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at has nine lives.

저작자 표시
신고

'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 해피 뉴이어  (0) 2016.12.31
最好的時光  (0) 2015.11.14
설의 사당시장  (0) 2015.02.20
낙원의 겨울  (1) 2015.01.19
Happy New Year, 2015  (1) 2015.01.01
영화는 언제 시작할까?  (0) 2014.11.22




당나귀, 우리, 발타자르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는 그의 영화 중에서도 꽤 예외적인 작품처럼 보인다. 전작들의 긴밀하게 연결된 구조와 비교하자면 이야기가 분산적이고 산만하다. 이런 느슨한 구성은 그의 유작 <돈>과 비교해 볼 만하다. <돈>이 말 그대로 돈의 순환을 그렸다면, 이 영화에서 순환되는 것은 당나귀이다. <당나귀 발타자르>에서의 우연적 연결들은 그러나 작품의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당나귀이다. 원제 ‘Au hasard, Balthazar’에는 ‘우연 hasard’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는 우연히, 그때그때 주인의 사정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양도되는 발타자르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당나귀 발타자르는 영화 대부분의 장면에 모습을 보인다. 발타자르는 주인공이자 사건의 진정한 증인이다. 그는 이 영화의 특권적 시점을 반영한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발타자르의 눈의 클로즈업은 그런 시점을 예시한다. 발타자르는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의 추이에 따라 꼼짝없이 고초를 겪는 수동적인 존재이다. 그는 물론 인간의 해석과 이해를 넘어선 존재이다. 그의 울음소리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가 발타자르의 시선을 차용하는 것은 우연처럼 진행되는 영화의 불가해한 연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자초지종을 알 수 없는 사건들의 연결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발타자르의 시점에 설 때 알몸의 생생한 현실로 납득될 수 있다. 발타자르의 시선의 도입은 그러므로 인간과 동물을 공명하게 하면서 인간의 이해 불가능한 행동이나 사건을 그대로 경험하게 한다.

그런데 이런 수동적 시선은 브레송의 영화에서 종종 등장한다. <잔다르크의 재판>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개의 시선이나, <돈>의 끔찍한 라스트에서 이곳저곳을 돌다다니는 개의 시선이 그러하다. 발타자르는 우연적인, 하지만 그런 이상한 일이 저기서 벌어지고 있음을 그대로 꼼짝없이 보고 경험한다. 무기력해 보이지만 그런 발타자르는 브레송이 생각한 스크린에 육화된 우리 관객의 진정한 모습이기도 하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에디토리얼 / 2016.05.

저작자 표시
신고
  1. 1466098579 2016.06.17 02:36 신고

    알찬 정보 좋네요~

  2. 1467650867 2016.07.05 01:47 신고

    좋은글 감사

비토리오의 질문. "주식으로 사라진 돈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혹은, 정서적으로 무미건조해진 헤어진 연인들의 사랑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바르트가 안토니오니를 예찬하며 말했던 것처럼 '일식'에서 안토니오니는 멈추어 서서 오랫동안 대상과 사물이, 인물이 사라질때까지 바라본다. 사물들이 소진될때까지 철저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것. 우리들이 없는 세계를 보는 불안. 이는 진정한 영화(관람)의 모험이다.


일식(1962)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Eclipse(1962) / Michelangelo Antonioni

