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만에 아트선재센터를 찾아 영화를 봤다. ‘허우 샤우시엔 회고전’을 진진과 공동 개최하면서 개막행사 참석을 요청받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개막행사에 이어 '자객 섭은낭'을 보았다. 1시간 44분 동안 영화와 함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처음 아트선재센터 지하에 서식지를 마련했던 시절, ‘허우 샤오시엔 회고전’을 2003년 4월에 개최했다. 당시 6,000여명의 관객들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해가 지나 2004년 10월 무렵, 아트선재센터가 공사를 이유로 계약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통고를 해왔다(사실 이런 방식이 최근 벌어진 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서 놀랍기도 했다). 2000년이래로 시네마테크가(당시는 문화학교서울 영화제로 개최했다) 회고전을 계속 해왔던 곳이다. 이곳에서 프리츠 랑 백주년 회고전을 했고,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그 때 세이준 감독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을, 에릭 로메르 회고전을 개최했던 곳이다. 2002년 5월에 정식으로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아트선재 지하에 개관할 수 있었다. 개관 3년만에 계약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2005년 3월, 개관 이래로 1,000여편의 영화를 상영하고는 파스빈더 회고전을 끝으로(마지막엔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을 상영했다), 말 그대로 쫓겨난 시네마테크는 낙원으로 이전했다. 공사가 끝나면 되돌아갈 생각도 있었고, 몇 번 비공식적 경로로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그 곳이 좋은 장소라기보다는, 처음 문을 연 곳에서 가능하면 오래 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었다. 수 십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파리나 뉴욕, 도쿄의 영화관들처럼. 그곳에서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찾을 수 있는 곳으로. 하지만, 그 이후 아트선재센터가 개보수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고, 계약도 다시 할 일도 없었다.

그 이후로 십년간 나는 근처를 지나간 일은 있지만 한 번도 그곳에 들어가 본적이 없다. 그곳은 말하자면 기억이 노예가 되는 장소였다. 처음 시네마테크를 개관한 곳이지만, 나는 그곳을 잊고 살았다. 그러던 지난해, 어쩌다 참여한 학술 행사로 불가피하게 무대에 올랐고, 그리고 올해 초 좋아하는 필립 가렐의 '질투' 상영에 이은 토크로 어쩔 수 없이, 결코 되돌아갈 생각 없던 그 곳을 찾았다. 그리고 오늘, 십년 만에 처음 객석에 앉아 영화를 봤다. 개막행사 전에 아주 짧게 그런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하긴 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14년간 시네마테크를 하면서 네 번 허우 샤오시엔 회고전을 하게 됐다. 2003년 처음 소격동 시절에(아트선재 시절이라 결코 말하지 않는다), 2005년 낙원으로 넘어와 1회 대만영화제를 하면서(그 해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내한했다), 2008년 2회 대만영화제에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를 또 몇 편 상영했고, 그리고 올해 2015년 새 공간으로 이사 오면서 다시한번 허우 샤오시엔 회고전을 개최한다. 이번 회고전의 제목을 '最好的時光', 즉 ‘가장 행복하고 좋았던 시간’이라 정했던 것에도 이유가 있다.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틀었던 그 시절은 시네마테크에도, 우리에게도 좋았던,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이제는 그 기억들도 피하고 싶어진다. 다행히 거리에는 비가 내렸다(가렐 영화의 토크를 했던 날에도 우연처럼 비가 내렸다. 그 날, 예전 소격동 시절 영화를 보러오던 사람들과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던 길을 다시 걸으며 안국역 횡단보도에 이르러서는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그곳에, 아마도 더 이상 가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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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지아니 아멜리오의 <아이들 도둑>

 

 

 

지난 2013베니스 인 서울에서 <용감무쌍 L'intrepido>(2013)을 소개하면서 지아니 아멜리오 감독에 대해 잠깐 언급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의 작품은 한국에 제대로 소개된 바가 거의 없다. 그의 전작을 소개하는 일은 아직 요원하지만 이번에 상영하는 <아이들 도둑>을 통해 그의 작가적 세계에 조금이라도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베니스 인 서울'에서 소개한 지아니 아멜리오의 '용감무쌍'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  http://cinematheque.tistory.com/434 )

 

영화의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다. 어머니로부터 성매매를 강요당한 11살 소녀 로제타와 그의 동생 루치아노가 젊은 경찰에 끌려 고아원으로 호송되어 가는 과정 중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힘든 현실에 노출되어 사회에 내던져진 아이들과 그들을 지키려는 경찰이 서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이 밀라노에서 시작해 시칠리로 향하는 여정으로 그려진다.

