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뤽 고다르의 근작 <필름 소셜리즘>과 2000년대 이후 고다르 영화의 행보

장 뤽 고다르의 근작 <필름 소셜리즘>이 개봉할 예정이다. 자세한 논의는 아마 개봉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나는 이 영화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보았고, 지난해 여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 가지 다른 이야기를 통해 우회하고 싶다.



 

첫 번째 이야기. 올해 프랑스 대선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정책 중 하나는 ‘아도피법’이었다. 아도피법은 2009년에 도입된 일종의 ‘스리 스트라이크제’로 위법적인 다운로드 단속법을 말한다.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이 법은 다운로드 유저에게 인터넷상의 저작권 침해의 죄를 물어 형사 처벌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고 징역 3년에, 벌금 30만유로를 물리게 하고 덧붙여 최고 1년의 인터넷 접속 차단을 명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 시에 올랑드 후보는 ‘아도피법’을 폐지할 것을 제창했고, 지난 세기에 논의됐던 ‘문화적 예외’와 관련한 내용을 디지털 시대에 적합하게 변용한 ‘프랑스의 문화적 예외 2막’을 이와 관련해 선언했다. 내년 초에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이 발의될 것으로 알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 2005년, 프랑스의 음악애호가인 제임스 클레망은 1만3788개의 MP3파일을 불법적으로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기소되었다. ‘다운로드가 시민의 권리’라 말한 클레망의 주장은 온라인 저작권 보호법에 따라 쉽게 무시되었다. 사안의 성격상 언론의 주목을 끌 만한 일은 아니었다. 고다르가 나서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랬다. 클레망은 고다르가 자신의 재판 비용으로 사용하라며 1천유로를 기부했다고 발표했다. 고다르는 이미 잡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온라인 저작권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상태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지적재산권이란 없다. 창작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단지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이야기. 지난해,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를 방문한 알랭 베르갈라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고다르의 절친이자 그와 관련한 방대한 저서를 출간한 평론가이다. 베르갈라는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의 주제가 ‘영화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인데, 말 그대로 ‘필름 소셜리즘’을 증명할 것이 영화 안에는 없다. 고다르의 <아워뮤직>이 지성과 문화로서의 유럽을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그렸다면, <필름 소셜리즘>에는 그런 유토피아적 희망이 없고, 영화가 보여주는 지중해에 떠 있는 거대한 유람선은 공포의 유럽, 소비로서의 유럽, 파멸로 향하는 유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다르는 경멸스러운 유럽을 보여주기 위해 휴대폰의 흉한 화질로 춤추는 사람들을 촬영했는데, 그런 장면들이 고화질의 화면으로 촬영될 가치가 없기 때문이란다. 반대로,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자연의 장면은 고화질의 카메라로 촬영했는데, 이는 아름다운 장면이기 때문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의 투박한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큰 붓을 사용하고, 새를 그리기 위해 세밀한 붓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고다르는 이 영화에서 필름이 아니라 다양한 디지털 붓을 사용했다.


 


 

이제 지난 세기의 것이 되어버린 필름과 소셜리즘



 

이 세 가지 기억의 공통의 화두는 아마도 국가, 저작권법, 권리, 디지털, 유럽, 소셜리즘 등이 될 것이다. 여기에 복잡한 관계들이 있다. 가령 <필름 소셜리즘>은 제목 그대로 ‘필름’과 ‘소셜리즘’을 결합한 영화다. 그러나 이 둘을 묶는 공통의 지 평은 애매하고, 현실은 더더군다나 망연자실하다. 필름이 이제 사라지고 있고, 소셜리즘은 마찬가지로 지난 세기의 낡은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제목과 달리 철저하게 디지털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니 필름에 의해 소셜리즘을 되돌아본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둘의 결합이 환상이나 상상적인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물론 우리는 이러한 상상을 ‘사상은 우리를 나누고 꿈은 우리를 이어준다’라는 고다르의 내레이션과 연관해 생각해야만 한다. 물론 종종 그러한 꿈은 악몽이기도 하다). 불법복제와 허락받지 않은 공공상영은 불법이라는 FBI의 경고문을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래서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고다르는 탁월한 이미지의 수집가인 데 반해 앞서 인용한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저작권을 부정한다. 누벨바그의 작가로서 고다르는 태생적으로 이미지의 도둑이었다. 이미지를 수집, 보존, 활용하는 것에는 언제나 위법성이 따른다. 비합법적 거래나 카피에 손을 댄 수집가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고다르적 이미지 교육학의 선생이었던 랑글루아가 영화 저작권의 소유자에 경의를 표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아카이브에는 비합법적 카피나 컬렉션이 있었다. 이미지에의 공공적 접근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불법을 저질러야 한다(가령 고다르는 영화탄생 100주년작인 <2×50 프랑스영화의 역사>에서 멜리에스의 후손들이 멜리에스 영화의 상영과 관련해 권리를 주장한 것을 비난했다). 국민적이고 국제적인 법이 제작자의 권리를 보호하지만, 대중이 영상의 유산적 가치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보호받지 못한다. 그 결과 이미지의 상당 부분이 한계를 갖게 되었고(그런 점에서 역사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사실상 권리상의 싸움이다), 나쁜 결과가 만들어진다(영화사의 경험의 불가능성, 불법적인 수단을 통한 영화에의 접근, 표준 이하의 버전과 포맷을 통한 불법적 보기로 인한 이미지 퀄리티의 하락 행보등). 고다르는 그리하여 지적소유권을 도발적으로 부정하면서 ‘필름의 소셜리즘은 소유권’이라는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작품의 소유권 따위는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필름과 소셜리즘을 결합하면서 고다르가 디지털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래서 이중적 의도가 있다 하겠다. 그 하나는 베르갈라가 말한 것처럼 지금의 사회가 필름의 퀄리티로 찍을 필요가 없을 만큼 암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굳이 필름을 끌어들여 아름답게 찍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이는 <사랑의 찬가>에서 디지털을 회화처럼 활용한 것과는 다르다). 한편, 디지털의 활용은 필름 다음에 디지털이라는 위계성과 필름만이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권성을 부정하는 함의를 지닌다. 소셜리즘에 집중한다면 필름의 소셜리즘은 필름의 특권성을 고집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매체와 이미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모든 종류의 이미지에 권리를 주고 이미지에 급진적인 평등성을 부여하는 것이 (긍정적이든 아니든 간에) 이미지의 소셜리즘이다. 그런 식으로 <필름 소셜리즘>에는 다종다양한 이미지의 이종교배가 있다. 전편이 디지털의 HD 캠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게다가 상당수의 다른 극영화나 기록 영상으로부터의 인용이 <영화사>에서처럼 등장한다. 디지털의 압도적인 장면은 1부를 장식하는 대형 여객선의 화려한 외용이다.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의 동영상으로 찍은 저해상도의 영상들, 대형 스크린, 모니터 등 오늘날의 즐비한 영상 환경의 풍경이 펼쳐진다. 권리상 이러한 이미지들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등하게 존재한다. 그게 지금의 이미지의 풍경이다.


