ‘공유’하고 싶다. 다소 무모한 말이긴 하지만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생애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물론 이 영화 제목은 내일 바꿀 수도 있다. 원래 ‘한 편의 영화’라는 건 그런 것이다. 나는 1993년 1월 마지막 토요일 클레르몽페랑의 파스칼대학 강당에서 밤 10시에 시작해서 밤새도록 상영된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처음 보았다. 그 전에 나는 이 영화를 책의 제목에서만 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내게 이 영화를 추천해주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홀렸다. 아니, 그냥 넋을 잃었다는 말이 맞다. 최면상태. 아름답다거나 훌륭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이건 위대하다거나 혹은 걸작이라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결정이다. 그냥 영화 자체를 본 것 같았다. ‘아! 이것이 영화구나.’ 라는 탄식. 물론 그런 다음에도 쉬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놓친 영화들을 찾아보았고, 새로운 영화들을 보았다. 많은 복원판을 보았다. 추천작들도 보았다. 하지만 어떤 영화도 자기의 자리를 차지할 뿐 내게 지금 이것은 영화, 라고 선언하지 못했다. 나에게 영화는 결국 <뱀파이어>이다. 나는 내 믿음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거의 십 년이 지났을 때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뉴욕에서 보았다. 그때 결론을 내렸다. 나는 결국 이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내 평생의 연인이 릴리안 기쉬인 것처럼. 그때 이 결정에서 릴리안 기쉬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느냐는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당신이 동의하건 말건 그건 내 관심이 아니다. 아마도 당신에게 영화라고 선언하는 또 다른 영화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놓고 경쟁할 생각이 없다. 다만 이 자리에서 내 사랑을 고백하고 싶을 뿐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고백을 통해서 당신에게 내가 친구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긴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서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사샤 기트리. 아직 단 한 번도 여기서 사샤 기트리의 회고전이 없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거의 이야기도 되지 않는다. 언제나 르누아르. 언제나 브레송. 언제나 고다르. 나는 사샤 기트리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친구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선택은 친구를 찾는 나의 애절한 호소이다. 우리가 우정을 나누는 방식. 나는 사샤 기트리가 장 르누아르나 브레송만큼은 아니지만 마르셀 카르네나 줄리앙 뒤비비에보다는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장 콕토보다 본질적으로 시적이다. 사샤 기트리가 없었다면 장 으스타슈가 가능했을까. 앙리 랑글루아는 훨씬 더 확신을 갖고 프로그램을 썼다. “사샤 기트리는 미조구치 겐지, 빈센트 미넬리, 더글라스 서크, 로베르토 로셀리니처럼 중요하다. 이 말은 이상하다. 그렇다. 사샤 기트리는 영화사에서 그렇게 이상한 자리에 있다.” 내가 사샤 기트리를 처음 본 곳은 프랑스 문화원이었다. 그때 나는 사샤 기트리의 중요함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세대를 건너뛰어 이제 다시 당신에게 동의를 구한다. 하지만 사샤 기트리의 영화를 한 편 보고 그를 잘 알게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우스운일디다. 내 꿈 중의 하나는 살아생전 사샤 기트리의 전작 회고전을 보는 것이다.


세 번째. 카르멜로 베네를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였다. 파솔리니는 경외감을 안고 베네를 ‘나의 위대한 동지’라고 불렀다. 그 다음은 고다르이다. 고다르는 베네의 영화를 본 다음 달려가서 로마에서 그의 연극 무대를 보았다. 질 들뢰즈는 카르멜로 베네에 관해서 한 권의 책을 헌사 했다. 하지만 시네필 들뢰즈가 카르멜로 베네를 말하면서 연극에 한정 지어 설명한 것은 좀 의외이다. 들뢰즈가 카르멜로 베네에게 바친 한 권의 책 『중첩』은 들뢰즈의 유일한 연극에 대한 책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 다음 영화에 관한 두 번째 책 『영화 2; 이미지-시간’의 제 8장 ‘영화, 신체, 그리고 뇌, 사유』에서 짧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카르멜로 베네가 이미지-수정체를 건설한 가장 위대한 시네아스트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다음 들뢰즈는 여기서 장 으스타슈, 필립 가렐, 알랭 레네, 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그리고 미래의 민중영화를 이야기한다. 카르멜로 베네의 위치. 나는 좀 더 많은 카르멜로 베네의 영화를 보고 싶다.


