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유 끌로델, 혹은 유명한 무영인

 

 

 

 

 

<까미유 끌로델>(2012)은 브루노 뒤몽의 전작들과 비교할 때 꽤 일탈적인 작품처럼 보인다. 먼저, 제목의 연도(원제목은 ‘까미유 끌로델 1915’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시대극이다. 지금까지 7편의 장편을 만든 뒤몽은 한 번도 역사극을 만든 적이 없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동시대의 문제를 다뤘다. 둘째, 줄리엣 비노쉬의 출연이 하나의 사건이 될 만하다. 뒤몽은 데뷔작인 <예수의 삶>(1977)이래로 아마추어 배우를 기용하는 것을 영화적 원칙으로 고수해왔다. 배우들의 과잉의 연기나 분명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관습적인 연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로베르 브레송처럼 그는 배우보다는 인물의 물질성에 더 관심을 보였다. 물론 육체에 우선에 두는 것은 거기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혼과 정신의 문제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이다. 줄리엣 비노쉬의 출연은 그러므로 그의 경력에서 일탈처럼 보인다.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돌연한 변화는 비노쉬가 먼저 그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기에 시작됐다고 한다. 그는 고심했고, 마침 카미유 클로델에 대한 전기를 읽던 차에 비노쉬를 캐스팅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의 선택을 옳았다고 생각한다.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역사적 유명인을 다루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유명인을 기용하는 것이 어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의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뒤몽의 영화에서 특별한 것은 까미유 끌로델을 마치 유명한 무명인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명 배우인 비노쉬를 데려와 그녀를 무명인으로 취급하는 것. 그야말로 뒤몽적인 방식이다.

 

관능적인 시선

 

 

 

<까미유 끌로델>은 짧은 설명적인 자막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영화의 끝에서 이와 유사한 설명을 다시 한번 접하게 될 것이다. 때는 1915년. 아비뇽 근처 몽드베르그 정신병원. “1864년생 빌뇌브 출신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은 작가 폴 끌로델의 누나로 로댕의 연인이자 제자로 15년을 함께했고 1895년 헤어졌다. 1913년 부친이 타계하고 가족들은 파리 작업실에서 10년간 은둔하던 그녀를 정신이상을 이유로 파리 근교에 입원시켰고 그 후 프랑스 남부 몽드베르그로 옮겼다.”

이 짧은 자막을 제외하자면 이 영화에는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어떠한 부연설명이 없다. 이 자막 또한 그녀를 폴 끌로델의 누나이자 로댕의 연인이자 제자로 설명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뒤몽은 까미유 끌로델을 위대한 예술가로서 다시한번 보여주려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단지 정신 병동에 감금된 한 여인일 뿐이다. 방점은 예술가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시간을 허비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뒤몽은 그녀의 삶 전체를 보여줄 생각이 없고, 단지 1915년의 어느 삼일간의 그녀의 평범한 일상만을 묘사한다. 정신병동에의 그녀의 감금, 무료한 일상들, 고통스러운 삶들이 전부이다. 이처럼 유명한 예술가를 무명인처럼 취급하는 것이 꽤나 이상한 방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영화 마지막의 설명적인 자막은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던가를 알려준다. “까미유 끌로델은 이후 29년의 세월을 더 보냈다. 1943년 10월 19일 79세 나이로 타계했고 집단 매장을 시켜서 시신도 찾지 못했다. 1955년 2월 23일에 죽은 폴 끌로델은 마지막까지 면회를 왔었지만 장례식엔 참석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끌로델은 죽어서도 오랫동안 무명인으로 남았다. 그녀에겐 무덤조차 없었다고 한다.

 

뒤몽의 영화는 뒤늦게 만들어진 그녀에 관한 전설을 뒤집거나 숨겨진 예술적 천재성을 조명하는데 하등의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을 묘사하는 것도 배제되어 있다. 가령, 그녀가 로댕과 어떻게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사랑을 나누었는지, 그리고 어떤 예술적 성취를 보였는지, 등등의 문제는 논외다. 우리가 결국 보게 되는 것은 그녀의 피해망상과 고통들이다. 그 고통은 지극히 물리적이다. 뒤몽은 정신질환을 앓는 실제 사람들을 촬영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덕분에 비노쉬는 통제가 불가능한 환자들과 즉흥적인 연기를 해야만 했고, 이 시도는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몇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까미유는 그들 속에서 참을 수 없음의 상태에 빠져 “이건 사람 사는게 아니다. 저 인간들의 괴성도 지겹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 또한 동생 폴 끌로델의 방문 소식을 듣고는 미친 여인이 하는 행동과 마찬가지로 '할렐루야'를 외치며 정신병동을 뛰어다닌다. 이 장면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장 밝고 순수한 기쁨의 순간일 것이다. 그 외의 시간들 대부분에서 그녀는 감금된 존재로서 순수하게 주변의 사람들과 풍경들, 빛들, 사물들을 보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가 시골의 전원의 풍경을 보거나 나무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리고 실내에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쳐다보다 맞은 켠 의자에 앉은 두 명의 환자들을 바라보는 장면들은 그녀가 처한 고통의 상황을 망각하게 할 만큼 순수하게 아름다운 장면들이다. 우리는 이런 장면들에서 눈에 보이는 불가해한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감지하려는 까미유의 신체의 예민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감옥과도 같은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기에 더 예민하고 관능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뒤몽의 예술적 성취가 이런 순간들을 포착하는 데에 있다. 그는 시선을 관능적으로 표현하는데 탁월한 작가이다.

