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CINEMATHEQUE DE M. HULOT

2023 베니스 인 서울 -개막작 | 릴리아나 카바니의 ‘시간의 질서’ 본문

영화일기

2023 베니스 인 서울 -개막작 | 릴리아나 카바니의 ‘시간의 질서’

Hulot 2024. 2. 14. 20:45


시간의 질서 L’ordine del tempo
2023│113min│이탈리아, 벨기에│Color│DCP│15세 관람가
연출│릴리아나 카바니 Liliana Cavani
출연│클라우디아 제리니, 리차드 사멜, 알레산드로 가스만

지난해 90세를 맞은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렇다고 비순응자인 그녀의 영화적 삶이 이제 끝난 것은 아니다. 사실 더 흥미로운 소식은 근 20년 만에 그녀가 비경쟁 부문에 신작 <시간의 질서>(2023)를 공개한 일이다. <시간의 질서>는 국내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동명 에세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묵시론적 작품이다. 거대한 크기 때문에 ‘아나콘다’라 불리는 운석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면서 사람들은 6천만년 전의 소행성 충돌로 공룡이 멸종한 것과 같은 재앙에 직면하면서 감정의 위기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야기의 질서는 일반적인 재난 영화의 공식을 벗어나며 쉰 나이의 생일 잔치로 해변가에 모인 중년 남녀들이 문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제각각 감정과 도덕의 불안정, 위태로움을 겪는 과정을 따라간다.
지금이 그들 생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에 더해 영화는 시작부터 두 가지 다른 이야기를 끌어오는데, 그 하나는 시간의 개념에 대한 질문이다. 가령, 주인공 엘사는 그리스인들이 시간 개념을 언급하는 다양한 방식을 딸에게 설명한다. 연대기적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 초월적 시간으로서의 아이온, 불확정적 시간으로서의 카이로스, 그리고 태양력으로서의 에니아우토스가 그러하다. 시간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신화적인 이야기다. 생일 파티에 모인 이들에게 엘사는 딸의 번역 일을 돕는다며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는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 고대 그리스 비극의 여주인공이다. 이 신화적인 이야기는 위기의 때에 사랑과 헌신에 대한 질문의 구실이 된다.
영화가 그리는 미래 시간에 대한 두려움과 감정의 불안은 당연하게도 이 영화를 팬데믹에 대한 일종의 우화로 읽게 한다. 코로나19 이후에 한계적 시간에 대한 인식이 사람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 시간 부족의 자각은 이 작품에 묵시론적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릴리아나 카바니는 풍자와 비평적 시선을 모두 거부하면서 우리를 다른 길로 인도한다. 가령, 매혹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노령의 수녀가 불안한 젊은 물리학자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다. 물리학자 쥘리아는 시간, 파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무한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며 종말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에 불안을 토로한다. 물리학을 전공한 후에 신에 대한 믿음과 수도원 생활을 선택한 라파엘라 수녀는 쥘리아에게 비록 연약한 무기이지만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기도를 할 것을 권한다. 기도는 그녀에게 매일의 성스러운 약속이고, 거기에는 다른 시간, 확고하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시간이 있다.

김성욱 |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