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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부산에서 클레르 드니를 다시 만나다 본문

영화일기

부산에서 클레르 드니를 다시 만나다

Hulot 2008. 10. 14. 00:49


기관사는 인간의 조건을 성찰하는 직업이다, <35 럼 샷> 클레르 드니 감독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19층 카페에서 부을 방문한 클레르 드니와 세 번째 만남을 가졌다. 전날 그녀는 홍상수 감독과 ‘오픈 토크’를 했다. 그녀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을 모두 봤고, 파리에서 그의 영화가 개봉될 때면 직접 나서 영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예전의 만남 덕분인지 첫눈에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홍상수 감독이 왜 내 영화를 안보는 걸까”라며 가벼운 투정을 부렸다. 그녀의 열렬한 팬으로서 나 또한 궁금했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는 “보기 싫어서, 아니면 논평을 피하기 위해 아예 보지 않는 걸까. 이 둘 중에서 어떤 쪽일 것 같나?” 하고 내게 넌지시 생각을 물었다. 아마도 두 번째가 아니었을까.


곧바로 그녀의 신작 <35 럼 샷>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클레르 드니는 세르주 다네의 표현을 빌자면 지리학적인 영화를 만드는 작가로 언제나 그녀의 영화에는 미지의 세계로의 떠남과 타자와의 접촉이라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런데 그 떠남이 가족의 영역에서 발생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혹은 그 가족의 이야기가 오즈 야스지로의 우주 안에서 전개된다면 어떤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35 럼 샷>은 그런 궁금증을 담아낸 영화다. 파리의 흑인 전철 기관사인 리오넬과 그의 딸 조세핀의 일상과 그들 부녀의 정이 이야기의 거의 전부인데, 흥미롭게도 그녀는 리오넬에게서 오즈 영화의 아버지상인 류치수를 떠올렸다고 한다. 리오넬의 부엌에 있는 한국식 전기밥통만큼이나 이 영화는 그래서 낯설고도 친근하다. 드니식의 ‘만춘’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녀는 기관사의 일상에서 인간의 조건뿐만 아니라 영화의 조건을 성찰하고 있었다.

김성욱(영화평론가) 영화의 주 무대가 파리 북쪽인 듯한데, 어떤 곳인가?

클레르 드니 감독
파리 북부의 전철역이 있는 곳으로, 영화 속 주인공이기도 한 전철 기관사들이 대부분 그 곳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아파트에서 철로가 보인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하는 곳과 떨어져 거주하는 반면에 독특하게도 전철 기관사들은 거주지에서도 차량이나 철로를 보는 것을 즐겨 한다.

김성욱(영화평론가) 전철을 운행하는 기관사의 이야기에 어떤 점에서 흥미를 느꼈나?

클레르 드니 감독 일단 전철이나 기차를 운전하는 직업은 역사적으로 오래됐다. 게다가 기차의 나이와 영화의 나이는 비슷하다. 영화와 기차, 전철 사이의 관계가 긴밀하다. 초창기에 영화를 만든 사람들과 기관사들은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도 기차가 많이 등장하지 않나? 기차를 타는 사람들도 영화를 연상한다고 생각한다. 기차 속의 시간은 곧 영화 속 시간과 비슷하다. 일종의 최면적인 시간이다. 그런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꿈꾸게 하고 지켜보게 하는 시간이다. 기관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는 언젠가 라디오로 기관사의 인터뷰를 들으면서 받은 강한 인상 때문이다. 그는 기관사라는 직업은 혼자 있는 고독의 시간이 많다고 했다. 집중의 시간, 집중된 고독의 시간이 있기에 인간 조건에 대해 생각하는 직업이라 말했다. 자기로 하여금 내면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조금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침대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 남자에게 편지를 썼고 나중에 만나기도 했다. 차량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철학 교육을 받는 시간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김성욱(영화평론가) 영화도 기차도 운동과 정지가 있다. 운동을 멈추는 정지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인공 리오넬의 친구가 기관사에서 은퇴를 한 후에 철로에서 자살을 하는 것은 그런 운동을 멈춘 후의 죽음이란 느낌이 들었다.

클레르 드니 감독 그렇다고 생각한다. 장 르누아르의 영화 <인간야수>를 좋아하는데, 거기도 보면 기차가 나오고 그것은 죽음과 광기를 대변한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에서도 기차는 성적 욕망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표현된다. 현대 사회에서 전철과 기차는 조금은 다른데, 기차는 미국영화를 연상케 한다. 시골을 지나갈 때 그건 영웅적 느낌을 준다. 반면 전철은 매일의 일과와 연결된다. 전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불행하거나 피곤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기차는 그렇지 않은 편이다. 파리에서는 기차로 와서 죽는 사람들도 꽤 있다.

김성욱(영화평론가) 장 르누아르, 그리고 프리츠 랑의 <인간의 욕망>에서 기관사 주인공은 성적인 욕망을 갖고 있고 또 지극히 폭력적이다. 반면 당신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대단히 과묵하고 고독하다.

