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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2008시네마테크의친구들영화제 에필로그] 녹색의 방과 시네마테크 본문

영화일기

[2008시네마테크의친구들영화제 에필로그] 녹색의 방과 시네마테크

Hulot 2008. 2. 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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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는 과거의 이미지들 대부분은 불가피하게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심지어 조금 전에 본 영화조차도 그러하다. 아니 한 편의 영화에서 하나의 영상이 다른 영상으로 대치될 때 이미 처음의 영상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 조차 있다. 영화가 끝난 후에 우리가 보았던 이미지들이 어디에 보존되는가를 떠올릴 때가 있곤 하는데, 그럴 때면 제대로 보기 위해 혹은 기억하기 위해 더 이상 보지 말고 눈을 감아야만 할지도 모를 일이다. 

   

1월 초에 시작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이제 마지막 날을 고하고 있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만약 축제의 날들이었다면, 의미 있는 날들이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보다 단지 영화를 보며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들을 보며 무의식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억의 호출로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선택된 영화들이 사실은 서로 아무런 관련 없이 다른 시간과 역사의 이미지들로 조응을 이뤄내는 그런 체험을 함께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녹색 방>(78)은 축제의 끝이지만 또한 시작이기도 하다. 생명의 가녀린 호흡처럼 흔들거리는 촛불로 가득한 예배당에 직접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는 친구들의 사진이 서로 맺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왜 죽은 사람에게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처럼 다양한 감정을, 정다운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인가'라는 줄리앙(트뤼포)의 질문은 불가피하게 사라질 운명에 처해버린 죽음들, 과거의 영화의 기억을 소환하려는 주문처럼 보인다. 그건 죽은 자들을 살게 하고 싶은, 혹은 지나가버린 사랑을 살아나게 하는 불가능한 열망으로, 눈물을 동반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불가능한 열망은 그러나 좌절로 끝맺는 것이 아니라 드레이어의 <오데트>에서처럼 믿음을 더 강렬하게 요청한다. 세실리아(나탈리 베이)가 줄리앙(트뤼포)에게 아버지의 환영을 그가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봤다고 말할 때,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마치 예배당의 촛불처럼 어둠속에서 반짝거리며 빛을 발한다. 이 때 눈물은 어둠 속에서 스크린 위에 빛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도 같은 것이다. 눈물을 동반하지 않는 환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주변에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죽어 있는 친구들이 더 많다고 말하는 줄리앙 또한 죽은 아내의 사진들로 가득한 '녹색의 방'에 의자를 자리하고 앉아 빈 시선으로 홀로 눈물을 흘린다. 아니 그는 이미 눈물로 보여져야할 인물처럼 빗물에, 혹은 종종 불투명한 유리창에 흐릿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트뤼포는 관객들이 줄리앙을 눈물로 봐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관객의 시야를 흐릿하게 가리는 눈물, 이미지를 눈물로 번지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리스 조베르의 장엄한 음악을 <녹색 방>에 가져오면서, 트뤼포의 <녹색 방>은 장 비고의 <라탈랑트>에서의 마지막 삶의 열정을 떠올리게 한다. 트뤼포는 장 비고에 관한 헌사의 글에서 <라탈랑트>를 찍을 때 죽음을 앞에 두었던 그가 열병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라며 '친구가 몸을 아끼라고 자신을 보살피라고 충고했을 때, 비고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장 비고는 자신의 삶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한정된 시간에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이 영화가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그런 마음으로 카메라 뒤에 서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트뤼포는 그러나 비고처럼 카메라 뒤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스크린 위에 등장하고 싶어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 시네필이었던 트뤼포는 스크린 위에 자신의 죽음을 기입하고 싶었을 것이다. 스크린에서 상을 치른다면 레퀴엠이 없는 죽음, 영원히 살아 있는 죽음을 그가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줄리앙/트뤼포의 죽음은 그런 점에서 장 콕토의 <오르페의 유언>에서의 시인의 죽음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눈물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진지한 관객들이 있다면 언젠가 시인의 세상이 올 거란 믿음을 보여준다. 콕토는 이 영화를 피와 눈물의 고통으로만 독해가능한 시인의 유산이라 말했었다. 그는 영화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꿈을 꾸며 마치 견고한 현실인 듯 환상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고별영화를 만들면서 콕토는 그러나 '만약 이 영화가 당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난 슬플 것입니다. 나도 스태프들도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나의 별은 하이비스커스 꽃 입니다'라고 말했다. 시인의 유언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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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방>의 한 장면에서 줄리앙은 세실리아에게 ‘내가 죽으면 나를 위해 마지막 초를 켜 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세실리아는 ‘예, 하지만 그럼 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위해 초를 켜줄 거죠’라고 되묻는다. 그것은 응답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질문은 만약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삶의 무상함에 대항할 수 있게, 그리고 죽음을 살아 있게 해주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삶과 분리된 믿음 또한 살아 있지 않은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삶을 사랑 하지 않는 죽음에의 헌신이란 실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줄리앙의 삶이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면, 그의 죽음은 그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또 다른 이에 의해 촛불이 켜지는 순간에만 빛으로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빛을 비추어줄 타인에 의해서만 죽음도 삶도 영원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그러하듯 언제나 영화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설사 무인도에서라도 영화를 만들 예술가가 있을 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 영화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예술이다.   

  


'녹색의 방'에 명멸하는 빛을 발하는 촛불을 켜는 것처럼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또한 어둠 속에서 빛을 투사하는 행위이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녹색 방>을 만들기 2년 전인 1976년에 세상을 떠난 프리츠 랑은 이미 <피곤한 죽음(운명)>(1921)에서 사신이 거주하는 수천 개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방을 스크린에 그려내며 각각의 초가 인간의 생명의 빛을 상징하며 그것이 꺼졌을 때 삶도 끝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깜빡거리는 촛불, 그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표현하는 것이자 영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한 30여 편의 영화 또한 그렇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러나 종종 위태롭게 흔들리는 하나하나의 촛불이라 할 수 있다. 기억 속에 그 빛이 오랫 동안 남아 있기를, 어둠 속에서 빛을 찾기 위해 초를 켜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기를 소망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제가 그런 믿음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기원한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