 

<아워뮤직>
<사랑의 찬가>


 

사상은 우리를 나누고, 꿈은 우리를 이어준다



 

이 영화에 그렇다고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 이야기를 상정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스페인 내전 시 스페인 은행에서 사라진 대량의 금화를 둘러싼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다. 이는 돈과 영화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자 자본주의와 영화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알랭 베르갈라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는 고다르가 끊임없이 제기한 ‘역사는 왜 늘 나쁜 길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의 답변이다. 돈(의 순환)은 결국 악의 근원이다. 돈이 모이는 스위스에 살고 있는 고다르다운 질문이다(여담이지만, 고다르는 자파르 파니히를 수감시킨 이란을 비난하는 영화인들이 왜 폴란스키의 체포를 용인한 스위스를 비난하지 않는지를 의심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주유소를 경영하는 마르탱 집안의 이야기로, 글로벌화되어가는 현대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고다르에게 글로벌화란 ‘하나’의 국가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는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에서 반복 인용되었던 것처럼 개인과의 충돌을 빚어낸다. 왜냐하면 ‘국가가 요구하는 환상은 하나이지만, 개인의 꿈은 둘이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아이는 선거에 입후보해서는 안되는가’라는 질문이 터무니없게 제시되는데, 여기서 아이는 어떠한 권력도, 국가도 원치 않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이 아이는 ‘Be 동사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데, 모호한 말이지만 디지털이 구성하는 0과 1로 구성된 세계가 결국 ‘무’와 ‘하나’의 세계로 귀착하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소셜리즘은 여기서 둘이 함께 서 있는 꿈을 꾸는 개인을 긍정하는 것으로 부각된다. 0과 1을 넘어선 셋에의 강조는 또한 ‘한명은 다른 이의 안에 있고, 다른 이는 한명 안에 있다. 그래서 이는 세명이다’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또한 (디지털과는 다른) 이미지에 대한 고다르의 인식을 반영한다. 이미지 또한 하나(안의 하나)와 다른 하나(안의 하나)의 둘의 결합인 셋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철학, 민주주의, 비극의 기원으로서의 서양 문물의 기원을 만들어낸 그리스에 관한 비감한 시선을 담고 있다. 알다시피 이 부분은 지난 그리스의 경제 위기의 현실을 반영한다. 유럽연합이 그리스의 위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 고다르는 그리스에 빚진 유럽국가가 임무를 망각하고 있다고 힐난한다. 이는 그리스에의 채무를 저버린 것이다. 가령 철학, 민주주의, 비극, 논리학 등 모든 것들이 그리스에서 기원했다면, 그리스는 마땅히 거액의 저작권료를 현대의 세계에 요구할 수 있고, 세계는 그리스에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고다르의 (괴이한) 논리다. 하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만약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이 국제적 규범이라면 그리스는 저작권상 그러한 지불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이야기는 <아워뮤직>에서도 제기된 팔레스타인과 관련한 문제다.



 

<필름 소셜리즘>에는 팔레스타인 저술가 에리아스 산바르가 출연하는데, 그는 ‘1839년부터 현대까지의 토지와 그 인민의 사진’을 저술했던 자이다. ‘팔레스타인이 최초의 사진가를 맞아들인 것은 1839년이다’라는 앨범의 문장이 인용되는데, 이 부분은 꽤 복잡한 내용이지만 고다르의 전작들(<여기와 저기> 혹은 <아워뮤직>)을 떠올린다면 단지 일원적인 권력에 의해 볼 수 있는 세계, 즉 자본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로 인해 실종된 영상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의 이미지와 관련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겠다. 가령 영화의 한 장면에는 ‘내 소중한 땅 팔레스타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실종된 영상을 암시하는 말이 나온다. 고다르의 특별함은 유럽 작가로서는 그가 거의 예외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영상의 문제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말하는 이들은 많으나 팔레스타인을 언급하는 작가는 적고도 고귀한 편이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실제로는 사라진 영상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한 세르주 다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다르는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한 작가다.


 

장 뤽 고다르 감독


 

언어의 저편, 사상의 저편



 

<필름 소셜리즘>은 알랭 베르갈라의 지적대로 음울한 영화다. 소셜리즘과 필름이 이제 지나가버린 것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다르의 소셜리즘은 단순한 이념은 아니다. 그것이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언어라면 그의 말대로 우리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 것이다. 고다르는 이데올로기, 사상, 언어로서의 소셜리즘에는 불신을 드러내는 듯하다. 아이와 동물들이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하고, 마찬가지로 동물들도 언어 이전의 언어로 말한다(고다르는 농담처럼 만약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천 마리의 개를 끌고 나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개들이 서로 반가워하는 통에 언어 이전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나눠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의 가능한 길이 남았다. 그 하나는 FBI의 (저작권)법의 문구에 앞서는 ‘법이 올바르지 못할 때, 정의가 법에 우선한다’는 저항의 길. 다른 하나는 디지털의 0과 1의 저편, 언어의 저편, 사상의 저편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작별의 인사가 될 것이다. 고다르의 신작이 ‘언어와의 작별’(Adieu au Langage)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필름 소셜리즘>은 고다르의 끝이 아니다.

-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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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은 카르멘의 전성시대였다. 프란체스코 로지, 카를로스 사우라, 피터 브룩이 마치 경연이라도 하듯이 카르멘을 영화로 만들었던 것은 당시 비제의 오페라가 저작권 소멸상태가 됐기 때문이었다. 고다르 또한 작업에 착수했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그는 비제의 오페라를 느슨하게 차용만 했을 뿐 그 유명한 음악을 쓸 생각이 없었다. 오토 프레민저의 <카르멘 존스>(1954)처럼 이야기를 현대로 옮겨왔고, 처음엔 이자벨 아자니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었다. 아자니의 바쁜 일정 탓에 당시 신인이었던 마루츠카 데트메르스가 최종적으로 카르멘 역에 캐스팅되었다(그녀는 국내에는 <한나의 전쟁>(1989)으로 잘 알려진 배우다). 고다르의 계획은 급진적이었다. 그는 음악을 따라가는 이야기, 혹은 음악이 이야기의 전체가 되는 영화를 구상했다. 카르멘은 음악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음악이 카르멘의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비제의 음악을 대신한 것은 엉뚱하게도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이다. 고다르는 비제의 음악이 바다와 밀접하게 연결된 지중해의 음악이라 여겼고, 자신에게는 그 바다가 브르타뉴의 해변에서 들었던 베토벤의 현악 4중주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결합은 작위적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1980년대 고다르의 성과중의 하나는 독창적인 사운드 몽타주를 고안하는 것이었다. 다이얼로그, 모놀로그, 음악, 효과음, 소음 등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과격하게 콜라주하는 것인데, 이는 나중에 <영화사>(1998)라는 작품에서 사운드의 거대한 리믹스 실험으로 만개한다.

