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THEQUE DE M.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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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대만 뉴웨이브를 다시 보다

KIM SEONG UK 2008. 6. 1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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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떻게 대만의 역사를 새롭게 창조했나?

2005.08.23 / 김성욱(영화평론가)

* 2005년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대만영화제'에 관련해 '필름2.0'에 썼던 글을 참고로 올립니다.  

대만 뉴웨이브 20주년을 맞아 대만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우리의 시대, 우리의 이야기>는 대만의 뉴웨이브가 70년대 영화적 암흑기를 거쳐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가를 말해준다. 70년대 말 대만영화는 매너리즘, 새로운 오락의 출현, 홍콩 뉴웨이브의 출현과 비디오의 범람으로 인해 거의 궤멸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경제적으로 비약적 성장을 이뤘음에도 정치적으로 대만은 여전히 계엄령 하에 있었고, 게다가 영화 제작에 있어서는 촬영 전 대본 심사와 같은 엄격한 검열이 있었다. 하지만 몇몇 낙관주의자들은 이 암흑의 시기가 영화를 새롭게 갱신할 수 있는 호기라 여겼고, 에드워드 양, 코이첸, 타도우첸, 추안잉 등 4명의 영화감독이 참여해 대만 사회의 혼란기에서 시작해 80년대까지 네 인물의 성장을 그린 <광음적 고사>(1982)의 놀라운 흥행 성적으로 대만 뉴웨이브가 시작된다. 1987년 계엄령 해제, 본격적인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1989)와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등 대만 역사에서 터부시되던 사건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어 90년대를 거치면서 이안과 차이밍량 등 대만영화의 포스트 뉴웨이브가 등장한다. 돌이켜보면 이들 감독들의 취향과 경향은 사뭇 달랐다. 하지만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 특히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의 영화를 연결하는 공통의 끈은 필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기억과 역사,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일 것이다.

대만 사회의 미시적인 관찰자

대만 뉴웨이브의 태동을 알린 상징적 영화인 <광음적 고사>에서 이후 대만 뉴웨이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감독을 꼽자면 단연 에드워드 양일 것이다. 그가 만든 에피소드는 한 소녀가 남자에게 매혹되는 순간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하는데, 이 순간 소녀의 시선과 남자의 근육질 가슴은 조금씩 오버랩된다. 에드워드 양은 이 영화에서 대만의 관습적인 영화들과 달리 이야기를 말하는 새로운 구조, 대단히 세밀한 관찰 방식을 보여 준다. 이러한 스타일은 이후 그의 영화뿐 아니라 대만 뉴웨이브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에드워드 양은 허우 샤오시엔과 동년배(둘은 모두 1947년생이다)이며 같은 ‘외성인’(중국 본토에서 태어났다가 대만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지만 그와는 사뭇 다른 방식과 방향으로 대만의 역사와 이야기를 풀어낸 감독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허우 샤오시엔이 대만의 토착적인 생활 풍습을 즐겨 영화로 표현한 반면 에드워드 양은 다소 코스모폴리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공포분자>(1986)는 대만 사회를 투영하고 있지만 대만이라는 풍토감이 다소 희박해 보이는 작품으로 차라리 서구의 영화, 특히 안토니오니의 황량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양은 대만이 근대 국가임을, 그리고 대만이 뉴욕이나 LA와 같은 대도시와 공통의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영화는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와 달리 인간과 인간의 소외, 엄격한 경계, 도시의 냉엄한 정경을 이미지에 담아낸다.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가 대지에 정박해 있다면(초기와 중기작이 그러하다),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대만 사회가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이동했으며, 그럼으로 해서 문화의 변경,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발생했음을 잘 보여 준다. <공포분자>, <고령가 소년살인사건>(1991), <마작>(1996) 등의 작품에서 그는 대만인들의 단절된 일상의 삶, 부유하는 모습들, 젊은이들의 혼란과 좌절을 그린다. 그는 대다수의 대만인들이 늘 미래를 걱정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의 카메라는 현미경처럼 보고는 있지만 결코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는 대만 사회의 어두운 곳을 드러낸다.

