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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우리가 이별을 고할 때마다 - 데릭저먼 특별전

KIM SEONG UK 2008. 6. 27.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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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별을 고할 때마다

2003년에 ‘데릭 저먼 회고전’을 처음 시네마테크에서 개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의 특별한 영화세계에 지극히 감성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의 영화는 소수자적 정서, 특히 동성애적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극히 정서적이고 가슴을 울리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몸으로 수용하고 가슴으로 기억하는 그런 이미지들이 눈을 시리게 할 만큼 강렬하게 다가온다. 마음이 먹먹해질 정도였다.

크리스 리파르드가 편집한 데릭 저먼에 관한 작은 책은 ‘내몰린 천사By Angels Driven’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이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실린 ‘연인들의 와인’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 시에서 ‘오늘 세상은 찬란하다/재갈도 박차고 고삐도 없이/술 위에 걸터 타고 떠나자꾸나/거룩한 선경의 하늘을 향해/끈덕진 열병에 내몰린 천사처럼/수정처럼 맑고 푸른 아침/아득한 신기루를 따라가자꾸나’라며 와인을 빌어 꿈의 세계로의 환상적인 탈주의 가능성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표현은 크리스 리파르드가 지적하듯이 데릭 저먼의 영화세계를 간략하게 표현하는데 꽤나 적절해 보인다. 가령 데릭 저먼의 영화에는 사회에서 내몰린 아름다운 천사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으며(<희년>의 인물, <카라바조>의 소년, <가든>의 남과 여, <템페스트>와 <천사들의 대화>의 성령들), 저먼은 그의 몸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결국 그의 삶을 앗아간 에이즈라는 열병에 오랫동안 시달렸었다. 그는 또한 컬러에 과민할 정도로 매료됐고 깊은 탐구를 진행했다. 무엇보다 그의 눈을 자극한 것은 수정처럼 맑은 푸른 빛으로 그의 마지막 걸작인 <블루>는 이러한 경험의 극점을 보여준다.

작은 몸짓의 영화

내가 좋아하는 <천사의 대화>는 이런 데릭 저먼의 영화적 특성을 모두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저먼이 만든 가장 감동적이고 너무나 아름다운 영화중의 한 편으로 강렬한 이미지들의 조합과 세익스피어의 소네트로 창조된 사랑에 대한 고백서이다. 저먼은 회화적인 색채에 다양한 실험적 기법들, 가령 변속촬영(특히 슬로우 모션), 다양한 광학장치(이중인화, 왜곡 필터 및 렌즈), 페이드, 아이리스, 디졸브, 가속 몽타주 등을 활용해 장 엡스탱이나 루이 델뤽과 같은 프랑스 초기 인상주의적 아방가르드 미학을 떠올리게 하는 영상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또한 그가 매혹을 느꼈던 젊은 남자들의 몸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저먼은 영국적 전통의 그 어떤 영화와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지만 이 영화는 그가 좋아했던 마이클 파웰의 몇 작품에서 발견되는 영국의 목가적 전통을 계승한다. 영국의 전원적인 과거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 말이다. 이 영화에서 전원적인 과거의 세계는 영국의 사회적 몰락과 야만성, 도시적인 황폐함, 산업적인 억압과 대비된다. 또한 연인들의 사랑의 세계가 실제로는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이미지로 나타나면서 실제 세계가 더욱 소원하고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종교적인 강렬함과 회화적인 이미지, 색채의 감성 또한 중요한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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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저먼은 평생 지극히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는 그가 처한 영국의 무기력한 영화 환경을 돌파하는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적인 고백과도 같은 그의 일관된 영화형식과도 조응하는 것이다. 1975년에 그가 첫 번째 극영화 <세바스찬>을 만들었을 때 당시 영국의 영화산업은 60년대 영국뉴웨이브의 짧은 전성기를 뒤로하고 급속히 몰락하고 있었다. <세바스찬>은 3만 파운드의 저예산에 16mm로 만든 영화로 어느 선박 왕이 영화에 돈을 대주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옥스퍼드 라틴어 학자인 잭 웰쉬가 완성한 라틴어 대본에 근거한 이 영화는 마치 외국어로 말하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 같은 영화적 경험과 스펙터클한 충격을 제공한다. 이 영화는 또한 영국에서 처음으로 대중적인 방식으로 동성애의 문제를 다룬 영화가 됐다.

저먼의 영화는 강렬하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준다. 그는 저예산으로 산업적인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장인적인 방식으로, 종종 슈퍼 8미리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친구들과 늘 함께 작업을 했고 게이 정체성과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영화에 녹여냈다. 배우들의 연기보다는(물론 중후기의 작품에서는 틸다 스웬턴과 같은 전문적인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그의 영화에서 또 다른 빛을 발하지만) 강렬한 이미지를 통한 정서적인 표현에 몰두했고, 종교적, 신화적인 측면을 영화의 테마로 사적이면서도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영화로 표현하는 재능을 보였다.