이 영화는 사실상 내러티브나 주제와는 하등의 상관없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건과 두 공간이 밧줄의 매듭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가 이야기의 층위를 그나마 가늠할 수 있는 카르멘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음악가들이 베토벤 현악 4중주곡을 연주하는 장면들인데, 사실 연주장소가 어디인지 조차 알 수 없다. 게다가 베토벤의 음악은 거의 맥락 없이 몇 번이나 흘러나오다 끊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소리의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은 이미지와 불협화음을 만들고 오페라의 음악과 달리 이러한 음악은 극적인 상황과 필연적인 연결점이 없다. 인물과 그들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은행 강도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의 진행과 강탈 시퀀스 간에는 기묘한 결합의 원리가 숨어있다(고다르는 배우의 연기지도를 하면서 언제나 ‘음악을 들으면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것이다’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 영화에는 다양한 소리들, 특히 타이프를 치는 소리, 인간의 몸이 사물에 부딪혀 발생하는 소리, 다양한 소음들이 음악 이상의 빈도로 영화에 출몰한다. ‘이것은 정당한 이미지가 아니다,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라 말하는 고다르에게 소리의 레벨에도 서열은 없고 중요한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중심 소리란 없다. 모든 소리는 이미지와 더불어 동등한 권리로 작품 내부에 삽입되어야만 한다. 게다가 이러한 소리들은 불협화음이나 변박자로 하모니와 리듬이 깨져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미지와 소리의 배치의 중심은 비어 있다. 이는 영화의 제목이 상기시키듯이 ‘이름 이전에 무엇이 존재 하는가’라는 고다르의 질문과도 연결된다. 이름이 주어지기 전의 사물의 모습, 혹은 카르멘이라는 여성의 위대한 신화가 주어지기 전에 여자와 남자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장 지로두의 ‘일렉트라’에서 빌려온 말인데, 그건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워뮤직>(2004)에서 고다르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빛으로 향해 그 빛으로 우리의 어둠을 비추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음악이다.(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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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영화를 선정해 상영하고, 상영 후 영화에 대한 강좌와 함께 관객들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대화를 나누는 ‘시네클럽’ 행사를 하고 있다. 지난 6월 20일에는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발표된 지 50주년을 기념하여 누벨바그의 혁명을 일으킨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특별 상영하고 고다르의 작품 세계와 그가 일으킨 누벨바그 혁명을 추억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강연도 이어졌다. 극장이 거의 만석일 정도로 큰 호응을
얻은 시네클럽 행사는 고다르의 저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반증했다. 그 특별했던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올해는 <네 멋대로 해라>의 개봉 50주년이 되는 해다. 이 영화를 80년대에 극장이 아닌 문화원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90년대에 들어서는 비디오를 통해 접했다. 90년대 비디오떼끄에서 고다르영화들 불법 복제본을 형편없는 자막번역으로 보면서 무슨 말인지 궁금했는데, 그때 막연하게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고다르의 영화는 미스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다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화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는 게 어떤 의미있는 일인가를 덜 생각했을 것 같다. 그 덕분에 영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 <네 멋대로 해라>를 상영한건 개봉 50주년 기념, 그리고 그가 만든 '프랑스 영화의 역사 100년'이란 작품에서 말하듯이 이 영화의 의미를 기념하는, 다시 말해 잊고 지낸 걸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기념하는 게 <네 멋대로 해라>의 시작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계급보다 세대적 문제를 더 중요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개봉 시기에 누벨바그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다르란 작가가 등장한 세대적 문제라는 것이다.

영화적 문화유산을 소비하는 것으로 그는 관객, 시네필이 되었다. 1950년부터 1960년까지 고다르는 영화 만들 궁리를 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장편을 만들 권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아 절치부심했었다. <네 멋대로 해라>는 1959년 8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4주 만에 당시 영화제작비 절반 밖에 안 되는 돈으로 제작했다. 영화를 보면 초두부분에 미셀이 '나는 해야만 해'라며 조급하게 무언가를 향해 가는 것, 정확하게 모르는 성급, 조급의 느낌이 고다르 자신의 절박함과 같지 않나싶다. 1959년이란 시점을 보면, 당시 까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 모두가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샤브롤은 3번째, 트뤼포는 1959년에 <400번의 구타>로 칸에서 수상하며 난리가 났었다. 고다르의 주변 친구들이 영화를 만들고 그 이후 고다르가 가장 늦게 영화작업에 참여했는데, 고다르는 20대 중반에 들어서 자신이 작가로 데뷔하는 나이를 손꼽아 계산했다고 한다. 웰즈가 26세 이전에 첫 장편을 찍고 에이젠슈타인도 그러했는데, 26세 이전에 찍어야만 한다는 고다르의 강박관념이 상당했다고 한다. 결국 고다르는 다른 누벨바그리언들과 달리 제작사를 끼고 영화를 찍고, 시나리오도 당시 이미 주가를 올리던 트뤼포가 폐기처분한 걸(웃음) 가져다가 만들기로 결심했다. 고다르가 영화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도합 10년으로, 그는 글을 쓰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을 동등하게 생각했다.


고다르가 관객, 비평가의 입장에서 영화를 시작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1950년대 말의 조건으로 보자면 이탈리아는 네오리얼리즘시기를 겪고 난 후였고 이후 프랑스의 뒤늦은 격동은 이전 세대가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제도와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후 세대가 새롭게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시기였다. 영화를 본다는 것, 그리고 비평을 한다는 것은 누벨바그리언들이 전 세대를 공격하는 수단이었다. 고다르는 나중에 <영화사>라는 작품에서 ‘애매한 물결’이라는 표현으로 누벨바그리언들이야기를 담아냈다. 시작이라 생각했는데 끝물이었던, 애매한 새로움, 뭔가 혁명을 꿈꿀 수 없는, 물려받은 관객세대에서 시작해서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려고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고다르는 자신에게 부여받지 못한 권리를 획득하려 작업을 했던 사람이다. 전 세대의 영화들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는 엄청난 영화들을 봤고 그 영화들 안에서 미래에 대한 비평작업을 했었다. 영화를 탈환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고다르라는 작가가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들었을 때 그가 느낀 세대적 고민은 이전 세대들이 가진 영화를 자기 손으로 획득해나가는 것, 레지스탕스의 필요성이었다. 그가 당시 미국범죄영화, 특히 강탈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획득하는 게 없다고 느낄 때 뭔가를 도둑질하고 싶은 생각. 에티카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제대로 된 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 훔치는 것. 이것은 극장에 갇혀서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10여년을 살아온 시네필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었고, 비단 그것만이 아니라 박물관, 시네마테크 같은 곳에서 영화들을 발견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영화 속 미셀이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도둑질을 자행한다. 자동차, 특히 미제자동차를 훔치고 미국산 여배우를 등장시키는 것, 중간 중간에 미국산 소설가들의 생각들을 인용하는 것은 고다르와 아메리카니즘의 문제였다. 그는 이것들을 철저하게 훔쳤다는 것을 명백하게 표출하고 등장시켰다.

뒤늦다는 조건, 행위 안에서 고다르의 영화 만들기는 당시 불가능한 조건에서 영화를 꿈꾸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모노그램 픽쳐스 바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걸 눈여겨 보아야 한다. 고다르는 예술영화를 만든게 아니라 새로운 B급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는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고다르는 ‘나의 영화학교는 극장’이라는 말을 즐겨했다. 영화를 배우는 것을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고도, 글을 쓰는 것만으로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고다르는 자신이 이전 세대의 영화를 탈환하기 위한 시기를 기다리며 영화의 본질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는 장소로 시네마테크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실을 생각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새것을 창조한다는 것만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재활용을 잘 하는가의 기술이라 생각된다. 훔쳐오는 건 기존 존재의 물건을 가져오는, 달리 말하자면 재활용의 기술인 것이다. 소비를 생산적으로 미덕화 하는 것. 영화를 많이 봤던 고다르는 과거의 영화들이 폐기처분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꼴라주, 브리꼴라주, 남들이 썼다가 버리게 되는 것들을 모아서 재활용해서 만드는 것이다. 고다르는 그런 식의 영화들, 제대로 카메라에 담겨지지 않았던 현실들,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거리, 공간들을 담고 재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종의 영화넝마주의 같은 것이다(웃음).