물론 에드워드 양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대만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보여 주기는 했다. 이는 60년대에 대만에서 실제로 발생한 14세 소년의 소녀 살인사건을 다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엿보인다. 이 영화는 외성인 2세들의 상황과 운명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을 담고 있다. 그는 대만 사회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외성인들의 비극을 일종의 소수자의 고립감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에드워드 양은 또한 아시아가 현재 끔찍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경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문화의 문제다. 1994년 작 <독립시대>는 그런 혼란스런 문화에 대한 자기 반성이 담겨 있다. 에드워드 양은 대만의 사회, 정치, 역사의 문제, 중국 본토의 위협, 미국화와 소외의 문제를 통해 삶의 의미와 정체성에 대해 질문한다. 지적이면서도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이런 섬세한 이야기 구성과 분리된 이야기를 일관된 전체로 엮어내는 복잡한 구성은 <하나, 그리고 둘>(2000)에서 탁월한 미학적 성취를 이뤄낸다.

역사와 호흡한다

‘90년대가 낳은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는 허우 샤오시엔은 현재 세계영화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고 있는 거장이다. 그의 잔잔하면서도 명상적인 영화는 흔히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과 비견되며, 전통적인 중국의 시와 풍경화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적 시작은 그다지 화려하지도 의식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탁월한 거장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영화를 끊임없이 갱신한 혁신가라 할 수 있겠다. 가령, 그는 한번도 대만의 ‘금마장 최고영화상’을 수상한 적이 없으며(에드워드 양 또한 마찬가지다), 대만 뉴웨이브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양처럼 미국에서 정통으로 영화를 공부해 대만영화계에 의식적으로 진입한 뒤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허우 샤오시엔은 대만영화계의 전통적인 진급방식을 통해 밑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와 점차적으로 영화를 갱신한 감독이었다. 그는 이미 1973년에 영화계에 뛰어들었고, 80년대에 시작된 새로운 영화의 태동과 더불어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신인 감독들과 협조하며 서로 다른 방향에서 대만 뉴웨이브를 일궈냈다.

허우 샤오시엔의 첫 번째 역사 의식이 투영된 영화는 <샌드위치 맨>이다. 대만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는, 전문적인 기술도 없고 게다가 문맹인, 그래서 생계를 위해 ‘샌드위치 맨’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그려낸 이 영화로 허우 샤오시엔은 그간의 오락영화에서 탈피해 대만 뉴웨이브에 동참하게 된다. 이어 허우 샤오시엔은 <펑쿠이에서 온 소년>(1983), <동동의 여름방학>(1984), <동년왕사>(1985), <연연풍진>(1986) 등과 같은 청소년을 주제로 만든, 다소 자전적인 색채를 띤 영화를 만들었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은 아마도 허우 샤오시엔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기록될 만한 포인트가 된 작품이라 할 만한데, 비록 대만에서 흥행과 비평에서 완전 실패했지만(오해와는 달리 이 네 편의 영화는 해외에서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모두 대만에서 비평과 흥행에서 실패한 영화였다), 감독 스스로는 생애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영화였다고 술회한다. 그는 이전까지는 창작 과정에서 그저 대본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어떻게 화면을 구성할 것인지, 어떻게 영화의 형식을 만들어낼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또한 특유의 관조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동년왕사>는 그가 가족, 부모, 자신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고, 지난 세대가 처한 환경과 심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영화이기도 하다.