저작자 표시
신고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아내 미즈키는 거실 뒤편에서 누군가 지켜보는 인기척을 느껴 되돌아본다. 한 남자가 서 있다. 남편 유스케다. “몇 년 만이지?” “3년이네요.” 둘의 대화는 이상할정도로 담담하게 진행된다. 이들 사이의 3년이란 시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속내를 알기 어려운 꽤나 느긋한 부부의 대화다. 그가 3년 만에 되돌아온 유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이런 상냥한 환대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실제로 3년 전에 사라졌고, 시체는 발견되지 못했지만 죽은 것은 사실이다. 유스케는 자신의 몸이 바다에 있고, 고기들이 몸을 이미 씹어 먹어 버렸기에 시체를 보더라도 자신을 알아채지 못할 거라는 끔찍한 말을,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아내에게 말한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 그녀는 성을 내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와락 달려드는 일도 없이 상냥하게 유령을 환대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신작 <해안가로의 여행>은 부부의 재회를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이들의 과묵한 대화는 몹시 인상적이다. 그 리듬을 잊기 어렵다. 장면을 바라보는 우리의 리듬과는 무연하다. 누구나 자기만이 느끼는 아픔의 리듬이 있고, 이 순간의 리듬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다. 헤어짐을 견디거나 고통을 멀리 떼어내는데 그들 각자의 고유한 시간이 걸린다. 헤어짐의 아픔,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시간은 이곳 생에 걸친 사람들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 장면은 저쪽 편, 죽음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그 아픔의 리듬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3년 만에 되돌아왔다. 유령의 도래에 담긴 비밀은 부활에 있을게 아니라 3년이란 시간의 간격에 있다. 죽은 자가 비록 당돌하게 되돌아오지만(그렇게 보일 뿐, 유령들 각자 재림의 고유한 리듬이 사연만큼 있다), 그러므로 공포나 놀람보다는 재림이 불러오는 것은 맑은 눈물이다. 브레송의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여인의 눈에 촉촉이 젖은, 눈가의 물이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순간 말이다. 죽은 자 가운데 되돌아온 남편이 아내를 이끌어 당도하게 될 해안은 말 그대로 물이 가장 많고 빛나는 곳이다(더불어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에서 과다한 물의 이미지가 불러온 정서를 또한 떠올려보게 된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 대한 짧은 글에서 밝힌바 있지만, 3.11 혹은 4.16 이후 당분간 우리는 물의 이미지들에서 어떤 죽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안으로의 여행이란 그러므로 물에 도달하는 것이자(그 곳에서 남편은 죽었다고 한다), 밝게 빛나는 물들(눈물)과 만나는 여정이다. 그가 몹시도 아름다운 곳이라 말했던 이곳은 사실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디에나 있을 바닷가일 뿐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도달하는 순간 관객인 우리는 이 여행을 납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정말 아름다운 곳에 도착한다. 모든 것이 빛나는 곳이다. <도쿄 소나타>에 이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몹시도 감동적인 영화를 이 세상에 가져왔다는 것에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도 <도쿄 소나타>와 마찬가지로 피아노와 바다가 등장한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 반복에 대해 먼저 말해야만 한다.

 