 
고다르는 스스로 이 영화에 출현한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를 걷는 밀고자가 바로 고다르다. 밀고자는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고 그대로 고발하는 사람이다. 고다르가 제기하는 건 모럴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었다. 밀고자는 왜 밀고를 하고 연인들은 왜 배반을 하는가, 파트리샤가 계속 미셀에게 제기하는 건 이런 물음들이다. 왜, 무슨 의미인가라는 것. 하지만 고다르의 대답은 단순하다. 동어반복이지만 밀고자는 밀고를 한다. 연인들은 사랑을 나눈다. 고다르가 밀고자인 동시에 감독인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평가되기 이전에 눈으로 본걸 그대로 소상하게 전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되어 그는 당시 기법들, 테크닉 등 모든 것들을 위반하면서 새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네 멋대로 해라>를 지금 기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영화’라는 것이 존재한 상황들에 대한 면밀한 인식과 그 자체가 제대로 ‘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을 탈환하는 기획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저항적 행위를 했었고 그런 시도를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새로움을 꿈꾸려는 세대들은 불가능의 조건 안에서 타인의 손에 소유된 자신들의 것이라 믿는 영화를 탈환했다. 영화를 탈환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들을 담아낼 권리를 획득하는 것과 같다. 시각에서의 정당함을 찾는 것, 윤리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 판단 이전에 존재하는 사물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찍으면서 하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뤼미에르, 멜리에스로부터 출발되는 것이었다. 수많은 테크닉과 재활용을 재단되고 판단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 것, 그게 진정한 시작점이 아닐까. 영화를 가져오는 것, 내 것으로 가져온다는 말의 진정성이라는 건 영화를 삶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네 멋대로 해라>는 여전히 가치 있고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정리: 강민영)


*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의 개봉 50주년을 기념해 영화상영을 하고 고다르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름에 철학아카데미에서도 고다르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고다르의 영화와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식으로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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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1 11:30

    비밀댓글입니다

    • Hulot 2010.07.21 01:46 신고

      여름에 <미치광이 피에로>를 틀어요. 벨몽도도 나오니 다시 챌린지를 하셔도 좋을 듯 하네요~





<고다르의 자화상>을 상영한 후에 고다르와 시네마테크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고다르의 <영화사>를 설명하기보다는 
시네마테크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함인데, 고다르에 관해 더 많이 이야기를 한 듯하다. 좋아하는 사람앞에서 원래 실없는 소리를 많이 하는 법이다.    

최근의 '시네마테크 사태'와 관련해
시네마테크의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왜 고다르인가? 무엇보다 그가 동시대 누벨바그리언들중에서 가장 충실한 시네마테크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로메르, 트뤼포, 샤브롤도 시네마테크의 자식들이긴 했다. 필립 가렐과 같은 '포스트 누벨바그리언'들 또한 시네마테크의 자식들이었다. 그 외에도 자식들은 많다. 영화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은 많지 않으니 모두 자식들인 셈이다. 고다르가 특별한 것은 자기를 키워준 시네마테크에 보답을 해야 한다고 그 누구보다 강하게 느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가 훔치는 예술임을 랑글루아의 영화박물관(시네마테크)에서 터득했고 자신이 빚진 것에, 빌린 것에, 훔쳐간 것에 정당하게 셈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화와 예술의 영역에서 셈은 더 정당하게 치러야만 한다. 트뤼포도, 샤브롤도 그만큼 하지 않았다. 

영화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그 때문에 영화에 되돌려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한 사람. 그가 고다르다. 종종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작가들, 비평가들, 기자들, 영화인들, 영화애호가들도 영화에 자신이 무엇을 되돌려주어야 하는지 생각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구든 잊기 쉬우니까. 삶은 고역이니까.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지 영화가 '나'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작가 이전에 작품이 있듯이 영화인 이전에 영화가 있다. 살아 있는 우리 모두는 결국 영화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고다르는 이 단순한 사실을 일깨운다. 영화인들은 모두 영화에 빚진 존재들인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기만 했다면 겪지 않을 고통을 영화감독이 되어 경험했다고 장 르누아르가 말하듯 그들은 영화 때문에 힘들어했지만 또 영화로 영광을 얻은 존재들이다. 그러니 최소한 영화에 빚졌다면 그것에 채무의식을 느껴야 한다. 변제할 생각을 해야하는 것이 정당한 태도다. 고다르는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다. 

볼 수 없었던 영화들을 시네마테크에서 보면서 고다르는 본 영화들이 아니라 보지 못한 영화들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한다. 진정한 영화는 결국은 볼 수 없는 영화들이라 생각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준, 맹인의 눈을 뜨게 해준 시네마테크에 고다르는 감사를 잊지 않았다. 실제로 여러번 그렇게 했다. 그 하나가 1966년에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뤼미에르 회고전'에서의 긴 연설이다. 고다르는 이 연설에서 자신이 뤼미에르의 영화를 발견한 곳이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이기에 뤼미에르의 영화에 대한 찬사를 바치면서 동시에 시네마테크, 랑글루아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고마워요 랑글루아'라는 표현을 수십번도 넘게 말했다. 영화의 아버지인 뤼미에르(불어로 뤼미에르는 빛을 말한다)는 영화가 빛의 예술임을 보여주었다. 그가 스크린의 흰 벽면에 빛을 투사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는 뤼미에르의 영화를 다시 투사했다. 뤼미에르의 영화가 시네마테크에서의 상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고다르에게 시네마테크는 단지 영화예술의 역사를 배운 장소가 아니다. 그곳에서 고다르는 영화 예술에의 믿음을 품을 수 있었다.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빛을 되돌려주는 장소였고,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영화들, 결코 보지 못한 영화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작가 이전에 작품이 있듯이 작가 이후에도 작품이 존재(해야만)한다. 고다르는 만약 장 비고의 죽음 이전에 시네마테크가 있었다면 고몽영화사와 겪은 곤경 이후에 그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결국 영화를 만들 힘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의 표현이 중요하다.
고다르는 <영화사>에서 '아마도 이러 이러했을수도 있었을 것이다'라는 가정법 표현을 반복해 쓰고 있다. 그는 '있었던 역사들'(역사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종종 이러한 일들에 과도하게 집착한다)이 아니라 '있을 수도 있었을 역사들'에 주목한다. 이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아마도 무르나우가 그렇게 빨리 죽지 않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케르도, 멜빌도 그렇게 빨리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레오네는 소비에트 혁명에 관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고, 브레송도 천지창조에 관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길종도 영화를 더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영화의 모든 역사는 그러므로 있을 수 있었을 가정법의 역사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는 회합의 장소였다. 이 곳에서 영화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형식이자 실체이기도 했다. 사랑만이 아니라 영화의 우정을 발견한 곳이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결국 사랑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하지 않는다.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영화로 우정을 나누기란 어려운 법이다. 영화적 회합은 영화에 사랑을 느낀 사람들의 우애의 공동체다. 고다르는 시네마테크의 회합을 그렇게 봤다. 우정의 장소에서 고다르는 영화적인 레지스탕스가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아니 제대로된 레지스탕스를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국민위에 군림하는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 미국에 의한 영화의 점유와 영화만들기의 획일성에 대항하는 예술적 저항을 여전히 벌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나이가 들수록 예술가들도 평화나 화해를 애매하게 주장하곤 하는데, 고다르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예전보다 더 꼬장꼬장하게 싸움을 건다. 아마도 지금 생존하는 작가들 중에서 칠순을 넘기고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두명일 것이다. 고다르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스트우드는 최근작에서 총을 잡았고 고다르는 여전히 시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스트우드도 훌륭하지만 나로서는 고다르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고다르도 시네마테크에 빚을 졌다지만 시네마테크도 영화적으로는 그에게 빚을 졌다. 그러니 고다르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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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 2009.03.19 06:28 신고