허우 샤오시엔에게 유명세를 제공한 작품은 물론 대만의 어두운 역사를 다룬 <비정성시>(1989)이다. 이 영화는 대만영화계는 물론, 세계적으로 대만영화 상 유례가 없을 만큼 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비정성시>를 기점으로 대만의 역사, 특히 계엄 정치 하 시대 상황에 대한 회고와 반성을 다룬 일련의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또한 이 영화의 영향 하에 있다 하겠다. 허우 샤오시엔은 자신이 대만에서 40년간 살아오면서도 <비정성시>를 만들 무렵에야 비로소 대만의 역사에 관해 알기 시작했으며,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역사, 인간, 그리고 삶 자체에 관해 배우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는 대만 사회의 전통과 모더니티 간의 긴장 관계를 탐구하며, 대만의 혼란스러운 정치사, 그리고 점증하는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인한 문화의 위기를 표현한다. 이는 <희몽인생>(1993)과 같은 작품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허우 샤오시엔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리 티엔루의 삶을 통해 중국인들의 열렬한 자긍심과 마음의 아량을 언급하는데, 이러한 중국인의 기질이 현재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중국인들의 생활양식과 감정 표현 방식을 탐구하며 자신의 세대가 그러한 중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보존해야 하고, 그 전통을 다음 세대에게 퍼뜨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표면적인 성공과는 달리 대중적인 오해와 냉대를 받기도 했다. 가령 <호남호녀>(1994)와 <해상화>(1998), 특히 <밀레니엄 맘보>(2001)의 경우는 그의 영화가 ‘변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카페 뤼미에르>(2003)를 포함해 서로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서로 다른 작품들을 과거의 작품을 기준점으로 평가하는 부당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그의 지속적인 영화 언어의 개발과 관련해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끔찍한 고독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에 이어 대만의 뉴웨이브를 90년대에 계승하고 있는 인물은 차이밍량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청소년 나타>(1992)에서 시작해 최신작인 <구름>(2005)까지, 대략 일곱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영화들에서 전 세대와 달리 보다 인물의 실존적 고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57년, 말레이시아 출생인 차이밍량은 1977년에 대만으로 이주해 처음엔 각본을 쓰거나 텔레비전 연출을 하다가 1992년 <청소년 나타>로 데뷔했다. 이 영화는 오토바이를 몰고 거리를 질주하는 아초, 그의 친구 아핑, 아초의 여자 친구 아퀘이, 대학 입시 시험을 포기하고 이들을 동경하고 갈망하는 샤오강 등 도심을 방황하는 대만의 10대 청소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대만 사회의 삭막한 풍경을 황폐하게 그려내며 이후 <애정만세 >(1994)와 <하류>(1997)의 영화와 더불어 ‘대만 3부작’을 완성한다. 이 세편의 영화는 모두 대만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황과 공허를 교차시키며 90년대 대만 사회의 무기력함과 소통의 장애를 보여 준다. <하류>에서 대만인이 공허한 일상은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가족 대부분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 마치 낯선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아버지는 게이 사우나를 드나들고, 엘리베이터 안내원인 어머니는 포르노 비디오업자와 정사를 나누며, 성적 정체성이 불분명한 샤오 강은 빈둥거리며 겉돈다. 이 영화에서 가족의 균열을 상징하는 매개체는 물인데, 차이밍량은 이러한 물과 관련해서 “인생은 강과 같다. 삶이라는 강을 따라 여행할수록 더욱 타락한 환경에서 나오는 딜레마와 부딪친다”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구멍>(1998)은 세기말의 대만을 쓰레기 더미, 들끓는 바이러스, 곪아버린 음침한 풍경으로 묘사하며 ‘대만 바이러스’가 만연된 대만 사회의 불안감과 남녀의 소통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다.

차이밍량은 자신의 영화가 대만 사회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은 혼자 있을 때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아픔과 소외라 말한다. 그의 영화는 이러한 아픔과 소외를 가족 붕괴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낸다. <하류>가 감정의 붕괴와 가족의 해체를 보여 준다면, <구멍>은 두 주인공이 한 집을 배경으로 한 황량한 세계 종말의 모습을, <지금 거기는 몇시니?>(2001)와 <안녕 용문객잔>(2003)은 극단적인 외로움과 고독의 숙명을 보여 준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인물의 실존적 고독을 그려내는데, 이는 너무나도 빠른 세계의 속도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오랜 지속 시간의 장면은 이런 속도로 인해 발생한 고독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래된 고독은 가족 붕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여기서 ‘섹스’는 인물의 고독을 잠시 달래줄 수 있는 마취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 섹스는 여전히 허전하고 황량할 뿐이다. 차이밍량은 이전의 대만 감독들이 다룬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집단적인 기억 대신에 신체에 각인된 인물의 감정들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해낸다. 아마도 여기에 그의 영화의 새로움이 있을 것이다.

다시, 햇빛 찬란한 날에

대만 뉴웨이브 영화는 초기의 비평과 흥행에서의 성공 이후에 사실상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지는 못했다. 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대만 영화의 경기가 나빠지며 예술성을 추구하는 영화들은 자국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의 새로운 영화 시도가 자국 영화 산업 전체와 관객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지는 못한 것이다. 정작 대만에서 흥행과 비평에서 실패한 에드워드 양과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연 이은 성공을 거두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나 배우 이강생과 함께 자신의 영화를 소개하는 안내지를 극장 앞에서 배포하는 차이밍량의 적극적인 노력에서 대만 뉴웨이브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의 어두운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 <우리의 시대, 우리의 이야기> 말미에서 한 대만 비평가는 대만의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오히려 대만 국내에 부정적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대만인들은 국제영화제 수상작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영화들이라고 입을 모은다는 것이다. 따라서 80년대 초에 시작된 대만 뉴웨이브를 기념하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제’는 회고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그리고 미래를 위한 되돌아보기 행사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최근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현재 단순한 영화감독이 아니라 영화 조직과 정치 운동의 호소자이고, 극장의 운영자이며 영화 제작자이자 배급업자이기도 하다. 그는 대만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대만 뉴웨이브의 충격은 이렇듯 오랫동안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