 

아멜리오의 작품은 원제가 암시하듯이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떠올리게 한다. 내용적으로는 데 시카의 또 다른 두 편의 영화 <아이들이 보고 있다 I bambini ci guardano >(1942)<구두닦이 Sciuscià>(1946)와 어울린다. 네오리얼리즘과의 연계를 따지자면 밀라노를 배경으로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루키노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며, 비전문 배우의 기용과 로케이션의 활용, 드라마틱한 구조를 넘어선 보고와 산책의 형식이 분명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유산을 느끼게 한다. <자전거 도둑>에서 자전거를 잃어버린 아버지와 그를 따르는 아들의 교감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것처럼 이 영화 또한 경찰 안토니오와 두 아이들의 감정의 교류가 영화 후반부의 가장 중요한 정서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에서 자전거는 모든 이들이 원하는, 노동자의 삶에서 중요한 물질적 수단이다. 반면, 아멜리오의 영화에서 자전거를 대신한 아이들은 물질적 대상도 아니며 반대로 모두가 원치 않는 사회가 버린 이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들을 어떻게 포착하는가이다. 유일하게 도둑질의 대상이 되는 것이 영화 후반부, 프랑스 여행객의 손에 들린 카메라인 것은 사소한 설정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카메라로 프랑스 여행자들은 소녀의 얼굴을 몰래 촬영했고, 이들은 나중에 소녀가 매춘에 가담했던 사실을 알고는 동정을 표한다. 로제타는 이를 거부한다.

 

 

 

 

여행객의 시점, 혹은 동정의 시선을 대신하는 것이 이 영화 속 두 아이들이 사람들과 만나는 순간들이다. 가령, 아이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수녀원에서 동생 루치아노가 천천히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교실을 둘러보고 병원에 혼자 누워 있는 여자아이인지 남자애인지 알 수 없는 병약한 아이와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병실의 아이는 손거울을 보며 혼자 노래를 부른다. “나는 아주 작은 물고기를 보았네. 지독한 감기에 걸렸고 더러운 물에 병들었지만, 병원에는 그 물고기를 위한 방이 없었다네.” 루치아노는 그 아이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이 영화의 아름다운 순간들(아마도 시칠리로 향하는 바닷가에서 세 명이 함께 수영을 하는 장면은 그들에게 허용된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장 끔찍한 순간들이 이런 식으로 보여진다. 영화는 그런 여정을 그리는데, 이탈리아 남부로의 여정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밀라노 북부의 닫힌 세계와 대조적으로 열린 공간과 자연적 환경을 재전유하는 과정이다. 바다, 해변, 여름의 풍경이 펼쳐진다. 다른 한편, 북부에서 남부로의 여정은 아이들이 태어난 기원적 장소로 회귀하는 과정으로, 남부에서 북부로의 경제적 이주의 과정을 반대로 밟아가며 훼손된 순수성과 영혼의 가치들을 재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회적 차원의 해결이 결말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향한 물리적 폭력과 사회적 불관용의 시선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두 아이가 진정으로 함께하는 순간을 보게 될 것이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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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열번째다. 한 여름 시네바캉스를 처음 시작한 것이 2006년의 일이다. 그 해 7월 25일, 개막작은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였다. 무려 40편의 영화를 쉬는 날 없이 하루에 네 편씩 한달간 상영했다. 에릭 로메르의 8편의 바캉스영화들, 불멸의 스타전, 특별전:비시 정권하의 프랑스 영화, 뮤지컬 영화걸작선, 공포특급, 마스터즈 오브 호러, 필름 콘서트, 씨네키드, 시네클래스 등의 행사가 열렸다. 시네바캉스 열 번의 포스터들을 되돌아보고 있으면 마치 가지 못했던 여름 휴가의-사실 그 십년간 영화제 때문에 여름 휴가를 갔던 적이 없기에-기억들을 떠올리는 것 같다. 이제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여름 바캉스를 떠난다. 2006년 첫 시작을 알렸던 개최의 변을 떠올리면서.

