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샤브롤은 누벨바그의 다른 작가들보다 더 대중적인 흥행영화를 만들었지만 정작 덜 알려진 작가이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도 일부에 불과하고 그 대부분도 최근작들로 한정되어 있다.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만나는 기회도 고다르나 트뤼포, 로메르에 비해 적은 편이고, 이 애매한 작가를 ‘히치콕의 프랑스 후예’ 정도로 취급해 온 것도 그의 작가성에 대한 논의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샤브롤은 그가 비록 히치콕에 관한 저술을 했지만 스스로 프리츠 랑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토로한다. 그의 영화는 예술가보다는 장인으로 작업해야했던 랑의 미국시절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샤브롤은 전위적인 작가는 아니었지만 누벨바그 작가들 중에서 가장 발 빠른 감독이었다. 가장 먼저 에릭 로메르와 함께 히치콕의 연구서를 출간했고,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에도 일치감치 참여했고, 가장 먼저 데뷔작을 완성했다. 1957년 12월, 샤브롤은 젊은 무명 배우와 약간의 스태프를 데리고 3개월 동안 데뷔작 <미남 세르쥬>를 제작해, 이 영화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한정된 예산으로 작가영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쾌거였다.

샤브롤은 스스로 작가라기보다는 고용감독으로 제작자가 원하는 작품 제작에 군말없이 작품을 만들었다. 음악가는 작곡하고 소설가는 글을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영화감독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범죄영화를 선호한 것도 장르영화가 영화제작에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가성은 그래서 처음부터 평자들에게 의문의 대상이었다. 비평가인 앤드루 새리스의 표현을 빌자면 샤브롤은 1960년대 초에 이미 누벨바그의 잊혀진 인물이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 또한 그의 작품에 오랫동안 호의적이지 않았다.

샤브롤은 삶보다 죽음을 더 그린 작가다. 그는 냉혹한 겨울의 작가이다. 대체로 누벨바그 작가들이 파리를 무대로 따뜻한 자연광 아래서 노닥거리며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는 유희의 영화를 만들었다면, 샤브롤은 반대로 데뷔작부터 눈보라가 흩날리는 폐쇄적인 시골을 배경으로 어둡고 음습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12월에 촬영한 <미남 세르주>에서 겨울의 시골은 인물들의 차가움과 아픔의 풍경이다.

샤브롤은 자신이 속한 부르주아 세계에의 애착과 혐오를 즐겨 표현했다. 이는 파리 교외, 브뤼셀, 페리고르의 트레몰라 마을, 브리타니, 알자스 지역처럼 특정한 지리적 장소를 인물들의 사회적, 개인적 배경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는 것에서 특별하다. 히치콕처럼 음식을 좋아한 그는 프랑스 부르주아 문화의 정점을 만찬용 식탁에서 찾은 감독이기도 했다. 나중에 이자벨 위페르나 상드린 보네르라는 개성파 여배우들과 함께 폐쇄적인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한 후기의 미스터리물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이어진다.

샤브롤의 사망에 대해 ‘프랑스가 스스로의 거울을 잃었다’고 프랑스 언론이 표현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는 위대한 프랑스의 초상화가였다. 그가 남긴 초상화들이 워낙 많아 이번 12월에 소개하는 작품들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여전히 샤브롤은 미지의 작가이다. 한국에서 사정은 더한 편이다. 몇몇 감독들이 샤브롤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지만 비평은 적은 편이다. 샤브롤의 사망 이후에 어느 잡지는 '야수가 죽었다'고 했다. 더 인상적인 것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표지이다. '당신은 샤브롤을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반성의 표현으로 읽어야만 한다. (김성욱)


* '샤브롤 추모전'이 서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에서 사진, 영화 예술 작업을 하시는 김량씨가 '텔레라마'에 실린 '샤브롤의 회상록'을 번역해 한국의 팬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감사한 일이다. 오늘부터 시네마테크 웹블로그에서 작품리뷰들과 함께 천천히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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