<10월의 상상>은 그런 저먼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영화로, 홈무비의 형식에 정치, 역사를 탁월하게 융합하면서 레이건과 대처 수상을 공격하는 전복적인 내용을 풀어낸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저먼은 ‘사적인 해답/홈무비 카메라를 들고/에이젠슈테인의 서재에 앉아서/10월을 상상하기/작은 몸짓의 영화’라는 자막을 삽입하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작은 몸짓의 영화’는 할리우드적인 영화를 전복하면서 동시에 대처 통치하의 영국을 특징짓던 금융자본가들의 지배에 대항하는 저렴하고도 효과적인 영화를 의미한다. 홈무비의 아마추어리즘은 거칠음, 부서질 듯한 날카로운 그의 개성을 영화에 담아내는데 효과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작은 몸짓의 영화는 ‘홈home'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고향, 즉 영국에 대한 그의 강렬한 인식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데릭 저먼에 관한 책을 저술한 마이클 오프레이의 견해를 빌자면 저먼은 60년대부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대영제국의 몰락을 지켜보며 그것을 영화에 담아낸 투사였다고 할 수 있다. 저먼의 영화에는 중심의 상실에 대한 예리한, 어쩌면 노스탤지어적인 정서가 있지만 역설적으로 쇄신과 충격을 가하려는 절박한 욕망이 또한 숨어있다는 것이다. 저먼은 그런 점에서 영국급진주의자들인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모리스, 그리고 그의 소망과 시대적으로 가까웠던 영화감독 마이클 파웰의 계보를 잇는 인물이다. 그는 또한 파솔리니처럼 영화교육을 받지 않았고(그의 스타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화가로서의 그의 교육이나 세트 디자이너로서의 그의 경력을 살펴보는 것이 더 유효하다) 관습적인 영화형식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흔히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조건들을 전혀 꺼려하지 않고, 반대로 아마추어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하고, 장르를 뒤섞고,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음악과 춤과 시를 사용하는 등, 할리우드와 고상한 예술영화에서 만들어진 영화적 감수성을 뒤흔드는 이미지들을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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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아름다운 사랑은 없으리

동성애와 관련한 섹슈얼리티의 문제 때문에 데릭 저먼의 영화에 대한 취향과 애호는 종종 이상한 편견과 굴절을 갖게 되는데 나는 그가 홈무비를 빌어 삶의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숭고할 정도의 비극적인 감정과 영혼의 울림을 이뤄내는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마음을 열고 그의 영화를 받아들여주었으면 한다.
이번 ‘회고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몇 편의 영화를 꼭 권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천사의 대화>를 제외하자면 나는 그가 HIV 양성반응을 얻은 후에 만든 90년대의 후기작품들을 더 각별히 사랑하는 편이다. 물론 그의 작품들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대영제국의 몰락>도 좋아하지만 말이다. 그는 이 영화로 복수의 날에 노여움과 격노로 취한 그의 열정을 담아냈다고 말했는데 정말이지 이 영화의 라스트 10분은 가히 기절할 만큼의 강렬한 순간을 표현한다. 틸다 스웬턴이 통제할 수 없는 뒤틀린 신부의 공포를 표현하면서 가위를 들고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난폭하게 웨딩드레스를 찢는 장면은 정말 극장에서 온 몸으로 꼭 확인해야만 한다. 

저먼은 1986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유산으로 바람에 노출된 해안과 위협적인 핵발전소가 근처에 있는 던저네스에 집을 구입한다. 그는 이곳을 근거지로 몇 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가든>이다. 이 영화는 던저네스의 초현실주의적인 풍경과 그가 처한 곤경을 심플하고 가정적인 드라마로 만든 영화로 종교적인 수난의 이야기를 한 쌍의 게이커플을 빌어 표현한다. 그들은 권위에 의해 굴욕을 당하지만 영화에는 이들 천사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또한 담겨있다. 저먼은 이 영화로 ‘나는 이제 나의 삶을 촬영했다. 나는 행복한 과대망상자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저먼의 행복의 이미지가 영화에 가득 묻어난다. 

저먼의 후기영화들에 대한 나의 과도한 애정은 아마도 틸다 스웬턴이라는 매력적인 여배우에 대한 매혹 때문일 텐데, 실제로도 그녀의 저먼 영화에의 공헌은 아무리 칭찬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특히 전쟁과 죽음에 관한 탐구를 보여준 <전쟁 레퀴엠>에서의 틸다 스웬턴의 모습은 잊기 힘들다. 오페라 영화라 부를 수 있는 음악의 장엄함에 압도되는 것 못지않게 나는 이 영화에서 틸다 스웬턴이 마치 그리피스 영화에서의 릴리언 기시의 존재만큼이나 강렬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에서 돌로 만든 제단에 안치된 주검 앞에서 그녀가 눈을 손가락으로 찌르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규할 때 스크린에 손을 대고 그녀의 얼굴을 보듬어주고 싶은 욕구를 느낄 정도였다. 그녀의 표정과 얼굴, 몸짓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필히 관람할 필요가 있다.

데릭 저먼은 죽음을 앞두고 <에드워드2세>(91)와 <비트겐슈타인>(93), 그리고 그의 유작이 된 <블루>를 만들었다. 나는 이 영화들 중에서 <에드워드 2세>에서의 한 장면을 잊지 못한다. 영화의 초반부쯤에서 에드워드와 가베스통이 헤어지는 순간에 생뚱맞게 애니 레녹스가 직접 출연해 콜 포터의 ‘every time we say goodbye’를 부르는 순간 말이다. ‘우리가 이별을 고할 때마다 난 조금씩 죽어가네’라는 슬픈 가사의 노래는 심금을 울린다. ‘이 보다 아름다운 사랑은 없으리, 하지만 이상하게도 맑은 노래에 그늘이 지네.’ 너무 사적인 감정에 도취되어 그의 영화에 대해 말했지만 사실 데릭 저먼의 영화를 볼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이 이와 같다고 늘 생각한다. (김성욱)

* 2008년 6.27일 -7.1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데릭 저먼 특별전'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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