한 여름의 영화여행 - 시네바캉스를 시작합니다!
7월 25일부터 시작하는 ‘시네바캉스 서울’은 서울아트시네마가 해마다 5월에 개관을 기념해 개최하던 ‘시네필의 향연’을 좀더 대중적으로 확대한 행사입니다. 작품수를 약 60 편으로 늘리면서 자연스럽게 기간도 늘어났고 동시에 영화감독들의 연출특강과 교육행사,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네키드’, 그리고 영화와 음악이 함께하는 ‘필름콘서트’ 등의 다양한 행사가 추가되었습니다. 영화애호가는 물론 일반 시민들도 편하고 자유롭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시네바캉스 서울’은 기존의 거대한 영화제들과 비교하자면 아주 적은 예산으로 소박하게 치러지는 영화제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함께 보고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길 원하기에, 다른 호사스런 행사는 없습니다. 레드 카펫도 필요 없고 개막을 알리는 떠들썩한 이벤트 공연도 없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혹은 여행을 떠나듯 극장을 방문해 해변의 폴린느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재회하는 장면을, 폭풍우 속의 장 가뱅과 미셸 모르강을, 매혹적인 자태의 마릴린 먼로와 도미니크 산다를 스크린 위에서 만나며 토드 브라우닝, 사무엘 풀러, 브라이언 드 팔머, 존 카펜터, 다리오 아르젠토와 함께 공포의 휴가길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축제를 영화로 떠나는 ‘바캉스’라 칭한 것도, 이 단어의 본래 의미인 무언가로부터 자유롭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제도화된 영화, 시간의 속박에 갇힌 영화,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좀더 자유롭게 다양한 영화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바캉스는 일주일 정도의 짧은 여행이 아니라 한 달간 지속하는 긴 여행입니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그동안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은 열정적인 관객들과 새롭게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이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가 생기기를 원합니다.

영화는 장소의 기억과 결합한 대중문화의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영화의 참된 기쁨은 사람들이 영화관을 찾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대형의 스크린에서 우리들은 감각, 감정과 감동을 경험하며 추억의 일부가 되는 다양한 세계의 기억과 만나게 됩니다. ‘시네바캉스 서울’은 그런 대중의 기억이 간직된 다양한 영화들을 극장에서 새롭게 다시 만나는 행사입니다. 여행은 매번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기대감과 만남을 도모하는 용기를 제공합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와 함께 즐거운 휴가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2006.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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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랩스틱 개그의 쿨한 매력 - 버스터 키튼 회고전*

 

 

 

 

68혁명 당시의 파리를 배경으로 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2003)의 한 장면에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돌아다니며 영화에 몰두한 두 명의 청년 매튜(마이클 피트)와 테오(루이 가렐)는 무성영화의 전설적인 코미디 배우에 대해 설전을 벌인다. 테오는 찰리 채플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코미디 감독이라며 <시티 라이트>에서 채플린과 눈먼 소녀가 나중에 다시 만나는 장면을 예로 들고 있다. 매튜는 채플린을 깍아내린다. 그는 위대한 배우였을 뿐이라고. 키튼이야말로 20년대의 고다르이자 위대한 작가였다고 그는 말한다. 매튜는 키튼의 <카메라 맨>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채플린과 키튼, 이들 중 누가 더 위대한 무성 코미디 감독이었는가를 묻는 질문은 아마도 20년대 할리우드에서 익살희극이 등장한 이래 되풀이되어온 논쟁일 것이다. 일견 무의미해보이기도 하지만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 켈리에 대해 벌이는 논쟁만큼이나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는 채플린과 키튼의 차이는 앤드루 새리스에 따르자면 시와 산문, 평민과 귀족, 탈구와 적응, 사물의 의미와 기능, 천사로서의 인간과 기계로서의 인간, 이데아로서의 소녀와 관습으로서의 소녀, 슬랩스틱의 원심성과 구심성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에는 보다 영화적인 문제가 있다.

