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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정의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심원 #2> 본문

영화일기

진실과 정의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심원 #2>

KIM SEONG UK 2025. 1. 7. 17:55



새해 첫날부터 감기몸살 증상이 심상치 않아 병원을 찾았더니, 진단시약 결과 A형 독감이 나왔다. 주사와 수액처방을 받은 뒤 약을 복용중인데 코로나 이후, 이렇게 심한 두통과 몸살에 시달린 건 처음인 것 같다.
삶의 경험이 쌓아진다고 해서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통증의 형태와 강도는 다양해지는데 이를 완화할 방법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정보에 수동적으로 노출되는 경우도 많아지면서 통증이 정상적인 치유 기간을 넘어서는 일들도 벌어진다. 더는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할 증상도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리던 눈이 오후에 극장으로 향하는 길엔 어느새 녹아 거리가 질퍽해져 있었다. 느린 회복 속에서 발끝으로 세상을 조심스레 걷는 기분이다. 덕분에 이불을 덮고 소파에 앉아 워너브라더스가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스트리밍 서비스로만 공개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심원 #2>를 찾아 보았고, 리차드 주얼>을 포함해 이스트우드의 전작들 몇 편을 다시 챙겨 보았고, 유일하게 두 편의 영화에 대해 긴 글을 썼던 김병규 평론가의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
덧붙이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워너가 극장 개봉을 원치 않는 것은 관객이 없을 거라 여기기 때문이다. 워너는 일본에서도 <배심원 #2>를 지난해 12월 극장 개봉대신 U-NEXT에서 서비스로 공개했다. 이에 일본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극장에서 그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작품을 보고 싶다는 이들이 ‘일본 개봉 서명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수미 시게이코의 지적처럼 아마도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다면 돈을 모아서 단체 여행으로 프랑스로 가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법정 영화의 외피를 쓰고 있는 최근 이스트우드의 작품들은 진실과 정의 사이의 불균형과 긴장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어 흥미롭다. 폭력, 민주주의, 개인에 대한 존중, 평등주의와 같은 보편적인 정치적 주제들은 여전히 반복되지만,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이러한 주제를 특정 정치적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탐구한다. 그는 편견에 근거한 사회적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며, 행동과 윤리적 선택의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이념적 판단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배심원 #2>에서 눈을 가리고 천칭과 검을 들고 있는 테미스(법과 정의의 여신)가 균형 잡힌 정의를 상징하는 반면, 배심원과 검사는 진실이 반드시 정의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눈먼 그들에게 사회적 정의는 사실과 진실에 앞선다. 한 인간에 대한 편견, 불완전하거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증언, 불확실한 증거, 충분하지 않은 단서들에도 불구하고 <리차드 쥬얼>에서 속보에 눈먼 기자와 합리적 의심을 사실로 단정한 FBI 요원은 무고한 자를 범죄자로 몰고 진실을 파악하지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스트우드의 진실과 정의에 대한 탐구는 그 자체로 이념적 논쟁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존 포드가 그러하듯이 작품에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의 영화작업은 이념의 실천이 아니라, 그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사소한 이해관계에도, 이념에도 오염되지 않고, 정직하게 직업을 수행하는 윤리를 따른다.
그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개인은 집단에 종속되거나 정치적 올바름, 어떠한 이념이나 종교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자유로운 개인을 행동의 원동력으로 삼고, 사회적 흐름과 분위기에 순응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만의 윤리적 길을 개척할 것인지를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 그러나 국가와 경찰, 또는 집행자를 대신하는 집단이나 미디어가 개입하고, 그로 인해 싫음의 동조나 감정적 공유가 동조압력으로 작용할 때,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