 

지상의 시선과 예술가의 손

 

 

 

까미유는 종종 멍하니 나무들을, 혹은 풍경들을 쳐다본다. 이 무료한 행위는 그럼에도 밖의 세계로의 눈빛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로 향하게 한다. 그녀는 스스로 납치되었다고 생각하는 정신병동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그녀의 기대는 구체적인 대상을 갖고 있다. 까미유는 동생 폴 끌로델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어쩌면 폴의 도움으로 수용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것이다. 폴 끌로델의 도착의 여정과 짧은 만남을 보여주는 영화의 후반부는 그러므로 전반부의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어떤 질문처럼 보인다. 누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경을 갖고 있던 폴은 그녀가 수용소의 감금된 30년간 공식적으로 열네 번의 방문을 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의 세 번의 방문을 포함하면 까미유는 30년간 일 년에 한 번도 되지 않는 외부와의 접촉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가족들, 특히 어머니 클로델 부인의 엄격한 지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 또한 권력과 수단, 신앙심이 돈독한 폴이 퇴원해도 좋다는 의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정신병동에 방치해두고자 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폴은 까미유를 만나기 전에 먼저 사제에게 일종의 고백과도 같은 말을 남긴다. 그는 아르튀르 랭보의 시 덕분에 새로운 빛을 보게 되었고 유물론자인 자신이 복종을 통해 평안을 얻는 신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폴과 만났을 때 카미유는 그의 신앙심에 의문을 표한다. “신이 있다면,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가?” 까미유는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달라 말하지만 폴은 그녀에게 “그것은 신의 알려지지 않은 의도일거야”라 말한다.

 

폴의 도착은 이 영화에 뒤몽의 전작들, 가령 <하데비치>나 <아우사이드 사탄>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신의 문제를 개입시킨다. 폴은 자신의 믿음에 충실하고, 누이의 가혹한 운명보다는 신을 믿지 않았던 그녀의 개종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중에 의사에게 예술가란 직업은 최악이며 예술작업이 대단히 위험한 것이라 마음의 균형을 쉽게 깨뜨리고 안정적으로 살기 힘들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런 장면들은 뒤몽의 영화가 결국 정신적인 면의 두 가지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 하나는 물론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다. 예술에 바쳐져야할 까미유의 능력은 수용소에 감금되어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런 까미유에게 폴은 예술 대신 신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대신하는 종교. 그 끔찍한 치환. 그리하여 이 영화의 짧은 장면 하나를 아마도 중요하게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까미유는 정원을 산책하다 잠시 땅에 시선을 두고 진흙을 잡아 손으로 주물럭거린다. 아주 짧은 순간이다. 이 장면은 이전에 그녀의 올려다보는 시선들(아마도 영혼과 정신, 혹은 신에의 어떤 열망들을 표현하는 듯한)과 대비되는 내려다보는 지상의 시선을 반영해 그녀를 흙과 대지로 이끌리게 한다. 흙. 물질. 그리고 그것을 만지는 예술가의 손. 물질을 통한 예술적 구현, 즉 조각. 예술가는 이러한 물질을 통해 정신을 구현한다. 그런데 그녀가 이러한 활동을 하지 못할 때 그녀는 순수하게 정신의 영역에 도달하겠지만 이미 그것은 예술이 아닌 종교가 될 것이다. 실제로 까미유는 유배된 자로서 정신병원에 머물면서 창작을 했던 반 고흐나 앙토넹 아르토와는 달리 더 이상 흙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그저 계란이나 감자 껍질을 벗기는 일상적인 일에 쓰였다고 한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 브루노 뒤몽의 <카미에 클로델>의 개봉시에 '씨네21'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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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5.01 16:39

    비밀댓글입니다

  2. 김혜선 2016.11.13 07:19 신고

    영화를 보게됐는데 조금 어렵네요
    감독은 종교와 예술을 말하고자 하는것 같은데 무얼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까미유가 흙을 만지작 거리다 버려버린 그 장면의 의미는 무엇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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