버스터 키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프리츠 랑, 또는 장 뤽 고다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20세기의 영화, 특히 세기 초의 영화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영화가 모던한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키튼은 영화가 탄생한 1895년에 태어났다. 그는 1920년대에 서커스와 마임에 기원한 무성영화의 근본적인 장르인 익살희극(뷔를레스크)의 창시자로 전성기를 구가했고, 유성영화가 도래하던 20년대 후반에 서서히 영화계에서 사라져, 30년대 이후에는 완전히 망각된 존재가 되었다. 그는 1933년 이후에 대략 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대중들의 기억에 남는 영화는 고작 <선 셋 대로>나 <라임 라이트> 정도였을 뿐이다. 이들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미미한 조연에 불과했다. 하지만 버스터 키튼은 6-70년대에 새롭게 조명을 받았고, 영화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던 1995년(마찬가지로 키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던 해)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할리우드의 이방인이었지만 방랑자 ‘찰리’의 캐릭터를 통해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채플린이 냉전의 시기에 할리우드에서 추방되면서 상징적인 인물로 남은 것과 달리 키튼은 할리우드의 시스템의 화려한 조명 아래 그림자속으로 조금씩 느리게 일식되어버렸다. 이는 키튼의 불가피한 운명이었을 런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모던한 세계를 떠나 자유롭게 방랑할 수 있던 찰리와 달리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을 일찌감치 습득했던 키튼은 자신의 몸을 모던한 세계의 기계화된 리듬에 최대한 적응시키려했고, 그 비인격적인 시스템에서 자신의 안정적인 위치를 발견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벌였다. 키튼의 영화속 캐릭터는 그의 화신과도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
성룡을 능가하는 버스터 키튼의 놀라운 기예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습득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생후 6개월 되던 해에 계단에서 굴렀지만 멀쩡했고(이 황당한 꼬마아이를 본 탈출묘기의 고수였던 후디니는 ‘이런, 무척 튼튼한 아이구만buster!’이라 감탄했고 이 때문에 키튼은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3살 때에는 회오리에 휘말려 거리까지 날아갔지만 상채기 하나 없었다고 한다. 하여 키튼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다섯 살때부터 보드빌 쇼의 일원으로 활약을 하게 되었다. 거친 세계에서 일하면서 키튼은 심각한 표정을 유지할수록 웃음을 촉발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어떤 고난에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육체적 고통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넘어져도 일어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럴 때까지 기다리며 결코 울지 않으며 미소 지으려 하지도 않는 것.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무표정한 얼굴 great stone face'은 이런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는 철저하게 환경에 적응하면서 완전한 육체적 추상을 통한 우아한 몸놀림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하려 했다.

키튼의 무표정과 날렵한 몸놀림을 통한 개그는 기계적인 성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베르그송은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기계적인 배열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행동과 사건의 배치는 모두 희극적’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키튼의 개그에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채플린과 키튼은 1920년대 무성영화를 대표하는 두 명의 희극 배우였지만 웃음을 제조하는 방식에서 서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채플린의 웃음은 늘 얼굴과 함께하며 표정을 통해 감정을 포현해냈다. 얼굴이 신체의 가장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채플린의 마임에 근거한 다양한 얼굴표현은 보다 정신적인 천상의 웃음을 만들어냈다. 반면 키튼은 얼굴의 표정을 지워버리면서 마치 거대한 도박장과도 같은 비인격적인 세계 안에서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부지런한 발을 움직이며 아크로바틱 액션개그를 선보였다. 키튼의 재빠른 발은 채플린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지상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천상의 즐거움과 다른 지상의 수고스러움과 고난을 담아내고 있다. 키튼 영화의 묘미는 이런 발 빠른 액션과 상상을 불허하는 스턴트 묘기에 있다. <스팀보트 빌 주니어>에서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 돌연히 집이 무너지는 순간 키튼이 창으로 무사히 빠져나오는 장면(키튼은 이 장면에서 대역을 쓰지 않았기에 몇 번의 NG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놓일뻔 했다고 한다), <제너럴>에서의 기차위에서 벌어지는 추격 장면, <항해자>에서 문어와 벌이는 수중 액션, <손님 접대법>에서 폭포에서 벌어지는 구조작업 등, 키튼의 액션은 당시의 어떤 영화도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톰 거닝이 지적하듯이 키튼은 자신의 영화에서 늘 비합리적인 원칙에 근거한 합리화된 시스템(이는 20년대 미국의 지배적인 생산구조인 테일러주의 또는 포드주의와 등치되는 것이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을 묘사한다. 채플린이 산업적인 생산시스템에 대해 체계적으로 기계파괴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키튼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인물을 통해 역설적으로 시스템의 부조리성을 폭로한다. 이 차이는 채플린과 키튼이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가령 채플린의 희극에서 사물, 기계와 싸우는 찰리는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가아니라 사물, 기계의 악마성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서투른 투쟁을 벌인다. 최종적으로 사물과 기계는 찰리에게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물화되지 않은 찰리의 ‘휴머니티’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찰리가 기계를 다루고 통제하는데 서투른 것은 그가 기계의 단조로운 리듬과 다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튼의 경우에 사정은 달라진다.