클레르 드니 감독 주인공 리오넬(알렉스 데스카스)은 내향적인 인물로 세 가지 원천에서 영감을 얻어 구축한 인물이다. 말했듯이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가 영감의 원천이었다. 두 번째는 개인적인 원천으로, 어머니로부터 들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당신이 조금은 광기가 있었고, 미남이었고 여자들이 좋아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딸을 잘 키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세 번째는 배우에게서 온 것인데, 알렉스 데스카스에게서 오즈 야스지로의 아버지상인 류치수를 떠올렸다. 오즈 영화의 아버지 또한 내향적인 인물이다. 리오넬의 인물상은 내가 꿈꾸던 아버지상이기도 했다. 과묵하고 자신의 일, 즉 직장의 일과 집안의 일을 구분한다. 그것이 영화에 반영됐다. 아마도 그에게 딸이 없었다면 과음을 하거나 변화무쌍한 기복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딸 때문에 규칙적인 삶을 살아간다. 영화 후반의 아프리카 레스토랑 장면을 보면, 리오넬은 그곳의 주인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려 하는데, 그 이유는 이제 딸과 헤어지려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성욱(영화평론가) 오즈의 영화에서는 결혼식과 장례식의 장면이 비슷한 느낌을 준다. 만남이 곧 필연적인 헤어짐이 된다는 ‘회자정리’가 있다. 언급한 레스토랑 장면에서 영화 속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지만 곧바로 헤어지게 될 느낌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오즈의 영화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클레르 드니 감독 그렇기 때문에 나도 영화 마지막에서 리오넬의 딸인 조세핀의 결혼식을 보여주지 않고 결혼식 직전의 장면으로 끝을 맺기로 결정했다. 마치 오즈 영화에서처럼 말이다.

김성욱(영화평론가) 딸 조세핀의 이야기에는 계급 차이와 관련한 노동계급의 문제가 있다. 가족 이야기에 계급문제를 연결하는 것은 어떤 생각에서 나온 것인가?

클레르 드니 감독 계급적인 것과 가족의 문제는 삶이 그러하듯 섞여 있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무시되고 있고, 계급 투쟁과 관련한 문제도 철 지난 것처럼 회자된다. 조세핀의 학교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프란츠 파농에 대해 말하지만 그런 것은 제3세계의 채무 문제가 유행이 지난 것처럼 말하듯이 옛날이야기로 치부된다. 하지만 지금도 문제는 남아 있다. (갑자기 19층의 호텔 창문 바깥으로 바다를 쳐다보며) 이 호텔의 19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파트와 바다 위의 선박들이 보인다. 여기에 있으면 노동계급이니 제3세계의 문제가 시대에 뒤떨어진 듯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호텔에서 내려가 저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하루에 얼마를 받는지, 회사가 만약 문을 닫으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와 관련한 문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삶에는 계급의 문제가 섞여 있다. 급여, 노동, 육아, 교육 문제는 첨예한 문제다. 정치적인 문제, 사랑,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가 일상에서는 서로 섞여 있다. 계급 문제에 있어서 피부색의 문제 또한 중요하다. 이는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철 지난 문제가 결코 아니다.

김성욱(영화평론가) 당신 영화에서 머문다는 것과 떠나는 것이 대조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조세핀은 자신의 거주지에서 떠나고 싶어 하고 그의 남자친구 노에는 언제나 바깥으로만 돌아다니는 인물이다. 리오넬과 조세핀이 독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처럼 보이기도 했다. 레스토랑 장면이 특별했던 것은 본다는 것과 접촉하는 것이 대조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리오넬은 레스토랑의 주인 여자를 쳐다보다 손을 접촉하고, 조세핀과 노에도 서로 쳐다보다 키스를 한다. 그러한 접촉은 고독한 인물들이 자신의 고립을 탈피하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클레르 드니 감독 지금 질문한 것들은 사전에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견해에 동의한다. 레스토랑 장면에서 노에가 조세핀의 머리를 만지거나 키스를 하는 것은 접촉하는 것으로, 그것은 각자의 작은 영토에서 벗어나는 행위라 말할 수 있다. 인물들 각자의 영역이 있지만 거기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독일로 가는 여행도 과거로의 회귀라는 것이 맞다. 어쨌든 사적인 자기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감히 시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조세핀이 노에의 방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장면을 기억하나? 조세핀이 특별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려는 제스처라 말할 수 있다. 질문한 문제는 굉장히 광범위한 문제이기에 그걸 답하려면 족히 한 시간은 더 말을 해야 할 것이다.(웃음)

2008.10.14.

* 부산에서만 세번 째 클레르 드니를 만났다. <금요일 밤>, <침입자>, 그리고 올해 신작인 <35 럼샷>의 상영 이후에 그녀와 인터뷰를 했다. 부산에 내려간 목적 중의 하나가 그녀를 만나는 일이었으니. 그녀를 워낙 좋아하는 탓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그녀의 회고전을 개최했었지만 매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혹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며 어떤 말을 건네야할까를 고민하곤 했다. 하지만 매번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단번에 먼저 '다시 만나 반갑다'는 인사를 던진다. <침입자>로 부산에 왔을 때, 그녀가 묵고 있던 '조선비치 호텔'의 방에서 인터뷰를 했던 일이 기억나는데 그 때 그녀는 두툼한 아르토 전집을 읽고 있었다. 전날 자크 데리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을 건넸다. 파리를 떠날 때 장 뤽 낭시로부터 데리다가 무척 몸이 안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산의 호텔에서 그의 부음을 듣게 됐다고 서글픈 마음을 털어놓았었다. 그녀는 통상적인 서양인들과는 달리(뒤라스가 식민지 태생이 백인이듯이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백인이다) 다정다감한 면이 많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뭔가 영화라는 세계의 미지의 영토에 잠깐 다녀온 듯한 행복감을 얻게 된다.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을 보고, 또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매번 그녀의 신작이 궁금해진다. 인터뷰에 적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번 신작인 <35 럼샷>에 많이 반영했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녀가 느끼고 경험하고 또 생각했던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다시 당신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는 말로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랜드호텔의 19층에서 잡지에 실릴 사진을 촬영하는 그녀의 모습을 또 잠시동안 다시 지켜봤다. 감독이란 정말 '멋진 직업'이다. 그녀를 보면 늘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