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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동시대 미국영화의 우울 본문

상상의 영화관

동시대 미국영화의 우울

Hulot 2013. 6. 6. 12:00

 

 

폴 토머스 앤더슨의 5년 만의 신작 <마스터>(2012)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 한다.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이야기의 시대가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곧바로 두 가지 궁금증이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의 대중적 상상력을 끌어와 보수주의의 회귀를 시도했던 레이건-부시 시대에 영화를 시작했다. 그에게 그렇다면 80년대를 경유한 50년대, 즉 아버지의 시대란 어떤 것일까? 둘째,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의 귀환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나는 이러한 궁금증이 결국 동시대 작가에 대한 세대론적 질문이자 역사적 위치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번주부터 부산 영화의 전당(www.dureraum.org)에서 열리는 ‘멜랑콜릭 시네마-동시대 미국 거장 3인전’은 이런 질문에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획전이다. 이 기획전의 세명의 작가들인 폴 토머스 앤더슨, 제임스 그레이, 토드 헤인즈를 연결하는 공통의 맥락은 어떤 것일까. 기획전이 준비한 세 가지의 설명이 있다. 첫째, 이들은 대체로 90년대 초에 등장해 산업적 시스템이 가장 완강한 미국에서 도리어 미국영화의 경이를 입증한 뛰어난 감독들이다. 둘째, 이들은 스타일과 작업 방식은 다르지만 장르적 관습에 기대지 않고 동시대인들의 우울한 내면을 치열하게 탐구해왔다. 셋째, 이들은 60년대 반문화의 반격의 시기에 태어나 이제 40대 초반(폴 토머스 앤더슨, 제임스 그레이)에서 50대 초반(토드 헤인즈)에 이르는 비교적 젊은 감독들이다.


나는 공통의 근거를 다른 식으로 말해보고 싶다. 너무 최근의 작가들이긴 하지만 이들의 영화를 세대론적인 측면에서 한번쯤 역사화 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가령 이 세 작가는 모두 레이건-부시 시대를 거쳐 90년에 들어 장편 데뷔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로빈 우드에 따르면 레이건-부시의 미국이란 국가적 상흔(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으로 상실된 자신감을 회복하려 시도한 시대로 영화는 새로 등장한 신우파(이들은 젊고 상승지향적인 전문직 종사자들로 이른바 ‘나’ 세대의 여피들이다)의 보수적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할리우드 배우 출신인 레이건은 1950년대를 떠올리게 했는데, 이때 1950년대란 대중의 상상 속에서 목가적인 소도시의 풍요로운 미국식 낙원같은 것이다. 시계가 갑자기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가난, 범죄, 노숙자, 가족과 지역사회의 붕괴 등으로 미국이 꿈을 상실하기 이전으로 안내한다. 소도시의 풍요로운 미국식 낙원에의 기대. 영화사가인 존 벨튼에 따르면 레이건-부시 시대는 2차대전 뒤 시작된 인구 이동이 마침내 새로운 국가적 인구 분포를 만들어낸 때이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나 농촌에 사는 인구보다 교외에 사는 인구가 더 많아지게 되었고, 미국의 교외화(이른바 서버비아, suburbia)는 소도시 가치관의 회귀를 의미 했다. 레이건-부시 시대의 영화는 그런 전통적 체제를 다시 상상하면서, 파괴된 가족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물론 주류영화들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들 세 감독은 그런 기류에 반대로 역류하는 서버비아의 작가들이다.

