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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 본문

영화일기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

Hulot 2024. 5. 5. 23:35

 

1.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를 오래간만에, 그것도 35mm 필름으로 상영하고 짧은 강연을 준비하면서 예전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의 강연 때에도 언급했지만,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처음 만났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2012년 도쿄의 메이지가쿠인 대학에서 열렸던 '1960,70년대 일본 영화의 세계적 수용'과 관련한 국제포럼-당시 아다치 마사오 감독이 참여하기도 했다-에서 '한국에서의 일본영화 수용'에 대해 발표했던 '금지와 저항'이라는 글에서 다룬 바 있다. 포럼의 발표문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언어문화' 31호에 실리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60년대 일본영화를 수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90년대 한국영화는 다시 포획되고 있었고, 돌발사건으로서의 영화들에 대한 가능성의 타진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6-70년대 일본영화는 그 자체로 일본에서는 힘의 소멸로 표시될 수 있겠지만, 최소한 우리들에게는 도리어 힘을 다시 사유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새로운 제작이, 어떻게 자주상영과 배급의 가능성이, 어떻게 정치적 사회적 소재를 영화로 담아낼 것인가, 등등. 이러한 질문들이 6-70년대 일본영화를 살아 있는 ‘운동체’로 파악하게 합니다. 즉, 소수적인 일본영화의 수용이 영화의 돌발적 사건의 힘으로 다른 사건들과 접속하며 만들어지는 다른 종류의 역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했고, 이것이 6-70년대 일본영화의 수용을 미학화의 가치로 회수되는 것을 넘어서, 운동적인 정치적인 질문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2002년의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 2003년의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2004년의 ATG 특별전, 2005년의 일본언더그라운드 특별전, 2006년의 와카마츠 코지 특별전으로 이어지는 6-70년대 일본영화를 소개하는 일을  시네마테크 서울에서 진행했습니다...그러니까, 일본영화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앞서 말씀드린 일본영화 상영의 역사안에서 볼 수 있었던 소멸과 한계화의 과정과 같은 맥락으로, 서로 다른 시간성 안에서 소멸과 가능성의 시도를 함께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2.

발표문에서 나는 60-70년대 일본 영화의 (상영의)의미가 파솔리니가 일찌기 '시대착오 속에서 드러나는 것만이 진정으로 동시대적인 것'이라 말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동시대성은 이미 내 영화의 경험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80년대 고등학생 때 보았던 <바보선언>과 90년대 '문화학교서울'에서 만났던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의 체험이 그러하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2012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 걸작선'에 마침 글을 쓸 특별한 기회를 얻어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과 오시마 나기사, 와카마츠 코지 영화를 봤던 경험에 대해 말했었다. 특별히 <바보선언>의 첫 장면에서 '활동사진멸종위기'라는 구호와 함께 빌딩에서 뛰어내린 감독(이장호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의 모습과 <도쿄전쟁전후비화>에서 빌딩에서 뛰어내려 영화 카메라에 유서를 남긴 한 청년의 이야기에서 '몸을 던진다는 것'의 유사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바보선언(1984)

 