    영화라는 치명적인 미는 어느 한편을 불구로 만들기도 하는데 우정은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란 말씀이시지요? 우리의 영화는 어느 한 편의 짝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되어선 안될것이란 말씀이지요?

  2. Hulot 2009.03.20 04:49 신고

    영화에의 사랑이 열광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탐욕과 그릇된 욕망으로 향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나 사랑을 주장할 수 있고 또 그것을 특권적인 것으로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의 우정은 상호적인 것이기에... 그러니까 언제나 상호적인 반성과 반조가 뒤따르는게 아닐까요.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영화로 우정을 함께 나누려는 친구들이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하게 됩니다...

  3. 메이비 2009.03.21 17:26 신고

    <영화사>와 <JLG/JLG;자화상>을 보면서 느낀 것은,
    고다르는 우리가 미래에 도착할 곳에 이미 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면 우리는 언제나 먼 과거의 그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도 시테마테크 안일 것입니다... 오래전 고다르도 우리처럼 미래를 만난 곳이 시네마테크였겠죠. 그 공간에 도착해있는 무수한 역사들과 영화들, 그리고 고다르라는 영화/역사. 몇십 광년 전에 출발한 별빛처럼 그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영화와 역사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자화상>은 그가 영화/역사에 들어가는 행로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와 우리의 시차는 광활한 우주공간만큼 너무 크고, 그래서 그만큼 그의 슬픔이 클 것 같아서 더욱 가슴 아픕니다.
    Thanks 고다르, Thanks 서울아트시네마.

 





“영화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장 뤽 고다르는 20세기의 역사를 결산의 자세로 임해 만든 <영화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화사>는 고다르의 가장 야심적인 작품으로 1988년부터 시작해 10년만인 1997년에 완성한, 그의 영화적 삶과 기억을 도합 네 시간 반에 담아낸 대작이다. 기획의 원대함과 치밀함으로 보자면 19세기 파리에서 형성된 산업문화에 대한 방대한 인용으로 근대성의 원현상을 그려낸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비견할 만하다. 고다르는 이 작품으로 영화가 ‘거대한 역사’를 이룬다고 말하는데, 다른 역사가 언제나 축소될 뿐이라면 영화는 그 역사를 스크린에 크게 투사하기에 거대하다는 것이다. 고다르는 영화가 무의식의 밤의 역사를 이루기에 20세기 역사의 거대한 공백과 부재가 스크린에 담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고다르는 그런 영화가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다’라 말한 것이다.
 
고다르의 도발적인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특별한 역사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다르에게 영화는 20세기에 꽃을 피운 19세기적 사건이다. 19세기 말의 집단적인 꿈이 20세기에 현실화된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19세기의 꿈을 투사하는 능력을 가졌을지언정 그것의 현실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고다르의 판단이다. 영화가 현실을 외면했고, 이어 현실이 영화에 복수를 감행한다. 이것이 고다르가 보는 영화/역사의 비극이다. 그는 <영화사>에서 이러한 역사의 비극이 1940년대 초에 픽션의 거장들이 그들의 카메라를 아우슈비츠에서 딴 곳으로 돌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한다. 영화는 현실을 기록하는 힘(영화는 무엇보다 기록의 매체로 탄생했다)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우슈비츠에서 발생한 비극을 결코 담아내지 않았기에 역사적 책무를 등졌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총 8부(네 개의 장이 각각 A,B 두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로 구성된 <영화사>의 1A에서 고다르는 “학살한 것을 망각한 것도 학살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희망, 영화의 역사, 언어가 없는 역사, 밤의 역사. 신은 인간을 버렸다. 영화관의 어둠속에서 50년간 사람들은 냉혹한 현실을 상상을 통해 따뜻하게 했지만 이제 현실은 복수를 시작해 피와 눈물을 추구한다. 극영화의 거장들은 현실의 역습을 제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영화가 현실의 비극을 담아내지 못하면서 현실 또한 영화를 저버린 것이다. 
 
고다르의 역사인식은 교과서적인 영화사의 이해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그에게 소명이다. 그는 작품으로 특별한 세계를 표현한 예술가일뿐만 아니라 영화가 무엇이고,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가를 탐구한 소명의 작가다. <영화사>는 그런 점에서 영화의 실패를 역사를 통해 구제하려는 그의 ‘사적’인, 가히 무모하다고 할만한 시도가 담긴 작품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사 기행’과 같은 다큐멘터리와는 완전히 다른 기획이라는 말이다. 물론 고다르의 ‘시네필’적 취향이 <영화사>를 만들게 된 계기이긴 하다. 그럼에도 80년대 중반에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결산하는 시도를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역설적으로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85)를 꼽을 수 있다. 클로드 란즈만은 <쇼아>에서 수용소의 비극을 재현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배우나 엑스트라의 출연을 금지시키고, 당시의 기록영상도 일체 사용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단지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의 증언과 회상으로 20세기의 최대의 비극이라 불리는 수용소의 공포를 담아냈다. 대량학살을 해석하고 재현하는 영화의 특별한 권리에 ‘금지’와 ‘한계’를 선언한 것이다. 

고다르는 란즈만의 시도에 반기를 들었다. 고다르가 보기에 란즈만의 시도는 '실패의 실패'를 반복한다. <영화사>에서 고다르는 이미 영화가 역사에서 이중적인 실패를 보였다고 말한다. 1940년대에 아무도 수용소를 촬영하지 않았고 그것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사의 비극이 발생했는데, 동시에 스크린에 투영된 극영화의 영상에서 그러한 비극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또한 비극의 전주였다. 이를테면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이나 채플린의 <독재자>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다르는 이러한 이중적 실패가 결국 전후 유럽영화의 죽음과 미국영화의 승리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러니 역사의 실패를 넘어서야 한다. 
 