 

기계 개그
채플린이 인간과 기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한 반면 키튼은 기계를 인간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키튼의 캐릭터는 대규모의 산업기계와 직면해 그것에 순응하면서 서로 대화하고, 결국은 그것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지배와 통제를 위해서는 기계와 사물에 순응해야 하며, 또한 기계와 사물을 몸의 연장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럴 때 사물과 기계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 키튼의 몸에 반응한다. 예를 들어 <제너럴>(1926)에서 기관사인 키튼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애인을 납치한 북군병사들을 쫓아 기관차 ‘제너럴’을 몰고 추격전을 벌인다. 키튼은 기관차에 탑재된 대포에 불을 붙여 전방의 기관차를 겨냥하는데 이 순간 대포의 포신이 갑자기 주저앉아 오히려 키튼의 기차를 겨냥한다. 위험에 빠진 키튼. 당황한 키튼은 기차의 운전좌석으로 대피하지만 포탄은 이제 막 발사될 직전이다. 이 순간 기관차는 커브에 접어들고, 수평으로 발사된 포탄은 정확하게 직선으로 날아가 북군병사가 탄 기관차에 명중한다. 대포는 키튼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에서 키튼의 의도를 따라온 것이다. 기계를 통제하려는 키튼의 몸, 자율적인 대포기계, 이탈하는 선로와 포탄의 궤도. 이렇게 웃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키튼의 영화에서 사랑과 결혼 또한 이와 유사한 패턴을 반복한다. 영화 속에서 키튼은 매번 채플린과 마찬가지로 한 여인을 사랑하지만 그녀와의 연애의 성공은 늘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갑작스레 다가오고, 둘의 사랑은 매번 결혼식이란 최종적인 절차를 요구받는다. <스팀보트 빌 주니어>에서 갑작스런 태풍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지만 키튼은 아버지, 연인을 차례로 구한 뒤에 급기야 조난중인 목사를 물에서 구조해 결혼식을 치른다. 이는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라 순종적인 사랑에 다름 아니다. (키튼의 영화에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슬픔의 시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령 <전문학교>와 <셜록 주니어>의 마지막 장면의 결혼식은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방식의 결과로 얻게 된 이런 행운(혹은 불운?)은 키튼의 영화에서 웃음(또는 적지 않은 슬픔을 간직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양가성이야말로 키튼 영화가 지닌 독특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키튼 영화의 희극성은 따라서 배우가 자빠지고 넘어져서 웃음을 유발하는 퍼포먼스에 머물지 않는다. 물리학의 법칙에 의거해 고도로 연출된 장면의 효과로 인한 웃음, 이것이야 말로 키튼 영화의 묘미에 가깝다. 키튼을 위대한 ‘작가’로 채플린을 위대한 ‘배우’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채플린에게 카메라는 사실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단지 배우인 채플린과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을 중계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키튼의 경우 카메라는 사뭇 다르다. 키튼에게 카메라는 액션과 관련되어 있고,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키튼의 영화에서 카메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화의 세부적인 디테일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키튼의 영화에서 마찬가지로 정말로 잊기 힘든 것은 그의 몸과 액션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속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환경들, 사물들, 그것의 운동들이다. <항해자>(1924)와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의 거대한 증기선, <제너럴>과 <손님 접대법>(1923)의 기차, <셜록 주니어>(1924)의 영화관이 이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기계와 키튼이 맺는 관계는 하지만 대단히 양가적인데, 이는 그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물과 기계의 시스템에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하면서 키튼이 자신이 거주할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던한 세계의 기계문명 앞에서 무력한 아이와도 같은 위치에 서 있었고, 동시에 수학과 물리학에 능통한 숙달된 운동선수처럼 세계의 무질서에 맞서 몸의 개그를 보여주었다. 키튼의 기계-개그는 그리하여 살바도르 달리와 루이스 부뉴엘과 같은 2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소비에트의 형식주의자들과 미래파들을 열광시켰으며 영화의 미장센에 주목한 누벨바그리언들을 매료시켰다. 

 

 

 

 