이장호의 <바보선언>(1984)이 흥미로운 것은 이 자살 장면이 몇 편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에 있다. 나는 두 편의 일본영화를 거론할 생각이고 장면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그 전언의 교감성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 하나는 와카마츠 코지의 <가라 가라 두번째 처녀
>(1969)이며 다른 하나는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1970)이다. 시대와 상황은 제각각이고 나 또한 이 영화들을 상이한 시기에 접했지만(이장호의 영화는 80년대 초에, 오시마의 영화는 90년대에 와카마츠의 영화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이다) 동시대성을 느꼈다. 동시대성이라는 말로 나는 파솔리니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백색치즈>에서 영화감독으로 분한 오손 웰즈는 파솔리니의 책을 인용하며 '나는 과거에서 온 전령사이다. 진정으로 동시대적인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 속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각각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만들어진 세 편의 영화가 지닌 내적인 관계는 주관적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최소한 이 세 명의 작가가 내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80년대에 오시마 나기사와 이장호 감독의 관계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2002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한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때에 이장호 감독은 <소년> 상영 시 그가 일본에서 이 영화를 ATG 상영회의 노천극장에서 보았던 경험과 오시마 나기사 감독과의 개인적 친분에 대해 말했었다. 와카마츠 코지 감독과 이장호 감독의 관계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와카마츠 감독은 자신의 영화관에서 이장호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일본의 영화계에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일에 기여했다는 걸 큰 자랑으로 여겼다. 2006년에 개최한 ‘와카마츠 코지 특별전’에서 이장호 감독은 그와 만났던 사연을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해 소개하며 그와 재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이 글이 사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와카마츠 코지 감독에 대한 기억에서 촉발됐다는 말을 밝히고 싶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처음 제대로 접한 것은 90년대 초의 일이었다. ‘제대로’라는 표현은 그때 처음으로 <일본의 밤과 안개>(1960)와 <도쿄전쟁전후비화>를 봤기 때문이다. <감각의 제국>(1976)을 보았던 터이긴 하지만, 오시마의 영화는 이 두 편으로 꽤 충격적인 느낌을 남겼다. 당시 문화학교서울이라는 작은 비디오테크에서 뒤늦게 본 셈인데, 그전까지 달리 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을 다룬 이야기나 형식이 꽤나 흥미로웠다. 안보투쟁 이후 좌익정치운동을 둘러싼 패배의 분위기와 심각한 절망감, 학생운동 내부에서 발생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디스커션 드라마’의 형식으로 풀어낸 독특함에 깊은 공감했다. 30년 전의 영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현실감을 얻었다. 마치 당대의 한국현실을 질타하는 영화처럼 보였다. 그 무렵 한국에서도 사회정치적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1990년에는 <파업전야>가 자주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정부가 영화 상영을 금지시켜 대학교에서의 자주상영을 둘러싸고 경찰과 대치하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해에 지리산 파르티잔의 이야기를 그린 정지영의 <남부군>이 개봉했고, 좌절한 학생운동가의 이야기를 그린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이 개봉해 열띤 호응을 얻었다.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또한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영화였다. 새로운 사회파 영화들이 만들어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초에 한국사회가 직면한 현실은 영화가 보여주는 문제를 훨씬 상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1년의 ‘5월 투쟁’은 지극히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1991년 4월 26일, 시위를 하던 명지대학교 학생 한 명이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죽은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한 달 넘게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11명의 목숨이 희생됐다. 91년 5월 투쟁은 당시 6공화국의 집권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표출되었던 권력형 대형비리와 공안통치, 장기집권을 향한 정권야합에 대항한 사건이었다. 여러모로 87년에 있었던 6월 투쟁과 맥을 같이 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실패로 끝났고, 진보운동에 대한 반동적인 이데올로기 공세가 드세게 전개됐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린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벌어졌고, 당시 참교육을 주장하던 전교조 교사들을 해직시킨 국무총리서리에 대한 학생들의 밀가루-계란 세례에 언론이 ‘극악한 악행’이라 매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발맞추어 민주화운동진영에 있었던 일부의 지식인들이 당시의 운동세력을 매도하는 글을 써대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구를 선동하려 하나’라는 글이나 서강대 총장의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는 글이 대표적이었다. 90년대에 현실은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으로 그즈음에 <일본의 밤과 안개>와 만났던 내 경험이 각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실 정치의 문제를 대담하게 풀어낸 것에 놀라웠고, 숨겨진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 매료됐다. 터부시 된 이야기, 상기하기 곤혹스런 과거의 기억을 드러내는 방식에 놀랐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영화걸작선' 다음의 링크 글을 참고할 것 https://www.kmdb.or.kr/story/10/1989

 

도쿄전쟁전후비화(1972) 오시마 나기사

 