인사. 그렇다. 우리는 영화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더 많은 영화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우리들의 두 번째 십 년. 우리들의 21세기의 두 번째 시작. (정성일_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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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올해로 벌써 5주년을 맞았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재정적 후원과 전용관을 확보하기 위해 2006년 처음 1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린 이래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 배우, 평론가들이 참여해 매년 1월 한 해를 시작하는 최고의 영화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 5년간의 기록을 5개의 키워드로 살펴본다.(편집자)





Amies 친구들

2006년 '제1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는 9명의 친구들이 함께 했다. 5명의 감독과 (박찬욱, 김홍준, 김지운, 류승완, 오승욱) 2명의 평론가(김영진, 정성일) 그리고 2명의 배우가(문소리, 황정민)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모임이 결성되었고, 박찬욱 감독이 대표를 맡아 서울아트시네마를 후원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직접 선정한 영화를 관객과 함께 관람하고 영화상영이 끝난 후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는 초기의 활동에 더하여 최근에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을 위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재 많은 영화인들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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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 발족

2010년 1월 15일, 5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선 실로 기념비적인 일이 일어났다. 국내 내로라하는 영화감독, 배우들이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이하 시네마테크 건립 추진위)’를 결성하고 바로 이날, 그 뜻 깊은 결의를 알리고 다지는 발족식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들도 참가, 공감대를 나눈 이 자리는 영화를 꿈꾸는,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염원을 모아 자발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온전한 영화의 집을 짓기 위해 스스로 깃발을 들고 나서 이제 시작을 외치는 추진위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추운 겨울이지만 열기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불탔던 시네마테크 건립 추진위 발족식 현장을 전한다.


새해가 밝음과 동시에 서울에 있는 많은 시네필들의 동면을 깨워주었던 친구들 영화제는 쉬지 않고 5년을 내리 달려왔다. 하지만 지금의 서울아트시네마는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친구들 영화제와 맞물려서 가장 큰 위기에 처해있다. 그건 바로 ‘공간’의 문제로, 어쩌면 이번 영화제를 끝으로 서울아트시네마는 또 다시 보따리를 싸서 어딘가로 떠나야할 지도 모른다. 인구 천만이 넘는 이 대도시에 변변한 시네마테크 전용관이 없어서다. 사실 전용관 설립 추진은 소격동 시절부터 끊임없이 논의되었던 사항이다. 2007년에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와 서울시가 구체화하려했던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 건립’이 그 염원의 실체다. 그런데 정책담당자가 바뀌면서 불현 듯 수포로 돌아가 결국 좌초되고 말았고, 그 결과 서울아트시네마는 5번의 친구들 영화제와 창립 10년을 앞둔 시점에도 여전히 안정적인 공간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시네마테크의 고질적인 문제를 헤쳐 나가기 위해 시네마테크는 2010년 1월 15일 오후 5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이하 시네마테크 건립 추진위) 발족식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정윤철 감독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추진위원장에 위촉된 이명세 감독과 친구들 영화제 대표인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봉준호, 최동훈, 김지운, 윤제균, 류승완, 이경미 등 8명의 감독들과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가 동참했다. 이날 발족식은 기자들뿐만 아니라 일반관객들도 자유롭게 시네마테크에 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자리였고, 참석한 감독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시네마테크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이 없는 것은 문화의 수치다 - 박찬욱

정윤철 감독: 서울시에는 시청이 있어야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교회, 불교인들에게는 절이 필요하듯 영화인들에게는 시네마테크라는 곳이 필요하다.
최동훈 감독: 시네마테크에 와서 영화를 보는 게 영화를 만드는 만큼이나 재밌다는 걸 느꼈다. 단순 영화인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일반관객들이 다른 국가들과 한국영화의 클래식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기를 바란다.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영화관이지 않을까.
박찬욱 감독: 영화 공부 하던 때 교과서에 실리는 꼭 봐야 하는 영화들을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감독이 되었고, 그렇게 영화를 만들다보니까 아시다시피 족보 없는 영화가 자꾸 만들어진다(웃음). 영화를 배우고 감독이 되려하는 후배들이 더 이상 그런 길을 밟지 않기에라도 이런 곳이 있어야한다. 만약 불법 다운로드를 일삼는 사람들이 ‘도대체 고전예술영화들은 어디서 보냐’라고 물었을 때 ‘시네마테크에서 그런 영화들을 볼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경제나 인구로 이런 어마어마한 도시인 서울에 시네마테크하나 유지하지 못한다면 이건 수치라고 생각한다.

시네마테크가 있는 부산이 부럽다 - 봉준호

이명세 감독: 말로만 듣던 시네마테크를 미국 ‘필름포럼’이라는 공간에서 만났다. 그로 인해 여태 찍었던 영화 속에서 나름의 체계적인 정리를 했고, 서울에 시네마테크가 생겼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뻤다. 이런 귀중한 공간들이 영화인들이나 목말라했던 후배감독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줘야 하는데 왜 이렇게 찾지 않는지 궁금했다. 이 보물창고를 유지해야 보물들이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 한 나라 영화산업 문화의 자존인 시네마테크가 몇 년마다 옮기면서 번듯한 보금자리 하나 없다는 게 부끄러운 일인 것 같다. 프랑스에 가볼 일이 있다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둘러보시기를 바란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참 부러웠다. 멀리가 아니더라도 부산에 가보시면 훌륭한 시설이 있는데 어쩌다가 없는 게 없는 서울은 이렇게 되었을까. 반성하고 있다.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도서관이다 - 윤제균