<영화사>는 비극의 역사/영화사를 담아내는 것으로 20세기의 역사와 영화를 마주하게 한다. 고다르는 마치 상을 치르듯이 과거의 영상과 죽은 자들을 불러들인다. 인용되는 ‘스토리/역사(들)’이 워낙 방대해 통상의 영화를 보는 몇 배 이상의 집중력을 요구할 정도의 정보의 과잉에 관객들은 쉽게 압도당할 것이다. 뉴스릴, 극영화, 회화, 문자, 수많은 인용들이 거의 무차별적으로 화면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진다. 다양한 편집기술의 합성, 접합, 분절이 복잡한 이미지의 성좌를 그려낸다. 가히 20세기의 ‘모든 역사들’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의 혼령들이 떼를 이뤄 ‘죽음의 춤’을 추는 형국이다. 이 장엄한 풍경은 이해를 바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에 빠져들어가고 삼투되기를 요구한다. 고다르의 영화는 잠깐 환희에 잠겼던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 과연 지난 세기의 비극과 전쟁이 지나가버린 것인지, 우리가 정말 20세기와 제대로 작별을 고한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김성욱)


*  장 뤽 고다르 <영화사> 특별전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3월 10일부터 15일까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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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arview 2009.03.10 20:22 신고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요.

  2. Hulot 2009.03.11 03:35 신고

    맹인이 되는 것과 눈물을 흘리는 일은 같은 일이라고 하죠...고다르의 <영화사>는 영화를 보는 눈의 본질이 시각이 아니라 눈물임을 말해줍니다.

  3. Hulot 2009.03.20 04:51 신고

    ............................

* 13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씨네21 데일리(2008.10.02일자)'에 부산에 온 안나 카리나를 위해 쓴 글입니다. 

뉴 커런츠 심사위원장으로 부산 찾은 장 뤽 고다르의 뮤즈, 안나 카리나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우연히 보지 않았다면 안나 카리나와 만날 인연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반대가 더 진실에 가깝다. 안나 카리나가 없었다면 고다르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덜했을 것이다. 혹은 우리가 누벨바그(195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젊은 영화작가들에 의한 전위적인 영화운동)라 말하는 고다르의 영화경력은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다르의 작가적 연대기에서 누벨바그의 시기(1959-1967)가 종종 ‘안나 카리나 시절’이라 불릴 만큼 그의 영화에서 카리나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고다르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도 중후기 영화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거의 만장일치로 초기의 고다르를 좋아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그의 영화에서 젊음의 기운이 넘쳤기 때문인데, 그 발랄함과 신선함은 모두 안나 카리나의 행운의 선, 허리의 선, 도주선, 운명의 손금선 덕분이었다. 안나 카리나는 고다르의 영화적 젊음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안나 카리나에의 매혹은 동시대 프랑스 여배우들, 이를테면 카트린 드뇌브, 델핀 세리그, 혹은 브리지트 바르도와 같은 여배우에게 품게 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일단 그녀가 감독과 맺는 관계가 달랐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제스처, 그녀의 퍼포먼스, 그녀의 말 하나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물론 이는 그녀를 담아낸 작가에게서 사랑이 넘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 이는 그리피스가 릴리언 기쉬에게, 조셉 폰 스턴버그가 마를린 디트리히에게, 로셀리니가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안토니오니가 모니카 비티에게 했던 헌신을 떠올리게 한다. 한 명의 영화감독이 한 배우의 육체에 감동해 그녀가 지닌 모든 능력들을 영화에 담아내기 위해 헌신한 영화의 역사 말이다. 고다르가 예술에 빠진 피그말리온이었다면 안나 카리나는 그가 만들어낸 조각상 갈라테아인 셈이다. 안나 카리나가 출연한 비누 광고의 이미지에 현혹돼 고다르가 그녀에게 무턱대고 자신의 첫 작품 <네 멋대로 해라>(1959)에 출연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덴마크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파리로 건너와 <엘르> 등 잡지의 모델을 거쳐 피에르 가르뎅의 모델로 활동했던 안나 카리나(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이 예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는 고다르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녀와 카리나가 조우한 것은 두 번째 작품인 <작은 병정>(1963)에서이다.



<작은 병정>에서의 안나 카리나는 자신을 ‘베로니카 드레이어’라 말한다. 이 기이한 표현은 그녀가 어떤 흔적을 담아내는 이미지를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이를테면 그녀는 은밀함 속에서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는 폭로자이자 계시자이다. 고다르는 덴마크에서 온 안나 카리나에게서 <잔다르크의 수난>을 만든 드레이어의 흔적을 발견하려 했고 우리는 그녀의 얼굴에서 비가시의 사고와 영혼을 떠올린다. 영화 속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남자 주인공 브뤼노 포레스티에는 그녀를 바라보며 ‘하나의 얼굴을 촬영할 때 우리는 그 뒤에 있는 영혼을 촬영한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안나 카리나의 얼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카리나의 얼굴에는 순수함, 그만큼 쉽게 깨질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녀가 머리를 귀로 넘기면서 정면을 쳐다보는 모습에서, 그녀의 어깨의 곡선에서, 그녀의 평온한 시선에서, 신비로운 미소에 아름다움이 있다.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1988~98)에서 마네의 그림에 안나 카리나의 얼굴을 기입하는 것은 그래서 적절한 것이다. 카리나의 얼굴에는 회화적 이미지로 향하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치명적이라 함은 그녀의 얼굴이 영화의 운동을 정지시키는 포즈에서 발산되는 매혹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화 속의 인물을 연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 배우의 육체의 매혹을 발산하는 그녀만의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그 아름다움은 사진을 찍는 브뤼노 포레스티의 표현을 빌자면 ‘1초에 24번의 죽음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녀의 첫 이미지는 이를테면 죽음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안나 카리나는 그녀가 보여준 수난의 모습으로 나를 더욱 매료시킨다. 가령 가련한 죽음을 맞이하는 매춘여성 나나를 연기한 <비브르 사 비>(1962)에서 카리나의 얼굴은 잊기 힘들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성은 <국외자들>(1964)에서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는 파리의 겨울을 배경으로 회색빛의 파리 교외, 지하철, 뱅센느 항구 근교의 작고 평범한 카페들과 같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장소들을 무대로 하고 있다. 안나 카리나는 이 영화에서 두 명의 악당 사이에서 고초를 겪는 오디르라는 젊은 여인을 연기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카리나는 지하철에 탄 승객들의 피곤한 얼굴들을 쳐다보며 ‘지하철에선 항상 슬프고 불행한 사람들을 보게 되죠. 저 사람들을 보세요. 왜 저런 얼굴들을 하고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카리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담긴 슬픈 사연들을 읽어내려 한다. 그러면서 루이 아라공의 시에 장 페라가 곡을 만든 샹송을 노래한다. 슬픔을 느끼는 여인, 영혼을 읽어나가는 여인, 그리고 노래하는 여인.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퀸 크리스티나>에서의 그레타 가르보의 슬픈 표정을, 존 휴스턴의 <야생마>에서 마릴린 먼로의 약하고, 불안하고, 흔들리는 표정을 발견한다. 뭐가 그렇게 당신을 슬프게 하는 거죠,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데. 당신이 웃으면 마치 내게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안나 카리나의 얼굴에는 파국을 맞은 사랑의 슬픈 표정이 담겨 있다.