이렇게 되리라곤...
키튼은 화려한 20년대를 마감하면서 1928년 MGM으로 옮겼고, 여기서 <카메라 맨>(1928)이란 각별한 작품을 남겼지만 유성영화의 도래와 더불어 퇴락을 겪게 된다. ‘MGM으로 이적한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술회하듯이 키튼은 할리우드 시스템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1933년에는 급기야 알콜중독자란 표면상의 이유로 MGM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이후 키튼은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는 6-70년대에야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한데, 1940년대의 후반부터 50년대에 걸쳐 할리우드에서 발생한 촬영소 시스템, 호화찬란한 할리우드 시스템의 붕괴를 겪고 나서 키튼이 다시 영화사안에 복권되었기 때문이다. 키튼의 영화와 삶은 그리하여 20세기의 모던한 세계, 그 역사와 맥을 같이한 할리우드 시스템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키튼은 모던한 세계에서 인간이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기 위해 시스템에 순응해야 하며 그것에 맞춰 신체를 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키튼의 이러한 페시미즘은 <라임 라이트>(1953)에서 관객들의 썰렁한 반응을 지켜보는 초라한 배우가 된 그가 ‘우리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라고 비탄에 젖어 이야기할 때 극에 달한다. 그럼에도 그의 ‘쿨’한 액션개그가 지닌 매력은 슬픔을 넘어설 만큼 기쁨을 주고 있다.
김성욱(영화평론가)

 

* 예전 2004년 처음으로 '버스터 키튼 회고전'을 개최할 때, 이제는 사라진 '필름 2.0'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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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환대 Our Hospitality

버스터 키튼은 영화가 탄생한 1895년에 태어났다. 그는 1920년대에 서커스와 마임에 기원한 무성영화의 근본적인 장르인 뷔를레스크(익살희극)의 창시자로 전성기를 구가했고, 유성영화가 도래하던 2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영화계에서 존재감을 잃기 시작해, 30년대 이후에는 할리우드에서 완전히 망각되었다. 1933년 이후에 그는 대략 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대중들의 기억에 남는 영화는 고작 <선 셋 대로>나 <라임 라이트> 정도였을 뿐이다. 이들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그저 미미한 조연에 불과했다.

키튼의 영화는 그러나 1950년대에 새롭게 발굴됐다. 하나의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1954년 어느 여름밤. 버스터 키튼은 아내와 함께 <제너럴>이 상영되는 L.A.의 코로넷 극장을 우연히 방문했다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자신의 옛 영화를 결코 보려하지 않았던 키튼이기에 이 방문은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당시 극장의 지배인이었던 레이먼드 로하우어는 키튼이 극장을 방문한 것에 놀라 그에게 무성영화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키튼은 자신의 차고에 몇 편의 영화가 있다며 필요하다면 가져가라고 그에게 말했다. 다음 날, 키튼의 집을 방문한 로하우어는 그의 주차장에서 <세 가지 시대>, <전문학교>, <셜록 주니어>, <항해자> 등의 질산염 프린트를 발견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미 파산한 ‘버스터 키튼 프로덕션’의 유실된 영화들이 수집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할리우드 무성영화의 80% 이상이 소실되었음에도 키튼의 영화는 이례적으로 보존되어 1950년대 미국의 극장에서 다시 새로운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영화는 6-70년대에 새롭게 조명되었다. 1965년에는 사무엘 베케트의 <필름>에 출연했고, 1968년에는 케빈 브라운로우의 무성영화에 관한 인터뷰책 'The Parade's gone by'가 출간되었고 같은 해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라는 다큐멘터리가 공개됐다. 이번 특별전에서 이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영화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던 1995년(마찬가지로 키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던 해)에 다시 화려하게 키튼은 부활의 계기를 마련했다. 1995년. 키튼의 탄생 100주년의 해에 ‘버스터 키튼의 예술’이란 세 박스 세트의 DVD가 출시되었다. 11편의 극영화에 19편의 투 릴 영화들이 DVD에 수록되었다. 우리가 대중적으로 키튼의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은 DVD의 출시 덕분이었다.

버스터 키튼의 회고전을 처음 개최한 것이 이미 2004년의 일이다. 당시 레이먼드 로하우어의 방대한 무성영화 컬렉션-700편-을 인수한 곳이 두리스 코퍼레이션으로 이 곳의 팀 란자 씨의 협조로 이번에 상영하는 영화들 대부분을 필름으로 상영할 수 있었다. 당시 31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방대한 두리스 필름의 무성영화 컬렉션이 다른 곳으로 팔리면서 한동안 대규모 회고전이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이 십년이 지나 다시 한번 큰 규모의 특별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2004년을 기억하며 그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터 키튼에 대한 "우리들의 환대"를 표하고 싶다. 그는 최선을 다해 불가능한 일을 완수하고 고독한 형상의 이미지를 남기고 사라졌고, 다시 우리들에게 나타났다. 그는 형편없는 패가 들어와도 태연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고 우아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새로운 리듬으로 사랑하고 이 세계에서 가장 쿨하게 생존했다. 댄 칼라한이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한다. "그가 얻으려고 했던 것은 단지 우리들의 웃음이었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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