<해안가로의 여행>은 피아노를 치는 한 소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주 느린 템포의 피아노곡이 연주되고 있다. 아이가 있는 거실의 넓은 공간은 몇 개의 가구를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는 편인데, 이상한 것이 저 뒤편의 바깥으로 향한 창문에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기에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왜 여기서 창문이 열려 있어야만 할까? 문이 열려 있는 것도,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그 자체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이가 있는 거실의 창문이 바람에 흔들릴 정도로 열려 있다는 것은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자면 낯설다Unheimlich. 배치의 의도를 작가에게 묻지 않고는 가볍게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이다. 이 부조리한 장면에 눈길을 던지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구로사와 기요시의 과거 작을 거론하며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는 무례한 이들이 아닌, 여전히 최근작들을 몹시도 좋아하는 드문 팬들일 것이다. <도쿄 소나타>의 몇 장면들이 이 순간 그들에게도 떠올랐을 것이다. 거론하는 <도쿄 소나타>의 첫 장면은 이러하다. 카메라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측면 운동을 하며 움직여 거실을 보여준다. 거실의 바닥 위로 신문지 한 장이 바람에 날린다. 전경의 탁자 위에 놓인 잡지의 몇 페이지가 마찬가지로 바람에 날려 펄럭거린다. 집의 내부로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다. 카메라가 천천히 더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저 뒤편,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을게 눈에 들어온다. 가정주부인 메구미가 급히 뛰어나와 창문을 황급히 닫고 마루를 걸레질한다. 물끄러미 창문을 쳐다보던 그녀는 다시 문을 열고는 비가 몰아치는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장면에서 열린 창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장면. 학교에서 꾸지람을 들은 소년은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는 우연히 카네코 피아노 교실이란 간판이 붙어있는 가정집 앞을 지나다 열린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된다. 아이가 고개를 돌려 집을 들여다보면 피아노 선생이 한 소녀에게 레슨을 하고 있다. 아이는 천천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얼마 후, 꼬마는 그 선생에게서 피아노 강습을 받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감동적인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아노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다. 아이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강당의 뒤 편 창문에서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어쩌면 <해안가로의 여행>의 첫 장면과 가장 유사하다 말할 수도 있겠다. 열린 창문으로 바깥의 바람이 실내로 들어온다. 반대로 내부의 무언가가 바깥으로 향하게 되기도 한다(<도쿄 소나타>에서 열린 문으로 들어온 정체불명의 도둑에 이끌려 메구미는 해안가로 납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설정을 <해안가로의 여행>의 기이한 여행과 연결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해안가로의 여행>의 첫 시작은 비슷한 구도에서 시작한다. 한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고, 뒤편의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이 펄럭거린다. 잠시 후, 피아노 선생인 미즈키가 등장해 아이에게 천천히 연주할 것을 주문한다. 나중에 소녀의 어머니는 그런 미즈키의 주문을 못마땅해 한다. 조금 밝게, 빠르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는 없느냐고. 이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쯤에 다시 반복되어 나온다. 유스케와 해안가로의 여행 중에 음식점에서 함께 일하게 된 미즈키는 우연히 식당에 있는 피아노 위에 놓인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악보에 손이 끌린다. 무심결에 피아노 앞에 앉아 곡을 연주한다. 갑자기 가게 주인 여인이 달려와 그녀의 연주를 제지한다. 허락도 받지 않고 연주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 말한다. 격렬한 제지에 미즈키는 적잖게 놀라는데, 그녀는 슬픈 사연을 털어 놓는다. 그녀의 여동생이 연주하던 곡이다. 동생은 어릴 때 연주를 많이 했지만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아 곡을 완주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어린 나이에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부모는 피아노를 버리자 했지만, 악기가 동생의 몸의 한 부분이라 여긴 그녀는 동생을 기억하며 여태껏 버리지 못하고 있던 터다. 사연을 들은 미즈키는 자기가 그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싶다 말한다. 그러자 응답처럼 갑자기 어린 아이의 유령이 나타난다. 언니는 망연자실 바닥에 쓰러진다. 미즈키는 아이가 곡을 연주하도록 피아노로 이끈다. 아이는 건반 위에 손을 얹고 피아노를 연주하지만 아마도 예전처럼 실력에 부친 듯 쉽지 않아한다. 연주를 지켜보던 미즈키는 나지막이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다시, 너의 템포로 연주하렴.” 피아노가 놓인 식당 저 뒤쪽의 열린 창문으로 커튼이 마찬가지로 펄럭거린다. 실내는 잠시 어둠 속에 잠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작은 빛이 이 세 명의 여인들을 어둠 속에서 감싸고 있다. 유미코는 소녀의 연주를 응시하고, 저 뒤편에서 언니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동생의 피아노 연주를 조용히 듣고 있다. 세 여성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구도가 인상적이다. 상냥한 기쁨, 혹은 부드러운 슬픔의 순간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지금 어쩌면 나루세의 세계에 근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미코의 눈에 촉촉이 눈물이 고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눈물을 반짝거리고 있다. 아이는 연주를 마치고 컷이 되면 장면이 바뀌어 이내 소녀는 사라지고 없다. 어둡던 식당이 천천히 밝아진다. “너의 템포로 연주하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미즈키가 아이에게 주문했던 느린 템포의 연주는 기실은 이 아이에게 어울리는 리듬이었을 것이다(물론 그 템포는 남편과 사별한 미즈키의 삶의 리듬이기도 했다).




