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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구로사와 기요시의 나의 영화론 본문

영화일기

구로사와 기요시의 나의 영화론

Hulot 2023. 12. 4. 13:08



얼마전 출간된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오큘러총서, 홍지영 옮김)의 첫 챕터에 실린 ‘나의 영화론’은 2004년 3월 10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했던 감독의 강연을 수록한 글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지하에 세들어 살던 이십 년 전의 시절이다. 2002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을 개최하면서 감독을 초청했고, 그 다음은 당연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을 시네마테크에 초대하고 싶었다. 2003년 <밝은 미래>가 칸영화제에 소개됐고 다음해 <강령>과 <밝은 미래>가 국내 수입되어 공개될 예정이라 회고전을 개최할 좋은 기회가 만들어졌다.

2004년, 3월 9일부터 시작해 3월 11일까지 진행된 회고전에서는 극장에서 꼭 보고 싶었던 그의 초기작 <칸다가와 음란전쟁>,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부터, <네 멋대로 해라> 시리즈 6편을 포함해 <도플갱어>까지, 총 스물 세 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그 때는 너무 당연하게도 모든 작품을 35mm, 16mm 필름으로 상영했다. 그의 방한이 결정되면서 기조 강연을 부탁했는데, 처음 제목은 ‘나의 공포영화론‘이었다. 최종적인 제목은 책에 실린 그대로 ’나의 영화론’이 되었다. 3월 9일 개막작 <밝은 미래> 상영 후, 그리고 3월 10일 강연 후에 감독과 두 번의 대담이 열렸고 ,구로사와 감독은 자신의 데뷔 20주년 행사를 한국에서 기념해주었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 때 회고전이 계기가 되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을 몇 차례 서울아트시네마에 초청했다. 매번 봉준호 감독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아시아 팬클럽 회장을 자부하며 대담에 참여했다. 그는 낙원시절 그리고 서울극장 시절을 포함해 시네마테크가 이전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장소를 찾아준 유일한 감독이다. 그러니, 정동길 극장에서 만날 일이 남았다.

그날 ‘나의 영화론’ 강연 후에 박기형 감독도 참여해 대담을 나눴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분들을 위해 나눴던 말들 일부를 소개한다.

***


김성욱 : 8미리 영화를 만들었다가 그 다음에 상업영화를 찍기 시작하셨는데요.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끊는다>라는 영화와 <스위트 홈>같은 영화는 영화의 배급과 상영에 큰 곤란을 겪었던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좌절의 경험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이것이 이 후 장르영화를 만드는 것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구로사와 : <도레미파 소녀 피가 끊는다>를 만들면서 가장 많이 좌절했던 것은 큰 뜻을 품고 8미리 영화를 만들었듯이 상업영화계로 진출했는데 니카츠라는 영화사에서 제작한 두 번째 작품인 로망포르노를 보고 제작사 쪽에서 이런 형편없는 것은 상영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전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저 혼자만 거창한 얘기를 했을 뿐 일본 영화계는 '뭐 이상한 영화를 만들더라도 공개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식으로 간단히 무시해버린 거죠. 그 때부터 좀 더 일본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당분간은 공포 영화 라던지 야쿠자 액션영화 같은 장르영화를 가장한 영화를 몇 편 찍게 되었습니다.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끊는다>의 경우 이제 이런 영화를 더 이상은 만들면 안 되겠구나 하고 판단했던 거죠.

김성욱 : 이번에 상영하는 작품 중에 한국 관객들에게 덜 친숙한 것들로 <내 멋대로 해라>시리즈와 <복수>시리즈가 있습니다. 공포영화들이라기 보다는 하드 보일드한 액션영화로 특히 <내 멋대로 해라> 시리즈는 1년에서 1년 반의 기간 동안에 여섯 편이 만들어지고 상영되는 등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제작하게 된 계기와 경험담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구로사와 : 이 작품은 회사 쪽에서 제게 요청이 왔었고, 그러니까 제가 기획한 것은 아닙니다. 주연은 아이카와 쇼우 라는, 한국 분들은 잘 모르실지도 모르겠는데 일본에서는 야쿠자 영화 스타입니다. 그가 주연한 영화가 매년 약 4편 정도 만들어지고 있고 한국에는 이런 시스템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비디오시네마라는 장르로서 필름으로 촬영해서 소규모 영화관에서 한 일주일정도 상영하다가 바로 비디오로 출시합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렌탈 비디오 샾에서 빌려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카와 쇼우 라는 코너가 비디오 가게에 있을 정돕니다. 그런 영화들을 만들자는 의뢰가 제게 왔고 처음에는 야쿠자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얘기를 듣고 배우 또한 야쿠자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내 인생에서 야쿠자와 일을 하게 되는 구나 하고 겁을 먹은 채로 아이카와 쇼우와 첫 대면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카와 쇼우는 폭력배나 조직의 일원 같은 느낌이 아니라 단지 그 역을 잘 소화해 내는 사람일 뿐이었고 성격이 밝고 재밌는 사람이었습니다. 야쿠자 영화를 만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것을 계기로 지금껏 해보지 못한 액션이 가미된 코미디 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고 그래서 액션이 가미된 코미디 영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아이카와 쇼우와 호흡이 잘 맞았고 그래서 순식간에 여섯 편을 작업하게 됐습니다.

김성욱 : 장르영화 혹은 <거대한 환영> <인간합격>과 같은 비장르적인 영화들을 연출하기도 하셨죠.. 그런데 장르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타협할 수 밖에 없는 법칙이 있고 감독에게는 일탈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플갱어>의 경우에는 모든 장르의 혼합-코미디, 공포, 범죄-으로 보이는데 감독님은 장르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로사와 : 저는 장르영화라는 것은 일정한 시간을 갖는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2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이 있죠. 물론 다섯 시간 여섯 시간짜리 영화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일반 상업 영화들은 약 2시간 내외이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얘기 해줘야 합니다. 그럴 때 장르라는 것이 매우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범죄가 일어나고 형사가 나오면 이것은 형사 드라마로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범인은 누구일까? 라고 자연스럽게 떠올립니다. 그러면 등장하는 형사가 주인공이고 그 후로 범인을 추적해가면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일련의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하고 관객들은 금새 눈치챕니다. 중간중간에 반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규정된 2시간 안에 거기에 걸맞는 이야기를 풀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장르가 갖는 힘이겠죠. 처음에 발생한 살인 사건의 범죄자는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고, 이런 목적으로 길을 가다가 범행을 저질러서 어떤 형사가 나타나서 출동명령을 받고 그 현장에 달려가서 아마 이런 전반적인 이야기가 30분 정도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형사영화라는 장르입니다. 이제 그 나머지 시간들은 다른 것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거죠. 저는 시간이라는 제한이 없다면 장르라는 것에 전혀 구애 받지 않고 완성하는 그런 영화를 아주 장황하게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구도 한편으로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아무도 보려 하지 않겠죠. 사람이 영화관에서 의자에 앉아서 화장실도 못 가고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길어야 3시간정도.. 따라서 그 안에서는 역시 장르의 힘을 빌려야만 합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죠.

김성욱 : 한 잡지에서 실린 글을 봤는데 거기에서 아오야마 신지 감독이 구로사와 감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최종 목표는 로버트 알드리치가 되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썼던데..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로사와 : 아주 매니아 적인 얘기로 빠지는 데요. 로버트 알드리치가 되는 것은 최종적인 꿈입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비현실적이고 저와 아오야마 신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불가능한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겁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어쩌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꿈꾸는 것은 샘 페킨파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