윤제균 감독:
일반적인 책들을 파는 서점이 있다. 그곳에는 베스트셀러 되는 작품과 이슈화되는 작품들이 놓여있다. 하지만 도서관이라는 곳도 책을 보유하고 있다. 철이 지났지만 보고 싶은 책이 있거나 서점에 팔지 않는 책들이 있을 때 그런 것들을 보관하는 도서관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쉽게 생각해서 서점과 도서관의 차이가 아닌가.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도서관이다.
김지운 감독: 90년도 초반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무작정 유럽에 갔다가 두 달 동안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100편의 영화를 봤는데 보잘것없었던 영혼을 가졌던 사람이 좋은 영화를 통해 더 나빠지지는 않는 경험을 했던 것 같다(웃음). 그런 의미에서 시네마테크는 은총의 공간이고 인생의 질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공부방이다.
류승완 감독: 최근에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영화가 사라지고 있다. 단관개봉시절에 한 편의 영화를 두 달 세 달보고 그런 시절은 오지 않는 거잖나. 역사에 기록되는 영화 뿐 아니라 불량식품처럼 취급되었던 영화도 보는 등 더 재밌게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좋은 공간이 시네마테크다.
이경미 감독: 영화공부도 늦게 시작한 편이고 영화도 못 본 것이 많은데, 지금도 시네마테크를 통해서 재미있는 영화들을 본다는 생각을 하면 흥분이 된다. 잘 지켜졌으면 좋겠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이처럼 이날 발족식 참석자 모두는 하나같이 상기된 모습을 보이며 시네마테크에 대한 열정을 내비쳤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 발족식이 굉장히 기념비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시네마테크의 연혁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비디오테크부터 출발해 영화사 100주년을 기념하며 전국시네마테크연합이 창립되었고, 2002년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사단법인 인가를 받으며 발족, 이후 서울아트시네마는 소격동 아트선재 공간을 대관해서 수많은 회고전과 특별전을 진행해왔다 한다. 2004년 재임대계약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서울아트시네마는 존폐위기를 맞지만, 2005년도에 안국동 시기를 마감하고 낙원 허리우드극장으로 옮겨오면서 서울아트시네마는 다시 전용관을 마련했다. 그 다음 해 1월 시네마테크 지원을 결의해주었던 다수의 영화감독들이 주축이 되어 처음으로 친구들 영화제가 열리고 그렇게 2010년 5주년의 해가 찾아온 것이다. 시네마테크 부산의 경우 창립때인 1999년부터 전용관으로서 역할을 다해왔지만, 서울은 안정적인 전용관 마련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창립 10주년이 머지않은 시점에서,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시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2008년 서울시와 영진위가 영화인들과 시네마테크의 요청으로 진행하다 정책결정자들이 바뀌면서 좌초한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건립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다시 나서야 한다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간단한 경과보고가 끝난 후, 추진위원장인 이명세 감독의 발족 취지문 낭독순서를 거쳐 시네마테크를 지지하는 감독들과 영화사 스폰지, 퍼시픽엔터테인먼트 등에서 참여한 필름 프린트 기증식이 이어졌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 봉준호 감독의 <마더> 등 기증자들은 자신의 흥행작 혹은 최근작 프린트를 시네마테크에 기증했다. 감독들에게는 분신인 프린트를 기증함으로 극장의 중요성과 영화박물관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던 기증식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최정운 대표의 손을 통해 소중하게 전달되었다.

극장 안을 가득 메운 기자들의 질의응답을 마지막으로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 발족식’은 막을 내렸다. 여러 감독들의 담소로 인해 편하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던 발족식은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건립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던 뜻 깊은 자리였다. 이명세 감독이 말하듯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녹아있는 소중한 ‘보물창고’이며 이 보물창고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시네마테크의 안정된 공간 즉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 문제에 모든 힘을 실어주어야만 한다.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가 스스로 발족식을 거행했듯이 시네마테크를 사랑하는 관객들과 영화인들의 관심 또한 시급하다. 정윤철 감독이 말하듯 교회와 절간은 신도들의 열정과 참여로 인해 세워지듯 시네마테크의 전용관 건립 또한 영화의 보물창고를 소중하게 지키기 위한 자발적인 관객운동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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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서막 열어

2010년 1월 15일 저녁 7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제5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이하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식이 열렸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는 5주년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전용관 문제로 겪고 있는 위기를 감독, 배우, 영화관계자, 관객들이 힘을 모아 헤쳐 나가자는 취지가 반영되어 그 어느 때보다 이목이 집중된다. 개막식에 앞서서는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이하 전용관 추진위)’의 발족식도 거행했다. 그래서인지 이전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예년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뜬 표정들로 모여 영화에 집에 대한 공감과 사랑으로 뜨겁게 타올랐던 밤. 그렇게 시작한 2010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 현장을 여기에 옮긴다.



1월 15일 저녁 7시경 서울아트시마에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다섯 번째의 생일잔치가 시작되었다. 초기부터 친구들 영화제의 사회를 진행하던 권해효 씨는 매년 한 해의 마무리를 서울독립영화제를 통해 한다면, 새 해의 시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