이런 식의 연출은 전형적인 호러영화와를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유령이 어떻게 출현하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 반대가 중요하다. <절규>로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던 2007년에도 그는 사다코의 유령처럼 어떻게 기발한 방법으로 유령이 출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흥미를 느끼는 것은 어떻게 유령이 사라지는가이다. 하늘로 날아갈 것인지, 문을 열고 나갈 것인지, 계단을 타고 내려갈 것인지 등등. 이런 생각은 호러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일찌감치 무효로 하는 설정이지만 더 흥미로운 질문이다. 유령은 이 세계에 갑자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빈 공간에 거주하고 있다. 어떻게 유령을 보게 될 것인가. 혹은 유령임을 어떻게 판명할 것인가. 최종적으로는 어떻게 유령과 결별할 것인가. 횡으로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이런 빈 공간의 여백을 담아내는데 적절했을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달라진다. 유스케는 왜 돌아왔을까. 그것도 3년의 시간이 걸려서. 비록 유스케가 생전 좋아했을 음식을 요리하는 때에 매번 돌아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그의 첫 출현이 그랬다. 마찬가지로 그가 다시 사라진 이후-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즈키 그를 두고 떠났던 일이지만- 다시 그를 불러내기 위해 음식을 요리한다), 이는 개연성이 없는 하나의 설정,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유령은 언제나 빈 공간에 거주한다. 그의 출현은 전적으로 그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다만 그를 소환하거나 사라지는 것에 영화적 장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프레임이라는 틀(구조물)과 컷 이라는 분리장치다. 영화의 프레임은 가시성의 틀이다. 틀 안에는 물론 보이지 않는 공백들도 담겨진다. 또 다른 하나. 하나의 컷에서 다른 컷 사이의 공백, 어둠에서 유령은 나타나고 사라진다. 가령, 한 컷에서는 소녀가 피아노를 치고 있고 다음 컷에서는 소녀는 없고 피아노만 놓여있다. 멜리에스의 영화처럼 트릭필름이라 불렀던 초기영화부터 있던 아주 단순하면서도 오래된 방식이다. 프레임이든 컷의 변경이든, 여기서 유령의 출현과 사라짐은 불가해한 바깥에의 감각을 강렬하게 한다. 프레임 안으로 바깥의 세계를 유입하는 것, 혹은 컷의 바깥으로 유령을 사라지게 하는 것.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유령이란 존재(와 그의 출현과 사라짐)가 인물의 심리와 무연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유령적 존재를 라울 루이즈의 용어를 빌려 ‘정오의 유령’이라 부르고 싶다. 루이즈가 들려주는 기이한 일화. “어느 날 한 사람이 칠레의 거리를 걷다 40년 전의 오랜 친구를 만났다. 그들은 진부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눴다.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는다거나, 우유 값이 올랐다거나, 근처 다리에 구멍이 있다던가 하는 그런 진부한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들은 헤어졌다. 얼마 후 그가 깨닫는다. 그 친구는 몇 년 전에 죽었던 것이다.” 루이즈는 이러한 존재를 ‘정오의 유령’이라 불렀다. 이는 나쁜 이들에게 복수하는 그림자나 고딕 유령이나, 억압된 것의 귀한이나 악의 있는 힘으로 살아 있는 자에 출몰하는 그런 유령이 아니다.

그가 돌아왔다. 처음에 미즈키는 유스케가 돌아온 것이 꿈인가 싶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러나 “나랑 같이 가겠어. 아름다운 곳이야.”라 말한다. 이렇게 되돌아온 자가 같이 가자고 하는 곳은 그러나 피안의 세계가 아니다. 어디에나 있을 현실의 세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의 세계의 다른 곳이다. 그를 돌보아주었던 사람들이 있던 곳이다. 부부는 운전면허증이 없어서, 기차를 타고 여행한다. 때론 버스를 타기도 한다. 현실의 수고는 유령이라고 해서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유령 유스케는 심지어 길을 몰라 기차역의 승무원에게 행선지를 묻기도 한다. 그들은 때론 자신이 죽은 줄 모르고 여전히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 사람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어느 날밤에 미즈키는 유스케에게 묻는다. 왜 돌아왔어요? 그는 대답대신 묵묵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시 묻지만 왜 유스케는 3년 만에 되돌아온 것일까. 그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수백 장의 기도문을 썼던 응답이 되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마치 제사상의 음식처럼 어느 날 우연히 마련했기 때문인가. 사실 그 이유는 미즈키에게 연유한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의문은 미즈키가 아닌 유스케에게 전적으로 속한 것이다. 그는 어찌된 일인지 아내에게 되돌아오기에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므로 둘의 여행은 아내가 따라나선 그의 사후 3년의 행적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그녀에게 다가오는데 3년의 시간이 걸렸던 이유를 가늠하는 일은 드라마의 논리에 따라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설명은 그러나 흥미롭지 않다. 영화는 대신 다른 길, 꽤 물리학적 경로를 따라간다. 영화 후반부에 유스케는 시골 작은 마을에서 과학 선생처럼 주민들에게 우주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로 우주의 기원과 존재에 대해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은 무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 설명은 드라마의 개연성과는 무연한 영화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자와 함께하는 여행은 단지 둘이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유령이면서도 3년을 살았던 그의 행적을, 사후생의 흔적을 탐구하는 여정이다. 아내는 그런 다른 생을 받아들인다. 아름다운 곳이 있어, 함께 가지 않겠어. 유스케가 미즈키를 여행으로 안내하는 주문이다. 아름다운 곳. 사실 그들이 찾은 곳은 절경도 실로 아름다운 곳이라 말할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작은 마을들이다. 유스케가 말한 아름다움이란 그러므로 아직 볼 수 없었던 바깥의 세계다. 평범하지만, 전적으로 유령의 눈에 비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의 눈앞의 세계란 아직 미즈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들, 말해지지 않은 것들, 아직 들리지 않았던, 그러므로 아직 보이지 않았던 것들과 관련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미즈키는 유스케에게 묻는다. “나는 궁금해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이 둘은 함께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즈키는 지금 유스케와 같은 것을 보고 있던 것일까? 미즈키는 지금 영화에 고유한 특별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영화란 나 이외의 사람에게도(실은 죽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도)고유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한다. 존재하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차이를 최대한으로 줄여가는 것.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보는 사람이 공유하는, 영화적 체험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은 이를 가장 감동적으로 느끼게 하는 영화다.