불가능한 인물들의 만남을 몸으로 표현하다


내가 안나 카리나에게 끌리는 것은 아마도 그녀가 발산하는 이질성, 모순성, 이중성의 매혹 때문이리라. 고다르는 <국외자들>에서 안나 카리나의 캐릭터를 설명하면서 그녀가 연기하는 오디르가 19세기 영국 낭만주의의 전통에서 등장한 인물로, 그러나 그녀는 사실 더 직접적으로는 세기 초의 독일 고전주의에서 기원한 인물이며 그녀 안에는 천진난만함과 상냥한 마음이 혼합되어 있고, 토마스 하디의 불행한 테스와도 같은 자긍심을 지닌 인물이라 말한다. 동시에 그녀는 니콜레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의 캐시 오도넬, 에른스트 루비치의 <클러니 브라운>의 제니퍼 존스인데, 최종적으로 그녀의 운명은 프리츠 랑의 <한번 뿐인 삶>의 실비아 시드니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모든 인물을 한 명의 여배우가 몸짓에서, 표정에서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안나 카리나는 그런 불가능한 인물들의 만남을, 영화와 역사를 가로지르는 그 흔적들을, 그 강렬한 만남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해냈다.



안나 카리나에게는 서로 다른 극점으로 향하는 이중적인 선이 있다. 그 하나가 제스처와 포즈, 얼굴로 향하는 내적인 선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움직임과 퍼포먼스, 그리고 샹송으로 향하는 외적인 선이 있다. 이를테면 <미치광이 피에로>(1965)에서 안나 카리나는 이런 이중적인 면모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그녀는 여기서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아이자 마리안-르누아르이며 마네의 여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모델이자 장 르누아르를 영화로 이끈 여인, 그러니까 회화적 이미지와 영화적 전통의 상속녀이다. 그녀는 또한 사유의 형상이기도 하다. 주인공 장 폴 벨몽도는 그녀가 웃을 때, 그녀가 ‘날씨가 좋다’고 말할 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떠올리기 위해 고심한다. 영화의 처음 부분에서 카리나는 삶이 소설과 다르다는 것이 자신을 슬프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카리나는 점점 그녀의 운명선과 도주선을 드러내고 무엇보다 사랑을 노래한다. 움직이고 뛰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또 다른, 진정한 매력중의 하나다.



안나 카리나는 고다르와 결별 후에 세즈루 갱스부르의 노래를 받아 뮤지컬 <안나>(1966)에 출연했고, 자크 리베트,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그리고 이어 몇 편의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의 현재는 ‘노래하는 여인’으로 더 유명하다. 그녀의 샹송 앨범은 프랑스와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하는 노년의 안나 카리나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생각해 본다. 이제는 그녀에게서 <여자는 여자다>에서 ‘난 아주 매정해요. 그래도 화내는 남자는 없어요. 난 정말 예쁘니까요’라고 노래하는 발랄한 여인의 이미지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며 그녀의 얼굴에서 마리안-르누아르가 아니라 안나 카리나의 흔적을 더 찾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는 순간에는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느끼는 어지러움을 아마도 동일하게 경험할 것 같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 이번 "13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원래 내려갈 계획이 없었다가 예정없이 내려가서는 또 계획도 없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있었다. 그 중 몇 가지 이유는 물론 영화를 보는 것이었지만, 다른 몇 가지는 클레르 드니를 만나고, 필립 그랑드리외를 만나고, 타비아니를 만나고, 그리고 안나 카리나를 보는 것이었다. 안나 카리나의 마스터클래스가 있던 날, 행사가 있던 해운대 근처의 그랜드 호텔에 들어가다 차에서 내리는 안나 카리나와 만났다. 이제 얼굴만으로는 과거의 그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만큼 모든 것이 변해보였다. 게다가 그렇게 뛰고 달리고 노래부르던 그녀를 지금의 모습에서 상상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문득 2005년에 퐁 데 자르 근처의 갤러리에서 열렸던 자크 드미의 전시회에서 그녀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크 드미, 아네스 바르드와 함께 고다르가 안나 카리나와 결혼했을 때 행복한 표정의 사진이었다. 새침을 떨듯이 안나 카리나는 예쁜 미소를 짓고 있다. 위에 있는 사진은 그 때 전시회에 걸린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고다르와 카리나의 행복했던 시절이다. '마스터클래스'에서 카리나는 고다르가 개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었는는 관객의 질문에 "잠깐 담배사러 나갔다 온다고 말하곤 3주간 집에 안들어온적이 있었다"고 말해 사람들이 한 참을 웃었다. 그래도 그녀는 고다르와의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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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희진 2009.03.30 15:12 신고

    안녕하세요. 글 제 블로그로 퍼가도 괜찮을련지요?

  2. Hulot 2009.03.31 11:44 신고

    예.. 가져가셔도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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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가 5월 31일부터 6월 7일 사이에 개최될 12회 텔아비브 국제학생 영화제에 참가하기로 했다가 최종적으로 참석을 캔슬했다고 하네요. 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문화 보이콧을 호소했던 팔레스타인 그룹(PACBI: Palestinian Campaign for the Academic and Cultural Boycott of Israel)으로부터 '텔아비브 영화제에 참석하는 것은 결국 팔레스타인 붕괴후에 성립한 이스라엘의 건국 60주년을 축하하는 일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담긴 공개서한이 공개되면서 아마도 고다르가 영화제에의 참가를 거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텔이비브 영화제'에 참석해 고다르는 명예 게스트로 학생들에게 마스터 클래스를 할 예정이었다고 합닏. 아마도 2005년에 공개된 <아워 뮤직>에서의 강연과 유사한 마스터클래스가 아닐까 싶은데. <아워 뮤직>에서의 리버스 쇼트에 관한 이야기가 이스라엘에서는 어떻게 변주될까 궁금했으나, PACBI의 주장도 일리가 있으니...

우리는 먼 바람 속 우리들의 집만큼/가벼워졌다. 우리는 구름 속 이상한 존재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체성의 땅/그 중력에서 풀려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우리는 할 것인가, 유랑이 없다면,/그리고 긴 밤이 없다면/강물을 응시하는 이 긴 밤이?
- Mahmoud Darw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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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마도 2008.06.20 13:35 신고

    유랑이 없다면... 우리, 디아스포라들. 그래서 천막과 스크린이 필요합니다. 텔아비브를 생각하니 <JLG/JLG>의 여성판 같던 샹탈 아커만의 <Down there>가 생각납니다. 그 도시의 가공할 폭력과 테러의 공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던. 그곳 한 집에 갇혀 오로지 카메라만 의지해 숨을 쉬던. 그리고 화면 가득 출렁이던 바다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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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마감하는 90년대에 들어서서 고다르는 내내 ‘상중喪中’에 있었다. 1988년부터 시작해 10년 만에 완성한 4시간 반에 이르는 대작 <영화의 역사>는 물론이고, 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JLG/JLG>에서 고다르는 이미 ‘다른 사람이라면 죽음이 방문하고 상에 복종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우선 상에 복종하는 것으로부터 삶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추도가 서거에 앞선다는, 그것이 고다르가 자신을 생각하는 방식이다. 쉽게는 방문할 것 같지 않은 죽음을 기다리면서 상으로서의 생애를 계속 보내온 시네아스트의 고독한 초상이 <JLG/JLG>에서 볼 수 있는 노년의 고다르의 모습이다. 그는 시인만이 그 임종을 제대로 추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다르의 자화상 특별전’은 노년의 고다르를 살펴보는 기회다. 