 

 

이를테면 토드 헤인즈는 장편 데뷔작인 <포이즌>(1991)에서 80년대의 보수화된 사회에서 더욱 폐쇄적이 되어 고립된 서버비아의 공포를 불온한 공기로 담아낸다. 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포이즌>은 ‘세편의 동성애적인 위반과 처벌이야기’로 각각 ‘호모’, ‘영웅’, ‘공포’라는 세 가지 제목의 다른 시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립된 감옥에서 사랑에 빠진 두 죄수,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친 7살 소년, 그리고 실험을 거듭해 괴물이 되어버린 과학자의 이야기는 게이, 질병, 서버비아를 공포의 회로로 연결한다. 80년대 레이건 시대의 보수화가 에이즈의 공포와 연결되는 식이다.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사는 주부 캐롤이 화학물질 과민증에 발작과 신경쇠약으로 시달리는 이야기인 <세이프>(1995) 또한 서버비아의 소박한 중산층의 삶을 질병과 연결한 80년대 사회의 불안을 그린다. <벨벳 골드마인> (1998)은 80년대 중반의 뉴욕에서 시작해 70년대에 발생한 영국 글램록 스타인 브라이언의 암살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출발점인 80년대란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결국 그들이 바뀌어버린 시대이다. 토드 헤인즈는 아름다운 교외 도시를 무대로 점점 천국에서 멀어져가는 미국사회의 풍경을 담아낸 <파 프롬 헤븐>에서 드디어 1950년대를 정면으로 다룬다. 물론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다. 이 영화는 50년대 보수적인 사회의 억압을 멜로드라마로 표현한 더글러스 서크의 작품을 원천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뉴욕에 거주하는 러시아 이민자들의 이야기인 <리틀 오데사>(1994)로 주목받았는데, 그의 영화는 이후에도 꾸준히 도시의 구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그는 도시, 가족의 유대, 비극적인 운명을 즐겨 다룬다. 인물들은 그리스 비극 같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가령 <더 야드>(2000)는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뉴욕 브라이튼에서 부모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가 경영하는 세탁소를 도와주는 주인공 레너드(와킨 피닉스)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실패로 끝난 그의 우울한 자살 시도는 가족, 자영업의 세탁소 영업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위 오운 더 나잇>(2007)은 제임스 그레이의 가장 야심적인 영화로 개봉을 놓쳤던 분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다시 보았으면 한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88년. 세계 경계가 불분명해져가는 시기이다. 소비에트의 붕괴 전야. 뉴욕의 러시아 마피아들은 자신들의 안정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경찰은 이들과 범죄와의 전쟁을 시도한다. 인기 절정의 나이트클럽 매니저로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밤의 세계를 살던 바비(와킨 피닉스)는 뉴욕 경찰서장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이제는 러시아 마피아를 일망타진하는 경찰 세계에 들어선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예기치 않게 가족이 붕괴하고 폭력을 경험하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함에 놓인 바비는 두 세계에 발을 디디면서 혼란을 겪는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야말로 전형적인 서버비아의 작가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산 페르난도 밸리에서 성장했던 어린 시절을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캘리포니아주 남쪽에 자리잡은 산 페르난도 밸리는 전후 교외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과거 유니버설, 월트디즈니, 워너브러더스 등의 영화사가 있었던 곳이다. 80년대 이래로는 포르노영화를 만드는 회사들이 자리한 지역(미국 내 포르노영화의 90%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이자, 80년대 중반에는 미 전역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포르노 업계의 내막, 섹스와 마약, 가족 이야기를 다룬 <부기 나이트>(1997)는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그의 개인적 성장사가 반영된 작품이다. 할리우드의 변방과 황폐화된 도시 근교는 미국적 꿈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주인공인 덕 디글러는 붕괴된 가족 대신에 포르노영화의 스타가 되어 다른 가족을 발견하려 한다.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1996)부터 폴 토머스 앤더슨은(의사) 가족 문제를 자신의 영화 속 주제로 확고히 했는데, 이는 <매그놀리아>(1999)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에 이르면 개인주의와 가족, 석유와 종교를 둘러싼 미국 자본주의의 창생기로 지극히 야심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언젠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미국 영화감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폴 토머스 앤더슨만이 손으로 필름을 편집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사막에서 손으로 우물을 파는 장면은 그래서 그의 고독한 영화적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그렇다면 영화의 개척자인가? 동일한 질문을 아마도 다른 두명의 작가들에게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김성욱(영화평론가)

*5월31일부터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멜랑콜릭 시네마- 동시대 미국거장 3인전'을 소개하는, <씨네21>에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