사족을 달자면, <해안가로의 여행>은 올해 상반기에 개봉할 예정이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다시 극장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체험하고 싶다. 아직 정식 개봉하지 않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그 때에 남은 이야기를 더하고 싶다. 더 기쁜 일은 이미 구로사와 기요시가 또 다른 신작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크리피>라는 작품으로, 일가족 실종사건을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다. 올 6월에 일본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늘 있었지만) 돌아온걸 환영해요.

저작자 표시
신고


보이지 않는 나루세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좋아했던 에드워드 양은 그의 영화적 특징을 ‘불가시의 스타일’이라 말했다. 오즈와 구로사와 아키라와 비교해 보자면 스타일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흐트러진 구름>의 라스트 신을 그 사례로 지적한 바 있다. 물론, 나루세의 영화에 스타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루세 영화의 옥외 장면에서 인물들이 둘이서 걷는 순간을 천천히 카메라가 따라가며 보여주는 이동촬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스타일이다. 오즈 야스지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나루세의 연인들은 때론 멈춰 서고, 때론 되돌아보며 걷는다. 이토록 아름답게 연인들의 발걸음을 완성한 감독을 찾기 힘들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루세의 스타일은 비가시적이다. 그간 한국에서 공개된 나루세의 영화가 대체로 12-13편 정도의 비슷한 목록들이 반복적으로 회자됐기 때문이다.
12월 20일부터 시네마테크가 준비한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은 그런 나루세의 비가시성에 주목해 열리는 행사다. 지난해 처음 이 회고전에 붙인 명칭은 ‘Unseen Naruse’였다. 이번 회고전은 총 26편의 작품이 상영되는 최대 규모의 행사다. 나루세는 오즈 야스지로와 달리 예도물 藝道物 영화에서 연애물, 부부 이야기, 여성 일대기, 가족물, 시대물, 문예물, 그리고 심리 서스펜스 영화(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후기작인 <뺑소니 ひき逃げ>(1966) 같은 영화가 있지만, 아쉽게도 이번 회고전에 포함되지는 못했다)까지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이번 회고전에는 실로 폭넓은 장르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나루세는 제작사가 제안한 기획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의 약함’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나루세는 영화사가 제시한 예산과 스케줄을 언제나 준수한 월급쟁이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탁월한 예술가이지만 동시에 어떤 장르 영화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을 뽑아낸 ‘시스템의 작가’이기도 하다. <여배우와 시인 女優と詩人>(1935)이나 <여자 안의 타인 女の中にいる他人>(1966) 같은 작품들이 빠진 것이 못내 아쉽지만, 여전히 불가시의 영역에 있는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에 한 발 더 들어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김성욱)

시네마테크 소식지 / 12월호. 에디토리얼

저작자 표시
신고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