<영화의 역사>로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고다르는 <사랑의 찬가>로 21세기의 첫 시작을 아주 다른 기운으로 맞이했다. 20세기의 영화와 역사를 멜랑콜리한 결산의 자세로 임했던 고다르가 이제 사랑에 대해, 젊음에 대해 말한다. <사랑의 찬가>는 노령의 고다르가 누벨바그 시절의 젊은 기운으로 되돌아가 만든, 제목 그대로 사랑을 예찬하는 아름다운 영화다. <사랑의 찬가>에는 고다르가 젊은 시절을 보낸 자신이 사랑한 파리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예술영화관들이 밀집한 생 미셀의 거리들, 몽파르나스, 세갱 섬을 고다르는 <사랑의 찬가>에 새롭게 담아내는데, 그에게 파리는 시간을 초월한 그 무언가가 간직된 장소라 할 수 있다. 그 거리에서 고다르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젊은이 에드가의 눈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난 뭔가를 생각한다. 뭔가를 생각할 때 사실, 난 다른 것을 생각한다. 다른 걸 생각할 때만 뭔가를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풍경을 봐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머리속에서 다른 풍경을 떠올리고 예전에 내가 본 것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예찬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 영화가 그리는 사랑은 단순한 의미의 남녀의 사랑은 아니다. 이를테면 1부는 커플의 이별을 그리고 있고, 게다가 주인공 에드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의 기획 또한 실패로 끝난다. 그 어디에도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찬가’는 없어 보인다. ‘진정한’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2부로, 여기서 고다르는 역사와 관련해 레지스탕스의 사랑을 끌어들인다. 1, 2부의 구성은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를 각각 흑백과 컬러로 다르게 표현한다. 통상적으로는 현재가 컬러, 과거가 흑백으로 촬영되지만 <사랑의 찬가>에서 고다르는 과거를 강조하는 방법으로 그 반대로 활용하면서 갑자기 밀어닥치는 파도의 물결처럼 여러 영상을 이중인화로 보여준다. 하나의 영상을 다른 영상과의 관계 속에, 역사와 시간의 화면 안에 담아놓으려는 시도다.  

장 뤽 고다르는 같은 연배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마찬가지로 -둘은 모두 1930년생이다- 여전히 영화를 생산해내는 현역의 작가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이들은 70세를 넘기고도 활력을 잃지 않고 있는데, 이들의 후기작들은 공교롭게도 지난 세기의 전쟁에 대해 근심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버지의 깃발/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에서 2차 대전에 대해 질문했다면, 고다르는 〈아워뮤직〉(2004)에서 20세기가 다름 아닌 끔찍한 전쟁의 세기라 말한다. 이들의 영화는 잠깐 환희에 잠겼던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 과연 지난 세기의 전쟁이 지나가버린 것인지, 우리는 20세기와 정말 작별을 고한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고다르는 특히 그런 근심을 단테의 《신곡》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그려낸다.  고다르의 〈아워뮤직〉은 단테의 《신곡》을 따라 지옥 연옥 천국의 삼부로 구성돼 있다. 인문주의 르네상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정치가였던 단테는 파벌의 정치적 패배로 인해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유량하던 중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신곡》을 썼는데 이는 죽은 자의 세계로의 여정을 그린다. 〈아워뮤직〉이 그려내는 것도 그런 여정이다. 그 중 1부인 ‘지옥편’은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끔찍한 지난 세기의 전쟁 영상들로 가득하다. 다큐멘터리 화면과 극영화의 장면에서 빼온 전쟁의 장면들, 서로 살육을 벌이는 끔찍한 순간들, 탱크, 비행기, 포탄 등 전쟁에 사용된 살육기계들이 전시되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희생자들의 모습,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전쟁 기간 동안의 사라예보의 모습이 10여 분간 화면을 쳐다보기 힘들 만큼 지속된다. ‘이렇게 끔찍한 세상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과도 같다’라는 비탄이 절로 나온다.

끔찍한 지난 세기의 전쟁의 영상이 지나가면 ‘연옥편’이 시작되는데, 감독인 고다르가 직접 출연해 사라예보를 찾아가는 여정이 다큐멘터리의 터치로 그려진다. 공항에서 시작해 사라예보로 들어가면서 그곳의 일상적인 풍경이 펼쳐지는데 여기서 ‘찾아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를 찾아가 정말 그곳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를 지켜보는 것, 그것은 고다르가 영화작업을 통해 취했던 근본적인 태도이다. 고다르는 영화에서 카메라 본연의 기능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드라마를 직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탐구와 조사에 있음을 강조한다. 고다르는 여타의 영화감독과는 달리 영화가 예술이기 이전에 과학이며, 예술을 넘어선 신비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영화는 현실을 찍어야 하며, 그러나 거기서 결코 보이지 않는 진정한 현실을 담아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이자 신비로서의 영화다.

그가 방문한 사라예보는 1차 세계대전의 화근이 됐던 장소이며 1994년 3월에 발생한 대량학살이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고다르의 ‘찾아가는 행위’는 사실 뒤늦은 도착(이미 과거의 사건은 지나가버렸다)이자 타인(그는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다)의 방문이다. 그가 직접 방문한 사라예보에는 1차 대전의 직접적인 잔재나 비극의 현장은 사라지고 아주 일상적인 풍경들로 가득하다. ‘방문’은 그래서 뒤늦게 도착한 자가 흔적을 탐색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남아있는 것은 과거의 잔재, 흔적 뿐이다. 그렇기에 고다르는 마치 지질학자처럼 흔적을 탐색하며 일상의 풍경 안에서 과거의 역사와 기억을 소환해 온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총자국이 남은 폐허가 된 도서관, 시장에 모인 사람들, 노면을 달리는 전차 등 사라예보의 일상적 정취를 보여주는 장면에 고다르가 뜬금없이 미국 원주민, 즉 인디언의 유령을 등장케 하는 순간이다. 고다르는 이 장면에서 태연하게 ‘팔레스타인인과 마주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인디언들이다’라고 말한다. 이 순간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이방인들이 혼돈의 여행길에서 만난다’라는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이 예기치 않은 출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만남은 관객을 당혹케 하는데 그럼에도 믿기지 않는 ‘진실성’을 지닌다.

설명의 단서는 고다르가 시인들의 입을 빌어 표현하는 보들레르의 '코레스판던스'라는 시에 있다. 보들레르는 이 시에서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이따금씩 어렴풋한 말소리 새어 나오고, 인간이 그곳 상징의 숲을 지나가면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 별처럼 그리고 빛처럼 끝없이 넓고 어둡고 깊은 통합 속에 긴 메아리 멀리서 어우러지듯 향기와 색채와 소리 서로 화답한다’라 말하는데, 여기서 자연의 신전은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것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장소, 즉 영화의 3부에 해당되는 ‘천국’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사건들이 한 자리에 마주하는 곳, 팔레스타인인과 인디언이 마주하는 곳, 그 장소는 고다르에게 영화이다. 영화의 원리는 빛으로 향해, 그 빛으로 우리의 어둠을 비추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음악이다.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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