3.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의 원제는 도쿄풍경전쟁’, 부제는 영화로 유서를 남기고 죽은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제작에 몰두한 모토키는 자신의 친구가 도쿄의 풍경을 촬영하면서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풍경은 실로, 평범하고, 무심하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범용한 풍경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풍경이 비록 잠깐 나뭇잎처럼 흩날릴 그런 일상의 사소한 우발적 사건일지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마지막 기록이라면 예외적인 풍경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지연된 시간들, 지체되는 이야기들, 늦게 도착하는 사건들, 멀리 떨어진 하지만 가까운 시공간의 원근감이 상실된 친밀하면서도 미지의 풍경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친밀한 미지성의 풍경'이라는 조금 모호한 표현과 관련해서 나는 '다큐매거진 DOCKING'에 쓴 샹탈 아커만의 유작 <노홈 무비>(2015)에 관한 글에서 다룬 바 있다. 이 영화의 초반부의 풍경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 곳인지, 혹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등의 문제와는 상관 없이, 그것을 촬영하고 그것을 본 사람이 더는 살아 있지 않은 그런 풍경이라는 점에서 무섭게 다가왔다. 그것은 강연 때에 말했던 것처럼 베를린의 벼룩 시장에서 다량으로 판매되던 동독 시절의 무명의 가족 앨범을 볼 때의 낯선 친밀함과도 같은 것이다. 아커만은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마지막 기록 영상을 만들었고(이 작품 이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담은 <노홈 무비>를 만든 아커만은 이 작품을 유작으로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거센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고 있다. 그 뒤편으로는 저 멀리 사막처럼 보이는 대지가 펼쳐져 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일까? 아직 우리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화면은 이제 바뀌어 공원에서 상의를 탈의하고 벤치에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화면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예의 그 남자는 그저 야외 공원에서 우연히 포착된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어떤 의도가 그를 화면 안에 끌어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전의 장면과 어떤 연결을 이루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었고, 이때 그 화면의 세계에서 다른 이들은 없었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를 두고 사르트르가 말했던 나의 세계에 발생한 ‘내출혈’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타자의 출현은 나의 세계에 생긴 작은 균열 같은 것이다. 다음 숏에서 우리는 어느 집의 정원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저 아래 정원의 한 가운데에는 해변의자가 놓여 있다. 이어 카메라는 한 여인이 문을 열고 거실을 돌아다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정면을 향해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이어 부엌의 탁자에 앉은 두 여인이 식사를 하며, 결코 특별하다 할 수 없는 말들을 나누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들은 감자가 맛있다거나, 모든 비타민이 껍질에 들어있다거나, 등의 식탁에서 오갈법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이 누구이지 깨닫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샹탈 아커만의 유작 <노 홈 무비>의 초반부 장면이 대략 이러한데, 특별한 것이 없는 이 장면들을 나는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마도 그녀의 죽음 이후에 도착한 영화와 내가 처음 마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긴장감이, 마치 누군가의 유품을 처음 만질 때의 그런 어둑한 마음으로 극장의 어둠 속에 앉아있었던 것 같다. 샹탈 아커만은 2015년 10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내가 보는 풍경이 비록 잠깐 나뭇잎처럼 흩날릴 그런 일상의 사소한 우발적 사건 incident 일지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마지막 기록이라면 예외적인 풍경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영상들을 실제로 카메라로 남겨진 유서처럼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1970)에서 세상을 떠난 젊은 친구의 카메라에 담긴 마지막 풍경을 두고 ‘바람이 불고 있었고, 물이 흘렀고, 태양이 쨍쨍했다’고 ‘그것에 내가 안겼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 또한 이 영상에 대해 그저 바람이 불고, 사막이 보였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어머니와 딸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친밀한 미지성의 풍경-샹탈 아커만의 <노홈 무비>'를 참고. 
http://dockingmagazine.com/contents/8/44/?bk=menu&cc=&ci=&stype=&stext=+%EA%B9%80%EC%84%B1%EC%9A%B1&npg=1

 

4.

강연 때 언급한 ‘도쿄전쟁전후비화’의 트레일러 영상을 소개한다.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풍경전쟁’의 의미에 대해 당시 마츠다 마사오의 다음의 글을 참고하면 좋겠다.

일본의 학생들은 이 풍경 속에서 자신이 먼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풍경 너머의 거대한 지배 권력을 간파할 수 없는 극한에 이르렀습니다. 오시마의 새 영화에서 이들의 고난을 ‘도쿄풍경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자살하는 장소(환상과 현실 모두에서)가 국회 의사당을 내려다보는 일본 수도의 중요한 장소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베일처럼 펼쳐진 풍경 속으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 처지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진보적인 젊은 학생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지향하던 비일상적 전투의 상황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장소로서의 풍경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일상적 전투의 상황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츠다 마사오(1971)

 

그리고, 강연 때 다룬 몸과 이미지, 픽션과 현실, 기록의 영상과 영사적 이미지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2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